켜켜이 고인 역사와 씻기며 흐르는 기억들
역사의 상흔을 씻는 임흥순 작가의 전시 프로젝트

우리는 지나간 시대, 고통스러운 역사, 그리고 우리를 떠난 사람들과 화합할 수 있을까요? 가끔은 단지 사실에 관심을 가지는 것만으로도 화합을 이루고 있다고 착각하는 스스로를 발견하고 반성하게 됩니다. 진정한 화합은 아픈 기억을 들여다 보고, 함께 나누고,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나갈 때 비로소 가능해집니다. 그리고 어떤 예술은 우리를 화합하기 어려운 것들과 연결될 수 있게 돕기도 하죠.
임흥순 작가의 전시 《기억 샤워 바다》는 재일동포 1세대인 고 김동일 할머니의 유품을 매개로, 4·3이라는 역사적 상처, 디아스포라의 삶, 젠더와 돌봄의 문제를 섬세하게 직조하며 우리에게 새로운 애도와 화합의 언어를 제시합니다. 과거의 고통을 현재의 우리가 어떻게 함께 나누고 기억할 수 있을지 묻죠. 각자의 방식으로 기억을 받아들이고 나누는 과정은 한데 흐르는 감정의 결을 만들어내고, 우리는 이 흐름 속에서 누군가의 기억을 타인과 함께 감각하며 새로운 연결의 순간을 마주합니다. 모든 물이 흘러 모이는 바다에서 고통스러운 기억을 씻고 함께 흐르듯 말이죠.
바다를 건너며 씻긴
2,000벌의 기억들
힘든 기억들은 왜 쉽게 잊히지도 않는 걸까요? 누구나 고통스러운 기억에 둘러싸인 채 힘든 적이 있을텐데요. 어떨 때는 기억들이 몸에 가득 쌓여 나를 대신 이루는 것 같고, 기억들이 흘러 넘쳐 물건들에 고이기 시작하면 방이 금세 물건들로 가득차 버리기도 합니다. 감당하기 어려운 상태가 현실에 현현하며 문제가 가중되는 것만 같죠. 임흥순 작가가 김동일 할머니의 집에 방문했을 때 느낀 감정이 이와 비슷했을까요?
임흥순 작가는 한국과 일본의 국교 정상화 50주년을 기념해 기획 된 전시를 준비하며 책에서 김동일 할머니의 삶에 대해 접하고, 2015년 도쿄에 있는 김동일 할머니의 집에 방문하게 됩니다. 한 사람이 겨우 지나갈 만한 통로만을 남겨두고 좁은 집 안에 각양각색의 옷과 손뜨개 작업들이 먼지 덮인 채 켜켜이 쌓여있는 것을 보고 압도당하죠. 작가는 “감당할 수 없었던 경험과 기억들이 흐트러져 있고, 정리할 수 없는 역사를 쌓아놓은, 혹은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고 말하며 쌓여 있는 옷들이 침묵으로 발화하고 있는 이야기에 주목합니다.

제주 4.3 사건의 비극을 겪고 일본으로 밀항하여 재일조선인의 삶을 살았던 김동일 할머니의 삶은 그 자체로 한국 근현대사의 상처를 고스란히 담고 있습니다. 제주 4.3 사건은 1947년 유엔군의 주도로 한반도 남쪽에서만 실시하고자 했던 단독 선거에 대한 반대 시위를 무장 군인이 진압하며 수많은 민간인 희생자가 발생한 비극적인 사건입니다. 김동일 할머니는 조천중학원 학생일 때 연락책으로 활동하며 이념의 경계 속에서 불안정한 삶을 지속했습니다. 일본으로 밀항한 후에도 외부인으로 살아가며 ‘디아스포라’의 아픔을 겪을 수밖에 없었죠.
남겨진 옷들이 전하는 이야기는 《기억 샤워 바다》라는 전시로 발전해 2023년도 제주4.3평화기념관에서 개최되고, 지금까지 <메모리얼 샤워>라는 프로젝트로 여러 팝업 전시와 워크숍, 영상 작업들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필자도 전주국제영화제에 들렀다가 동명의 영화 연계 전시로 열리는 전시에 방문하며 이 프로젝트를 알게 되었죠.

전시의 제목인 <기억 샤워 바다>는 그 자체로 깊은 의미를 내포합니다. '샤워'라는 단어는 물리적으로 씻어내고 정화하는 행위를 연상시키며, 이는 기억을 통해 과거의 상처와 고통을 씻어내고 정화하려는 의도를 담고 있습니다. '바다'는 생명의 근원이자 동시에 국경을 초월하는 광활한 공간을 상징합니다. 이러한 ‘바다‘의 상징성은 역사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는 개인의 기억이 공동체적으로 연결되며 치유되는 새로운 가능성을 내포하죠. 이는 전시가 지향하는 '새로운 애도 방식'의 본질, 개인의 아픔을 공동체적 연대로 승화시키려는 작가의 의도를 함축적으로 드러냅니다.
작가는 전시를 통해 과거와 현재, 삶과 죽음, 기억과 경험이 한데 어우러져 흐르는 기억의 바다를 만들고자 했습니다. 단순한 과거의 역사적 사실을 회고하는 것을 넘어, 김동일 할머니의 삶과 유품에 스민 기억을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 삶 속에서 나누고 새롭게 연결하고자 시도했죠. 이는 김동일 할머니라는 한 개인의 지극히 사적인 삶과 유품을 통해 제주 4·3과 재일 디아스포라라는 공적 역사를 다루는 방식으로 구현됩니다. 예술은 이처럼 개인의 고통과 집단의 역사를 연결하며, 잊혀진 목소리를 호출하고 시대의 아픔을 보듬는 새로운 언어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메모리얼 샤워> 프로젝트 웹사이트
‘고치글라’ 같이 가자
함께 입고 엮는 기억들
《기억 샤워 바다》의 핵심은 단순히 정리되지 않은 유품을 전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작가는 국내와 일본을 오가며 <고치글라 Run with Me> 유품 나눔 워크숍을 열었습니다. ‘고치글라’는 ‘같이 가자’는 제주어입니다. 참여자들은 김동일 할머니의 유품 하나하나를 정성껏 다려 이름표를 달고, 마음에 드는 옷을 골라 새로 리폼하거나 평상시에 입고 다니는 일상적인 퍼포먼스를 통해 옷과 함께 새로운 일상을 만들어갑니다. 김동일 할머니의 옷에서 나 자신의 이야기 또는 역사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경험하며 새로운 기억을 발생시켰죠.

참여자들 뿐만 아니라 작가 역시 할머니가 모은 옷들의 다채롭고 화려한 색감과 세련된 디자인을 보고 놀라기도 했다고 하는데요. 그래서 추모의 이미지를 강화하기 보다 세련된 의상실이나 소품실 형태를 구상하여 사람들이 보다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도록 기획했다고 합니다. 2023년 전시 개막식에서는 참여자들이 옷을 입고 런웨이를 걷는 퍼포먼스를 하기도 했죠. 워크숍 뿐만 아니라 전시에서도 관람객들은 단정하게 걸려있는 옷들을 살피며 옷에 깃든 이야기를 상상하고, 마음에 드는 옷을 골라 직접 입어보고, 또 가져갈 수 있습니다. 관람객들은 자연스럽게 전시의 참여자가 되고, 김동일 할머니의 집 안에 고인 채로 흐르지 못하던 옷은 고국으로 돌아와 참여자들을 통해 전국 각지로 뻗어 나갑니다.

유품들이 '고치글라 Run with Me' 워크숍을 통해 국내외 다양한 사람들과 나누어지고, 그들의 기억과 연결되는 과정을 통해 김동일 할머니의 개인적인 기억은 참여자들의 기억과 얽혀 새로운 기억으로 변모합니다. 단순히 과거에 존재했던 물건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현재의 사람들과 상호작용하며 새로운 의미가 생성되고, 비극적인 역사를 봉합하는 강력한 매개체가 됩니다. 이러한 과정은 김동일 할머니라는 특정 개인의 삶이 거대한 역사적 맥락 속에서 어떻게 공동체적인 기억으로 확장되고 계승되는지를 보여줍니다. 작가는 어쩌면 김동일 할머니의 메워지지 않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한을 참여자들이 만들어내는 기억들로 다시 엮어 채우고자 했던 것이 아닐까요.
한데 모여 흐르고
퍼져나가는 기억들
임흥순 작가는 국립현대미술관 현대차 시리즈 10주년 도록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여성은 직관과 감각 그리고 몸으로 느끼는 것들이 굉장히 뛰어나다. 특히 중년 여성들의 판단과 지혜로움에 아주 놀랐고, 따뜻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런 지혜로움과 생각과 판단을 미술 안으로 가져올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면서 여성의 삶, 여성들의 노동 현실 같은 문제들까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예로부터 여성들은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하고, 조각보를 만들며 잇고 연결하며 강화하는 힘의 지혜를 알고 있었죠. 몸으로 무엇인가 경험하는 것 역시 여성에게 더욱 가까운 삶의 방식입니다.

몸에 저장되고 몸에서 발생하는 기억 역시 정적으로 한 곳에 고여 있는 것이 아니라 움직이고 변화할 때 살아있는 존재입니다. 《기억 샤워 바다》는 제주4·3평화기념관에서 시작되었지만, 한시적이고 일시적으로 일어난 해프닝이 아닙니다. 전시는 김동일이라는 한 사람의 삶과 유품을 매개로, 장소와 국경을 넘어 기억의 흐름을 계속 이어갑니다. 일본과 한국의 여러 도시에서 유품 나눔 워크숍과 상영회, 팝업 전시가 순차적으로 열리며, 각 지역의 맥락 속에서 다른 감정과 경험의 파동을 발생시키죠. 제주에서 시작된 기억은 서울, 제주, 부안, 부산, 오사카, 도쿄를 거치며 각각의 장소에서 여러 사람들을 만나며 새로운 의미를 생성하고 확장됩니다. 여성의 끊임없는 순환과 변화의 지혜가 전시의 방식에도 반영된 것이죠.
필자도 2025년도에 열린 《기억 샤워 바다》 전시에 방문해 벽면을 가득 채우며 걸려있던 옷들 중 하나를 골라 인수증을 작성했습니다. 인수증은 ‘이 옷을 선택한 이유’와 ‘옷을 입고 어디에 가서 무엇을 할 것이냐’는 간단한 질문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워크숍 참여자 중 한 명이 기록한 “하늘에서 자기 옷을 그렇게 입고 다니(는 사람들을 보)면 기분이 좋을 것 같아요”라는 문장이 기억나, 일상에서 자주 입을 수 있을 법한 아이보리색 스트라이프 반팔 셔츠를 선택했습니다. 다른 워크숍 참여자들의 소감처럼 필자의 할머니의 유품을 입고 다니면서 할머니와의 연결을 이어갈 수 있다고, 그럼으로써 애도를 새로운 방식으로 실천할 수도 있겠다고도 생각했죠. 무엇보다 이 옷을 입고 국내 이곳저곳을 많이 돌아다니고 싶어졌습니다. 김동일 할머니의 옷이 고향을 원없이 누빌 수 있도록 자주 꺼내 입을 생각입니다.
《기억 샤워 바다》는 한 사람의 삶에서 시작된 기억이 어떻게 공동체의 기억으로 확장될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김동일 할머니의 유품은 더 이상 사적인 소유물이 아니라, 시공간을 넘나들며 우리가 함께 나누고 경험할 수 있는 기억의 강력한 매개체입니다. 과거의 고통스러운 기억은 현재의 감각으로 치유되고, 함께 애도하고 연대하는 문화적인 방식을 통해 새롭게 기록됩니다. 바다는 끊임없이 흐르는 순환을 상징하죠. 바다로 모든 강물이 모여 하나가 되듯이, 《기억 샤워 바다》는 개인의 고통, 역사의 상처, 서로 다른 문화와 시대를 모두 씻어내며 하나의 큰 흐름으로 연결시킵니다. 한 사람의 기억이 다른 사람의 기억과 만나고, 한 지역의 상처가 다른 지역의 아픔과 공명하며, 과거의 고통이 현재의 치유로 전환됩니다. 우리는 단순히 서로의 차이를 유보하는 화합이 아니라, 각자의 상처를 인정하고 함께 치유해 나가는 진정한 화합을 경험합니다.
임흥순 작가의 《기억 샤워 바다》는 예술이 단순히 아름다운 것을 창조하는 행위를 넘어, 사회적 치유와 연대의 가능성을 열어젖히는 실천입니다. 그 실천은 전시장을 넘어 우리의 일상으로, 개인의 경험을 넘어 사회적 변화로 확장될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론을 제시하죠. 예술은 이렇게 화합의 과정으로 우리를 인도하는 안내자이자, 우리 모두가 참여할 수 있는 삶의 실천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