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세계 다른 마음을 잇는 단편 만화집 3선
단편이라는 거울로 들여다본 우리 안의 어긋남과 다정함

하나의 이야기로는 다 말할 수 없는 마음이 있습니다. 단편 만화집은 바로 그런 마음을 담기 좋은 형식입니다. 짧은 이야기 속에서 서로 다른 인물과 상황이 교차하고, 작가는 다양한 시선을 통해 세상을 바라봅니다. 그렇게 단편들은 하나하나 다른 리듬으로 시작되지만, 책장을 덮을 즈음이면 하나의 큰 덩어리 진 인상을 남기고 독자에게 새로운 작가를 각인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이번에 소개할 세 권의 단편 만화집은 각각 현실과 상상, 상실과 회복, 가깝지만 먼 두 사람의 인연을 다룹니다. 한 작가의 다채로운 시선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 삶에도 스쳐 지나갔던 관계와 감정이 겹치며 조용한 울림을 전합니다. 단편이라는 형식 속에 녹아든 이 다양한 화합의 순간들을 들여다보려 합니다. 특히 출판 만화 읽기에 관심이 있는 독자들에게 이번에 소개할 작품집이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오시로 고가니, 『해변의 스토브』

‘이 만화가 대단하다!’는 2005년부터 일본 출판사 다카라지마사가 발행하는 만화 랭킹으로 매년 현재 일본 만화계의 흐름을 파악하기에 좋은 지표가 됩니다. 『해변의 스토브』 는 작가의 데뷔작임에도 불구하고 2024년 여성편에서 1위를 차지했습니다.
표제작 <해변의 스토브>를 비롯한 7편의 단편은 상실과 위로, 다정한 온기를 간직한 이야기로 구성되었습니다. 남녀의 만남과 이별을 그린 이야기는 많지만, 한때 사랑했던 두 사람의 관계를 바라보는 난로의 시선은 새롭습니다. 언제나 방 한편에 있던 난로는 두 사람이 써 내려간 사랑 영화를 기억하고, 이제는 홀로 남은 인물을 조용히 위로합니다. 이처럼 생소한 대상에 따뜻한 감정을 불어넣는 방식은 다른 단편에서도 반복됩니다.
<설녀의 여름>에서는 눈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의 상상 속에서 태어난 ‘설녀’가 생애 처음으로 여름을 맞이하고, <당신이 투명해지기 전에>에서는 사고로 투명 인간이 되어버린 남편과 그를 바라보는 아내의 불안과 애정이 섬세하게 그려집니다. 비현실적인 설정 안에서도 인물들의 감정은 지극히 현실적이고 정성스럽기에 더 뭉클합니다.
『해변의 스토브』는 다정한 판타지 속에서 상실을 겪은 인물들이 서로에게 다가가 위로를 건네는 과정을 통해, 내면의 균열이 다시 이어지는 감정의 복원을 그립니다. 일상에서 느끼는 작지만 깊은 균열과 그 틈을 메우려는 마음이 포개지며 어느 순간 독자 자신의 감정과 맞닿게 됩니다. 이 단편집은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했던 마음의 온기를 일깨우며 때로는 옆에 있는 누군가, 혹은 그 무엇이 어렵고 막막한 현실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는 용기를 준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현실의 무게에 지친 누군가에게 이 만화는 조용하지만 확실한 위로가 되어줄 것입니다.

타카노 후미코, 『노란 책 – 자크 티보라는 이름의 친구』

타카노 후미코는 1979년에 데뷔해 지금까지 단 7권의 단행본만을 펴낸 작가지만, 독특한 연출과 상상력으로 깊은 인상을 남깁니다. 『노란 책 – 자크 티보라는 이름의 친구』는 작가의 대표작 중 하나로 데즈카 오사무 문화상 대상을 받았습니다.
4편의 단편이 수록된 이 단편집에서 단연 돋보이는 건 표제작 <노란 책 – 자크 티보라는 이름의 친구>입니다. 소설 속 세계에 푹 빠졌던 기억이 있는 이들에게 깊은 공감을 선사하는 이야기죠. 독서를 좋아하는 여고생 미치코는 프랑스 소설 『티보 가의 사람들』에 몰두하며 현실과 상상을 오가는 나날을 보냅니다. 매일 버스를 타고 학교에 가고, 집에 와서는 동생을 돌보고 가사를 돕는 미치코의 평범한 일상은 19세기 프랑스를 배경으로 한 소설과 아주 달랐습니다. 그녀는 평범한 일상 속에서도 책을 통해 세계를 넓히고, 소설 속 인물들과 마음을 나누며 내면의 대화를 이어갑니다. 졸업 후 취직을 앞둔 미치코는 마지막으로 주인공 자크 티보와 인사를 나누며 책을 통해 얻은 뜨거운 감정과 세계를 마음 속에 간직하겠다고 다짐합니다. 이 단편은 책을 매개로 낯선 세계와 교감하며 자신의 삶에 생기를 불어넣는 미치코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언제든지 돌아갈 수 있는 나만의 세계가 있다는 사실은 쳇바퀴처럼 굴러가는 삶을 더욱 아름답게 만듭니다.
수록작 <마요네즈>, <2-2-6>에서도 여성 화자의 미묘한 심리가 돋보입니다. 인상이 좋지 않았던 동료와 결혼에 이르게 되는 이야기, 일터에서의 어긋난 인연을 그린 이야기는 익숙한 일상이 문득 예기치 않은 감정과 결과로 이어지는 순간들을 포착합니다. 이처럼 다카노 후미코는 일상과 판타지의 경계를 오가며, 현실 속에 숨은 감정과 상상의 여지를 섬세하게 길어 올리는 이야기로 여운을 남깁니다.

호즈미, 『결혼식 전날』

이 책은 남매, 부녀, 형제 등 혈연으로 맺어진 특별한 두 사람의 이야기가 수록된 단편집입니다. 2013년 ‘이 만화가 대단해’ 여성편 2위를 차지했습니다. 특히 이 단편집은 짧은 호흡 안에서도 감정을 밀도 있게 끌어올리는 반전과 극적인 전개가 인상적입니다. 마치 무심한 사람에게도 끝내 감정을 끌어내는 단막극을 보는 듯합니다.
표제작 <결혼식 전날>은 결혼식을 하루 앞둔 두 사람의 들뜬 긴장감을 그립니다. 이미 정해 놓은 웨딩드레스가 잘 어울릴지 걱정하고, 하객 좌석 배치와 식사는 문제없는지 묻고 또 묻습니다. 어릴 적 일찍 돌아가신 부모님께 담담하게 결혼 소식을 전하기도 하며 둘만의 전야제를 보냅니다. 인생의 중요한 선택을 경험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가 특별한 두 사람의 관계와 함께 전개되며 더욱 감동적으로 표현되었습니다.
수록작 <모노크롬 형제>는 오랜만에 만난 중년의 쌍둥이 형제를 다룹니다. 학창 시절 같은 여학생을 좋아했던 형제는 그녀의 장례식장에서 수십 년간 쌓인 이야기를 나눕니다. 서로가 알지 못했던 감정과 오해를 꺼낸 그들의 대화는 지나간 시간을 화해와 이해의 시선으로 감싸 안습니다.
『결혼식 전날』은 가까운 사이일수록 놓치지 쉬운 마음을 예리하게 포착합니다. 멀리 떨어지더라도 결국 가족이기에 흘릴 수 있는 뜨거운 눈물과 가족이라서 줄 수 있는 단단한 응원을 이 만화를 통해 새삼 느꼈습니다. 작가 호즈미는 너무 당연해서 잊었거나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함께 있음’의 의미를 보여줍니다.

『해변의 스토브』는 상실과 회복의 과정을 통한 ‘내면’의 화합을, 『노란 책 - 자크 티보라는 이름의 친구』는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넘나드는 상상을 통해 ‘나와 세계’의 화합을, 『결혼식 전날』은 관계의 균열과 이해를 통해 ‘사람과 사람’ 사이의 화합을 보여줍니다. 세 만화집의 단편들은 서로 다른 분위기를 지녔지만, 모두 마음과 마음 사이에 다리를 놓는 이야기입니다.
이 단편집들을 읽고 나면, 우리 각자의 일상 속 균열이 조금은 다르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지나간 감정들이 다시 말을 걸고, 무심히 흘려보낸 순간들이 따뜻하게 되살아납니다. 짧은 이야기지만 그 안에 담긴 진심은 오래 남아 독자가 자기 삶의 틈을 스스로 들여다보게 만듭니다. 때로 우리에게 필요한 건 거대한 서사가 아니라, 삶의 어디쯤에서 마주쳤을지도 모를 누군가와의 조용한 대화일지 모릅니다. 이 단편집들이 독자의 일상에 그런 조용한 대화로 남았으면 좋겠습니다. 문득 마음이 어지러울 때, 이 만화들이 건네는 작은 다정함이 떠오르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