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탄생하는 곳,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들
가족에서 찾아보는 마음의 단서
초심, 처음과 마음이라는 단어를 나란히 놓고 보니 이런 것이 궁금합니다. 마음은 어디에서 태어나는 걸까요? 기원과 형태가 비교적 분명한 육체와 달리 마음은 모호한 현상처럼 느껴집니다. 형태가 없는 무언가의 탄생을 상상하는 일은 바람이 불어오는 허공을 추적하는 일처럼 막연한데요. 저는 바람이 자주 불어오는 곳에서 힌트를 얻어보려 합니다.
마음이 자주 움직이는 곳으로 고개를 돌리면 자주 이들이 있습니다. 사랑과 상처를 함께 배우는 최초의 관계, 가족입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혈연을 넘어선 낯선 형태의 가족을 통해 마음이 자라나고 이어지는 과정을 담아냅니다. 필요에 의해 서로를 선택하고, 상처를 중심으로 등을 기대고, 오해를 극복하며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사람들의 연대 속에서 마음의 단서를 찾아봅니다.
<어느 가족>

도쿄의 허름한 단칸방에는 ‘가짜 가족’이 함께 살고 있습니다. 옆자리 파친코 구슬을 슬쩍하는 할머니 하츠메, 일용직 일을 하며 좀도둑질을 일삼는 아버지 오사무, 세탁소에서 손님의 옷을 뒤지는 어머니 노부요, 유흥업소에서 일하는 동생 아키, 그리고 아버지에게 도둑질을 배우는 아들 쇼타. 이들은 돈과 돌봄이라는 필요에 의해 가족의 역할을 나누어 살아갑니다. 어느 날, 부모에게 학대받던 소녀 유리를 발견한 이들은 아이를 집으로 데려와 린이라는 새 이름을 지어주고 함께 지내기 시작합니다. 린은 가족에게 받은 상처를 이 ‘가짜 가족’의 따뜻한 정으로 서서히 덮어갑니다. 바다를 한 번도 본 적 없다는 린을 위해 가족 모두가 여행을 떠나 행복한 시간을 보내지만 이후 쇼타의 절도 행위가 발각되면서 상황은 급변합니다.

린의 친부모는 아이를 때리기 전에 새 옷을 사주며 달래지만 노부요는 ‘사랑하면 때리는 게 아니라 안아줘야 한다’고 말하며 여행을 가기 전 린을 위해 백화점에서 옷을 훔칩니다. 아이 앞에서 거리낌 없이 도둑질을 하면서도 동시에 가족의 사랑을 알려주는 모순된 모습은 가족이라는 관계가 얼마나 복잡한지를 극단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들은 필요로 인해 서로를 선택했고 그 연대를 위해 여러 범죄를 저지릅니다. 이들의 선택으로 이루어진 연대에 쉽게 고개를 끄덕일수 도 내저을 수도 없습니다. 다만 서로의 결핍을 메우며 살아가는 이들을 가족이 아니라고 한다면 우리는 그들을 무엇이라 불러야 할까요.
<바닷마을 다이어리>

가마쿠라의 바닷마을에 살고 있는 사치, 오시노, 치카, 세 자매는 오래전 자신들을 버리고 떠난 아버지의 부고 소식을 듣게 됩니다. 장례식에 참석한 그들은 아버지의 재혼 가정에서 태어난 이복동생 스즈를 만납니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 스즈에게 남은 가족이 새어머니와 어린 이복동생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자매들은 충동적으로 스즈에게 함께 살자고 제안합니다. 그렇게 네 자매는 가마쿠라의 바닷가 집에서 모여 살기 시작합니다. 세 자매에게 아버지는 상처를 남기고 떠난 존재였고, 스즈는 그런 세 자매 사이에서 자신이 과연 ‘가족’일 수 있는가를 고민하기 시작합니다.

때때로 결핍이 또 다른 결핍을 알아봅니다. 아버지의 장례식장에서 마주한 네 자매는, 각자 마음속에 자리한 ‘아버지의 부재’라는 결핍을 알아봅니다. 세 자매에게 아버지는 상처를 남긴 존재였지만 그들은 그 상처를 원망으로 남겨두지 않고 남은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길을 선택합니다. 아버지의 기억은 오히려 네 자매를 이어주는 하나의 실이 되어 그들을 단단히 묶어줍니다. 결핍을 나누고 서로의 상처를 봉합하는 시간은 가족이 단지 피로 이어지는 관계가 아니라 마음의 선택으로 확장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가마쿠라의 잔잔한 바닷마을을 배경으로 흐르는 시간은 네 자매의 관계를 한층 더 따뜻하고 윤이 나게 비춰줍니다.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엘리트 회사원 료타는 아내 미도리와 함께 여섯 살 아들 게이타를 키우며 완벽해 보이는 가정을 꾸리고 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부부는 병원으로부터 출산 당시 아이가 바뀌었다는 충격적인 연락을 받습니다. 시골에서 전자제품 가게를 운영하는 유다이 부부의 아들 류세이가 료타의 친아들이라는 사실이 밝혀진 것입니다. 두 가족은 논의 끝에 혈연을 우선시하는 료타의 주장에 따라 각자의 친자식을 데려와 바꿔 키우기로 합니다.

인간은 종종 자신의 결점을 노력으로 메우며 완벽해지려 합니다. 사회적 성공과 완벽주의를 좇아온 료타 역시 완벽한 아버지가 되고자 자신을 끊임없이 단련하며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그 완벽함의 이면에는 중요한 가치보다 효율을 중심하는 냉정함이 있습니다. 게이타가 자신의 친아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료타는 아이의 부족한 부분을 떠올리며 내심 ‘그럴 줄 알았다’는 냉담한 확신을 드러냅니다. 하지만 정말 인간이 혼자만의 능력으로 삶의 결핍을 극복할 수 있을까요? 료타가 믿어온 완벽함은 결국 그를 고립시켰고, 그는 뒤늦게 깨닫게 됩니다. ‘아버지’라는 이름은 아이를 낳음으로써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함께 보낸 시간 속에서 쌓인 마음의 기록이라는 것을요. 아이를 키워온 시간 속에서 료타는 게이타의 손을 잡고 길을 걸었고 그의 잠든 얼굴을 바라보며 하루를 마무리했을 것입니다. 비록 그들이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관계였다 할지라도 그 모든 순간이야말로 가족의 증거입니다. 결국 사랑의 시간 앞에서 완벽의 기준은 무의미해집니다. 세계는 불완전한 대로, 불완전하기에 풍요롭습니다.
‘냉철함’과 ‘따뜻함’, ‘사랑’과 ‘증오’. 서로 공존할 수 없을 것 같은 단어들이 마음이라는 영역 안에서는 아플 만큼 단단히 엮여 있을 때가 있습니다. 다시는 보지 않을 것처럼 돌아섰다가도 어느새 슬그머니 안부를 묻고 싶은 마음 같은 것이요. 기압의 차이로 불어오는 바람처럼 마음은 상반된 감정들이 부딪히고 섞이며 만들어지는 예측하기 어려운 현상 같습니다. 영화는 날씨처럼 변화무쌍한 마음의 움직임을 섬세하게 포착합니다. 불완전한 관계 속에서 서로의 정의할 수 없는 감정을 이해하려 애쓰는 인물들을 통해 마음이 흔들리고 섞이며 자라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가족은 그렇게 자라난 마음의 가장 오래된 목격자이자, 그 마음이 처음 불어온 자리입니다.
참고 자료
『걷는 듯 천천히』 / 고레에다 히로카즈 / 문학동네
『좀도둑 가족』 / 고레에다 히로카즈 / 비채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한/일 각본집』 / 고레에다 히로카즈 / 플레인
『바닷마을 다이어리 한/일 각본집』 / 고레에다 히로카즈 / 플레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