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아래 우리는 동등하게 유한한 인간

영화 속 롱테이크 형식이 전경화하는 시간성에 대해

시간 아래 우리는 동등하게 유한한 인간

편집은 영화 속 원인과 결과를 매끈히 연결하는 마법을 부립니다. 그만큼 관객은 인물이 주도하는 세계에 빠르게 진입하고, 편집의 의도성을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이게 되는데요. 한편 현실감을 확보하기 위한 연출 방식 중 하나인 롱테이크/원테이크는 조금 다릅니다. 장면을 끊지 않고 호흡을 통째로 따라가게 만들며 극중 시간과 관객의 시간을 하나로 동기화할 때, 인물의 전진은 얼마나 많은 요소에 기댄 결과인지 낱낱이 드러냅니다.

여기서 부각되는 것은 영웅담이 아니라 ‘시간과 우연에 종속된 인간’입니다. 판단의 망설임, 실수의 여파, 환경의 영향이 편집으로 지워지지 않고 그대로 체험으로 옮겨져 구체적인 감각으로 다가옵니다. 이번 글은 시간을 통제하는 기술 대신 시간을 견디는 설계를 한 작품들로 시간 자체가 들이치는 영화적 경험을 들여다봅니다.

사진 출처: Unsplash

영화는 편집의 예술이기도 합니다. 편집을 통해 촬영본을 전개에 맞게 이어가고, 창조적으로 배열하며 맛을 더합니다. 컷 편집은 시간을 자유롭게 조율할 수 있는 힘이기도 합니다. 극중 인물이 과거와 미래를, 현실과 상상을 넘나들고 과정을 압축할 수 있는 세계에 관객을 동참시키는 것. 그런데 어떤 영화에서는 ‘시간’이 ‘이야기’를 장악하기도 합니다. 영화 속 시간과 관객의 시간이 동일하게 흐르도록 편집을 최소화하고 긴 테이크로 보여주는 방식을 떠올릴 수 있는데요. 장면을 봉합해 주던 편집의 안전망을 거둬내고, 인물과 관객을 같은 초 단위로 엮는 셈입니다. 시간 그 자체가 흘러 들어오는 경험이라고 할까요. 롱테이크 혹은 원테이크라고 흔히 부릅니다.

관객은 현실에서 잊고 있던 시간성을 인지하게 됩니다. 우리는 모두 시간이라는 유한함에 갇힌 인간이라는 사실을요. 그리고 드러나는 것은 영웅에 가까운 인물의 결단이 아니라 한 인간이 경험하는 타이밍입니다. 우연의 간섭, 환경의 리듬에 기대야만 하는 인간의 생존과 선택의 연쇄 작용을 견디도록 합니다.

<칠드런 오브 맨>, 2006
잘라내지 않은 시간을 함께 통과하는 일

사진 출처: IMDb

<칠드런 오브 맨>은 인류 불임시대를 가정한 디스토피아적 미래를 배경으로 합니다. 대부분의 국가는 무정부 상태로 무너져 내려 통제력을 상실하고, 세계 각지에서 폭동과 테러가 일어납니다. 이런 혼란한 상황 속에서 기적적으로 임신한 흑인 소녀 키. 안전한 출산으로 인류에 마지막 희망을 가져올 프로젝트를 성공시키는 것이 중요한데요. 테오는 이 과업에 자신의 목적과 상관없이 엮이게 됩니다. 아들이 죽은 후 세상을 바꾸겠다는 신념이나 살아갈 의지조차 잃어버린 그인데 말이죠. 20년 만에 나타난 전 부인 줄리안의 부탁이 이끈 것입니다.

이 작품은 롱테이크를 활용해 멸망에 다다른 인류의 위기를 긴박하게 따라간 것으로 유명합니다. 결정적 순간에 호흡을 끊지 않고 동행하는 연출 방식이 두드러지면서 두고두고 재발견되는 영화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카메라가 인물과 같은 템포로 흔들리고 숨 가쁘게 따라붙으며 인물의 오판·머뭇거림·우연을 그대로 관객의 체험으로 전가합니다.

중반부 자동차 추격 장면은 테오와 줄리안, 막중한 임무를 맡은 인물들 간 대화가 움직이는 차 안에서 펼쳐지고, 그들을 가로막는 폭도에 의해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순간까지 이어집니다. 카메라는 자동차 내부를 훑고 유영하듯 외부로 나가 치솟는 불길까지 그대로 포착합니다. 인물들은 창문을 내리려다 막히고, 서로의 몸이 엉키고, 피해를 입는 지체의 과정을 겪으며 관객 역시 고난의 시간을 감내해야 합니다.

후반부 도심 총격 시퀀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굴뚝 연기, 먼지, 울음과 탄식이 이어지는 길목을 관객은 잘라내지 않은 시간과 함께 통과합니다. 급기야 영화는 한순간 렌즈에 흩뿌려지는 혈흔이 화면에 남아버리는 ‘연출적 실수’까지 살려 “지금-여기”를 더 이상 편집으로 지울 수 없음을 선언합니다. 우리는 그저 관찰자가 아니라 현장 구성원임을 체감합니다. 결국 주인공의 완주는 개인 의지의 승리가 아니라 길을 비켜주는 낯선 이들의 손짓, 잠깐의 정적, 문 하나가 제때 열리는 우연 등 수많은 타이밍에 의존한 결과임을 드러내며 즉시성을 자각하게 합니다.

<1917>, 2019
시간에 끌려가다 마침내 역행하는 이야기

사진 출처: IMDb

<1917>은 그야말로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인 해를 다룹니다. 독일군에 의해 모든 통신망이 파괴된 상황 속에서 영국군 병사 스코필드와 블레이크는 생사를 건 미션을 수행해야 합니다. 적진 깊숙한 곳까지 침투한 아군이 함정에 빠질 위기에 처했기 때문이죠. 영국군 부대의 수장 매켄지 중령에게 에린무어 장군의 공격 중지 명령을 제때 전하지 않으면 블레이크의 형과 1600명의 아군의 목숨이 위태롭습니다. 단 하나의 미션을 위해 전쟁터 한복판을 가로지릅니다.

<칠드런 오브 맨>의 롱테이크에서 더 나아가 처음부터 끝까지 마치 원테이크로 보입니다. 거의 한 번의 진행처럼 서사를 밀어붙이는데요. 기회는 다시 없는, 즉 ‘인생은 실전’이라는 말을 영화적으로 연출하는 극한의 방식에 가깝습니다. 촬영 순서도 최대한 선형적인 흐름을 따랐다고 하는데요. 이는 두 인물의 미션 수행을 시간의 쇠사슬에 완전히 가둡니다. 컷이 끊기지 않으니, 실패의 여지는 주인공의 역량으로만 돌릴 수 없습니다. 세계의 타이밍이 관건이 되죠.

밤하늘의 조명탄이 켜졌다 꺼지는 점멸의 리듬, 무너진 다리를 건너는 때맞춤, 물살에 휩쓸리며 간신히 숨을 고르는 찰나가 인물을 자꾸 덮칩니다. 이야기는 인물의 결단 이전에 환경의 박자에 달려 있습니다. 관객 역시 다음 컷에서 안전해질 권리를 잃고, 달려오는 사건에 그대로 노출됩니다. 이렇듯 견뎌내야만 하는 수동적 사건의 연속을 체험하다 마지막 참호 돌파 장면에서 인파를 가르며 주도적으로 역행하는 운동성을 마주하면 전율이 일게 됩니다. 시간과 우연에 종속될 수밖에 없는 인간이지만 필연을 향한 태도와 힘을 발휘하는 것도 인간임을 보여주는 듯합니다.


사실 두 영화 속 롱테이크에는 트릭이 존재합니다. 두 장면을 이은 자리를 지우는 후속작업이 있었다고 하죠. 엄밀하게는 연속적인 촬영이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굳이 편집의 경계를 지운 영화에는 분명한 메시지가 있습니다. 시간 아래 우리는 모두 유한한 인간이라는 것. 그래서 ‘혼자서 완결하는 주체’라는 환상을 걷어내고 동등해집니다. 누구도 시간을 선점해 독자적으로 결말을 만들 수 없고, 우리는 끝내 서로의 시간을 빌리고 의존하며 살아갑니다.

스크린 밖의 삶이 바로 그렇습니다. 어떤 목적을 달성하고, 위기를 건너며, 회복을 터득하는 다양한 인생 분기점은 타자의 서사(시간)와 우연이 얽혀 완성되곤 합니다. 그러니 어쩌면 의존은, 유한성에 얽매인 우리가 공동의 완주를 가능케 하는 조건이라 여겨집니다. 모두의 하루는 그렇게 서로 연결될 때 더 멀리, 더 단단히 이어진다는 믿음으로 주변을 한 번 둘러보면 어떨까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