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건 대신 '관계'를 진열하는 동네의 공간들

사람과 동네를 잇는 로컬 공간 3곳

물건 대신 '관계'를 진열하는 동네의 공간들

지방으로 여행이나 출장을 떠나면, 꼭 그 지역만의 색채가 짙게 배어 있는 공간을 찾게 됩니다. 간판만 떼어다 서울 한복판에 가져다 놓아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 법한 매끈한 공간 말고, 그 동네 고유의 냄새가 묻어나는 곳 말입니다.

여러 공간을 다녀보면서 느낀 바가 있습니다. 그 '진짜 특색'이라는 건 단순히 그럴싸한 인테리어나 특산품을 진열해 둔 매대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는 것을요. 어떤 공간에 들어섰을 때, 눈에 보이는 것들 너머로 촘촘하게 엮인 사람들의 기운이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주인의 철학이 담긴 매대, 이웃 가게를 소개하는 다정한 안내문, 동네 주민들이 모여 앉은 테이블 같은 것들 말이죠. 공간을 채우고 있는 관계 맺음의 농도야말로 그곳을 대체 불가능하게 만든다는 생각이 듭니다.

도시에서는 목적 없이 타인과 관계 맺는 일이 점점 희귀해지고 있지만, 어떤 로컬 공간들은 그 자체로 거대한 관계망의 일부가 되어 방문객에게 다정한 환대를 건넵니다. 수원, 전주, 익산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지역의 관계를 엮어내고 있는 공간 세 곳을 소개합니다.


이름 보고 들어간 서점에서 만난 다정함

수원 행궁동, '그런 의미에서'

이미지 출처 : 그런의미에서 공식 인스타그램 @2nd_his_meaningshop

수원 행궁동에는 서점이 참 많습니다. 지도 앱에서 검색하면 한 화면에서 열 곳 가까이 나오는 것 같습니다. 그중에서 '그런 의미에서'라는 이름을 보고 발걸음을 멈추었습니다. 서점 이름이 문장의 접속사라니.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뒤에 이어질 것만 같은 이름이 호기심을 끌었어요.

안으로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가장 잘 보이는 매대에 놓인 수원 지역 작가들의 출판물입니다. 서점 주인이 직접 기획하고, 수원의 글 쓰는 사람들이 참여한 정기 간행물이에요. 베스트셀러나 화제의 신간이 아니라 이 동네에서 글을 쓰는 사람들의 작업물이 매대의 가장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이 공간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가 분명하게 느껴졌습니다.

이미지 출처 : 그런의미에서 공식 인스타그램 @2nd_his_meaningshop

'읽는 사람이 쓰는 사람으로'라는 슬로건도 인상적이었어요. 단순히 책을 파는 곳이 아니라, 독자가 창작자가 되는 과정을 잇는 플랫폼의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니까요. 그런 의미에서에는 어른들이 미리 결제해 둔 금액으로 학생들이 책을 사갈 수 있는 제도가 있기도 합니다. 서로 얼굴도 모르는 어른과 청소년이 책 한 권을 사이에 두고 연결되는 거예요. 누가 결제했는지도, 누가 가져갔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 익명의 다정함이 공간 안에 조용히 쌓여 있다는 것이 마음에 오래 남았습니다.


도시의 장면을 수집하는 기록 상점

전주 남문사잇길, '클립어데이'

전주 하면 한옥마을을 떠올리기 쉽지만, 원도심 쪽으로 발을 옮기면 남문사잇길이라 불리는 작은 골목이 나옵니다. 한국전쟁 직후 구호물자가 거래되던 '고물자골목' 일대에 젊은 로컬 브랜드들이 하나둘 자리를 잡으며 붙여진 이름이에요. 이 골목에 '클립어데이'라는 소품샵이 있습니다. 'clip your moments, collect your days.' 이름 그대로 수집가를 위한 기록 상점인데, 진열대 위의 물건들을 들여다보면 단순한 기념품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됩니다. 손수건 하나에는 팔복동 철길 옆에서 5월이면 눈처럼 피어나는 이팝나무 풍경이 담겨 있고, 그 옆에는 이 장면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를 설명하는 짧은 글이 붙어 있어요. 'CLIP MY CITY — 우리가 도시를 기록하는 방법'이라는 프로젝트의 일부입니다. 덕진공원 호수를 가로지르는 오리, 전주천의 버드나무. 전주 사람이라면 고개를 끄덕일 풍경들이 물건의 형태로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특히 'Ring my city'라는 참여형 키링이 마음에 남았어요. 전주천의 물결, 완산동 겹벚꽃, 덕진공원의 오리, 콩나물국밥까지 — 전주의 장소와 기억을 상징하는 조각들 중에서 방문객이 자신의 경험에 맞는 것을 골라 직접 키링을 완성하는 방식입니다. 같은 도시에서도 각자 다른 장면을 수집하게 된다는 것. 그 생각이 참 좋았어요.

그리고 하나 더. 클립어데이를 포함해 남문사잇길의 가게들은 함께 지도를 만들어 모든 매장에 붙여두고 있습니다. 어느 한 가게에 들어가면 이웃 가게를 자연스럽게 소개받게 되는 구조예요. 가게 하나의 힘이 아니라, 이 골목에 모인 사람들이 서로를 연결하며 하나의 관계망을 만들어가고 있었습니다.


미지(未知)에 담긴 전북의 생태계

익산, '미지'

세 번째 공간의 이름은 '미지'입니다. 미지의 세계, 아직 알려지지 않은 것이라는 뜻으로 읽히기도 하지만, 사실 이 이름에는 다른 의미가 숨어 있어요. 'Made In 전북 익산'의 앞글자를 딴 이름입니다. 미지라는 한국어의 뉘앙스와, 이 공간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동시에 담은 이름이에요. 알고 나면 웃음이 나오면서도 고개가 끄덕여지죠.

미지는 전북 지역 기반 로컬 매거진 ‘비마이크’를 만드는 기획자가 연 공간입니다. 전북 지역 창작자들의 기획 상품과 책, 지역 식재료로 만든 음료 등 공간을 채운 모든 요소가 전북의 만드는 사람들과의 관계로 엮여 있습니다. 진열대 위의 물건 하나하나에 "이건 누가 만들었고, 그 사람은 어디에서 어떻게 작업한다"는 이야기가 붙어 있는 셈이에요.

여기에 서가도 흥미롭습니다. 전북에 한정되지 않고, 전국 각지의 로컬 이야기를 담은 책들이 꽂혀 있어요. 단순히 자기 지역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로컬을 고민하는 전국의 사람들과 느슨하게 연대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미지에 들어서면 물건을 사는 것이 아니라 전북이라는 지역의 생태계에 발을 들이는 기분이 듭니다. 그리고 이것이 가능한 건, 이 공간 자체가 매거진이라는 콘텐츠, 그러니까 관계를 기록하는 작업에서 출발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잘 꾸며진 공간은 어디에나 있습니다. 감도 높은 인테리어, 세련된 폰트의 메뉴판, 사진 찍기 좋은 조명. 그런 곳은 서울에도, 어느 동네에도 충분히 많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결국 마음을 내어주고 다시 찾게 되는 곳은 어딘지 생각해보면, 그건 예쁜 공간이 아니라 관계 맺음이 일어나는 공간인 것 같아요.

수원에서는 이름 모를 어른의 다정함이 학생의 책장에 꽂히고, 전주에서는 골목의 가게들이 서로를 소개하며 하나의 지도를 그리고, 익산에서는 지역의 만드는 사람들이 하나의 공간 안에 생태계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누군가의 애정 어린 관계망으로 빽빽하게 채워진 공간에 들어설 때, 우리는 처음 온 이방인임에도 불구하고 어떤 따뜻한 환대를 경험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물건을 사고 공간을 누리는 순간, 우리 역시 그 관계망의 일부가 됩니다.

온라인에서는 취향으로 연결되고, 알고리즘으로 묶이고, 팔로우 한 번으로 관계가 시작됩니다. 편리하지만 그 관계에는 냄새가 없습니다. 공기도, 온도도 없어요. 내가 지금 소개한 공간들이 가진 힘은, 같은 공기 아래에서 같은 물건을 만지고 같은 차를 마시며 생기는 관계의 감각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도시에서 목적 없이 타인과 관계 맺는 일이 점점 희귀해지는 시대입니다. 그래서인지 이런 공간들을 발견할 때면 괜히 안심이 되기도 해요. 아직 이렇게 사람을 잇는 일을 공간의 본질으로 삼고 있는 곳들이 남아 있구나, 하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