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발전
장 오노레 프라고나르(Jean-Honoré Fragonard)의 연작, "사랑의 단계(Les Progrès de l'amour)" 연작을 통해
한국인에게 ‘발전’이란 평생의 숙제입니다. 어제보다 더 나은 오늘을 요구받고, 그렇지 못하면 도태된다며 스스로를 채찍질하기도 하죠. 하지만 세상의 모든 발전이 이토록 가혹한 숙제이기만 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인류가 태초부터 자발적으로 열렬히 즐겨온 가장 설레는 발전, 바로 “사랑의 발전”이 있으니까요.

두 사람이 서로의 존재를 알아채고 탐색하며 마침내 연인으로 발전해 나가는 과정. 이 과정을 보여주는 <나는 SOLO>, <환승연애> 등의 연애 리얼리티 프로그램이 인기를 끄는 것만 봐도, 대중의 도파민이 어디로 향하는지 알 수 있죠. 타인의 사랑이 무르익어가는 과정을 훔쳐보며, 잊고 지낸 설렘을 되찾기도 합니다.
이 은밀한 취미는 21세기 한국에서뿐만 아니라 18세기 프랑스 귀족들 사이에서도 유행했습니다. 그들은 정략결혼이 당연했던 탓에 밀회를 통해 진정한 사랑을 찾았고, 그 아슬아슬한 과정을 넷플릭스 같은 OTT 스크린 대신 화려한 캔버스 속 장면으로 훔쳐보며 환호했죠.
그 중심에 바로 로코코 화풍의 대가, 장 오노레 프라고나르(Jean-Honoré Fragonard)의 연작, “사랑의 단계(Les Progrès de l'amour)”이 있습니다. 18세기판 연애 리얼리티, 그 은밀한 관전석으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내꺼인 듯, 내꺼 아닌, 내꺼 같은
“사랑의 단계” 연작 중 첫 번째, “구애 La Poursuite”

유희의 정원에서 시간을 보내는 세 소녀에게 불청객이 들이닥칩니다. 소년은 한 소녀에게 모자를 벗고 장미꽃 한 송이를 건네며 구애를 펼치죠. 소녀는 당황한 듯 수줍게 도망쳐 보지만, 시선은 그를 향해 있습니다. 소년의 준수한 외모 덕분일까요? 아니면 귀족다운 정중한 태도 덕분일까요? 분명한 건, 소녀 역시 이 상황이 싫지만은 않은 듯합니다. 내꺼인 듯 내꺼 아닌 내꺼 같은, 두 사람 사이 팽팽한 밀당의 시작을 알리는 순간입니다.
도파민 폭발하는 짜릿한 순간
“사랑의 단계” 연작 중 두 번째, “밀회 La Rencontre”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두 사람의 비밀 연애가 시작됐습니다. 소년은 사다리까지 동원해 담장을 넘어 밀회를 즐기려던 찰나, 어디선가 부스럭거리는 인기척이 들립니다. 소녀는 다급히 멈추라는 듯 신호를 보내고, 소년은 정지 화면처럼 우뚝 멈춰 서 있습니다. 뒤에 선 큐피드와 비너스 동상마저 캔버스 밖을 주시하며, 두 사람의 망이라도 봐주는 것 같은데요. 도파민 터지는 짜릿한 밀회의 현장을 긴장감 있게 담아내고 있습니다.
회화로 남기는 공식 커플 인증샷
“사랑의 단계” 연작 중 세 번째, “화관 쓰는 연인 L'Amant couronné”

두 사람의 관계는 마침내 절정에 다다릅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미래에 바보 같은 맹세를 하는 혼인 서약처럼, 소녀는 반지 모양의 화관을 소년에게 씌워주고 있습니다. 화가가 이 장면을 화폭에 담아냄으로써, 그들은 세상에 공식 커플임을 선언하는 ‘인증샷’을 남긴 셈이죠. 그런데 그림 속에 예쁘게 담기기 위해 한껏 자세를 취하는 소녀와 달리, 소년은 그러거나 말거나 그저 소녀에게 푹 빠져 있네요. 어쩐지 작은 볼멘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오빠, 이 사진 나 혼자 좋아서 찍어?”
벚꽃이 진 자리에 우거지는 무성함
“사랑의 단계” 연작 중 네 번째, “연애편지 La Lettre d'Amour”

두 사람의 공기는 예전과는 사뭇 달라 보입니다. 벚꽃이 진 자리엔 무성한 녹음이 우거지는 법. 활활 타오르던 도파민 불꽃은 사그라들었지만, 그 자리엔 진득하게 깊은 온기가 내려앉았죠. 소녀의 곁에는 그동안 주고받은 무수한 연애편지가 쌓여 있습니다. 편지 하나하나에 담긴 애정이 어린 고백과 약속, 다툼과 화해는 두 사람이 나눈 마음의 깊이와 그로 인해 한층 견고해진 관계를 증명하죠. 조금의 틈도 없이 서로를 꼭 끌어안고 있는 그들의 모습은 세상을 다 가진 듯합니다.
밀고 당기는 썸의 단계를 지나, 담장을 넘어 짜릿한 마음을 확인하고,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미래에 바보 같은 맹세를 하면서, 세상을 다 가진 듯한 연인이 되기까지. 프라고나르가 보여주는 “사랑의 단계”는 이야기합니다. 세상에는 우리를 짓누르고 부담 주는 발전만 있는 것이 아니고, 가슴 뛰며 다음 단계를 기다리게 되는, 꿀처럼 미치도록 달콤한 발전도 있다고 말이죠.

새로운 계절이 시작되는 봄을 맞아 우리는 또 성취를 위한 발전 계획을 세우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 설레는 계절, 스스로를 채찍질하는 일은 잠시 멈추고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를 핑크빛 낭만을 만끽해 보는 것은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