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렌스 렉이 상상한 기묘한 발전
중화미래주의를 다룬 미디어아트 연작
미래 도시를 상상하면 어떤 풍경이 먼저 떠오르시나요? 최근에는 중국을 배경으로 한 SF적 상상이 대두되는 듯합니다. 인공지능과의 사랑을 다룬 영화 <그녀(Her)>에 등장하는 미래 도시는 상하이를 배경으로 촬영된 것으로 알려져 있죠. 한자로 쓰인 네온사인, 마천루의 야경, 생활 시스템의 많은 부분이 디지털로 대체된 도시는 익숙한 SF 도시의 풍경입니다.
미디어 아티스트 로렌스 렉(Lawrence Lek)은 ‘중화미래주의’라는 개념을 통해 이 현상을 포착하는데요. 서양-발전, 동양-전통이라는 오래된 이분법을 해체하며, 중국을 배경으로 한 기술지향적 미래 세계를 그리죠. 동시에 이는 단지 미래에 대한 상상으로만 남지 않습니다. AI 기술 발전을 가속화하고 있는 중국에서 ‘이미 현실화된 SF’이기도 하죠. 로렌스 렉의 작품은 중국의 문화적 색채와 기술적 상상을 더한 오묘한 풍경 속에서 ‘발전’을 둘러싼 보다 복잡한 논쟁을 드러냅니다.
중국 디아스포라 작가의 가상 공간

로렌스 렉은 건축, 게임, 영상, 음악, 픽션을 넘나드는 예술가로 자신을 소개합니다. 게임엔진을 사용한 CGI 애니메이션, 가상현실을 다룬 시뮬레이션 작품을 주로 제작하는데요. 디지털 기술이란 로렌스 렉이 작품을 만들어내는 중요한 수단이자, 탐구 대상이기도 합니다. 특히 기술 그 자체를 넘어서 사회적 격변 속에서 어떻게 ‘기술적 미신’이 다루어지는지 관찰하는 데 관심을 갖죠.
대학에서 건축을 전공했던 그의 관심은 미디어아트 속에서 구체적인 공간과 장소성으로 드러납니다. 가상의 공간을 섬세하게 설계하고 디지털 기반의 상상을 풀어내는데요. 로렌스 렉의 정교한 시뮬레이션은 구체적인 도시와 건축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상하이 거리, 싱가포르 카지노, 말레이시아 정글처럼 실재하는 풍경에서 출발합니다.
독일에서 태어나 런던을 중심으로 활동하지만, 그의 정체성에는 중국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말레이시아계 중국인 부모에게서 태어나 홍콩, 방콕, 싱가포르를 오가며 자랐죠. 그가 바라보는 중국은 본토에서 나고 자란 사람의 시선과 다릅니다. 자신의 복잡한 이주 경험을 ‘중국 디아스포라’로 명명한 작가에게 중국이란 완전한 내부도 외부도 아닌 공간입니다. 어디에도 완전히 속하지 않는 이 위치는 로렌스 렉만의 비판적 거리감과 관찰자적 시선을 형성합니다.
중화미래주의: 기술과 사회는 어떻게 만날까?

기술, 도시, 건축, 중국, 경계···. 이러한 로렌스 렉의 관심사에서 태어난 키워드는 바로 ‘중화미래주의’입니다. 렉이 2016년 비디오 에세이 <중화미래주의 1839-2046 AD>를 통해 대중화한 이 개념은 이후로도 그의 작품을 관통하는 세계관으로 작동합니다.
‘중화미래주의(Sinofuturism)’란, 중국의 지정학적 위치와 급속한 기술 발전을 중심으로 미래를 상상하는 개념입니다. 로렌스 렉은 중국의 권위주의적 자본주의, 감시와 통제 시스템이 AI 기술과 결합했을 때 벌어질 미래 사회를 그려냅니다.
일본의 미디어문화 교수 미즈시마 카즈노리는 ‘중화미래주의’를 이렇게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서구 사회가 내세우던 인권 등의 민주주의적 원칙은 (…) 기술 혁신과 생산성 향상을 가로막는 ‘방해자’가 되어 버렸다. 오히려, 사람들의 권리를 제한한 권위주의적 자본주의를 통해서 크게 발전하고 있는 중국과 싱가포르(중화)에 ‘미래’가 있지 않을까?
요컨대 중국의 권위적인 통제와 감시 시스템이 AI를 비롯해 기술 발전을 더욱 가속화한다는 것인데요. 개인정보보호나 인권에 대한 윤리적 제동이 없는 환경에서 기술의 속도는 더 빨라질 수밖에 없겠죠. 서구 민주주의의 토대에서 기술 발전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고정관념과 달리, 중국으로부터 등장하는 새로운 정치, 사회, 문화적 관점과 기술 발전의 미래상이 독특한 충격을 줍니다.


앞서 언급한 영화 <그녀>에서처럼, 아시아를 배경으로 한 SF적 이미지는 우리에게 이미 익숙합니다. ‘사이버펑크’ 이미지의 원형과도 같은 영화 <블레이드 러너>는 홍콩과 일본을 배경으로 삼고, 마블의 <블랙 팬서>와 <어벤져스2>에서는 각각 부산과 서울에서 촬영을 진행했죠.
이러한 작품과 달리 로렌스 렉의 중화미래주의 연작이 갖는 차별점은 단순히 아시아의 이미지만을 낭만적으로 차용한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렉의 작품 속 도시는 중국 사회의 감시 시스템, 자동화된 노동, 데이터 중심 통제가 구체적으로 작동하는 공간입니다. 중국풍의 외관만이 아닌, 사회 시스템과 기술이 연결되는 방식을 복합적으로 드러냅니다.
우리는 인간인가?
<중화미래주의 1839-2046 AD>
60분짜리 비디오 에세이 <중화미래주의 1839-2046 AD>는 로렌스 렉의 중화미래주의 세계관 연작의 출발점이 되는 작품입니다. 실제 중국 도시의 영상과 CGI, 합성 음성 나레이션을 편집해 제작했어요.
작품은 두 개의 극단적 이미지 사이에 있습니다. 서구에서 바라본 동양풍의 디지털 디스토피아와 중국이 스스로 펼쳐내는 기술 유토피아. 두 극단 사이를 달리며 로렌스 렉은 중화미래주의적 상상을 끝까지 밀어붙입니다.
그 중심에는 중국에 대한 7가지의 고정관념이 있습니다. 이는 그대로 수용되거나 반박되는 대신 새로운 상상으로 다시 태어납니다. “중국이 이미 하나의 인공지능이라면?”


컴퓨팅, 복제, 게임, 학습, 중독, 노동, 도박. 중국 사회를 바라보는 7가지의 고정관념은 마치 인공지능의 특징과도 유사합니다. 쉬지 않고 끊임없이 작동하며, 감정도 윤리적 문제도 배제됩니다. 학습은 암기 위주로 이루어지고, 공장의 노동자들은 기계의 일부처럼 보여지죠. 영상 속의 인간은 개인이 아닌 집단적 시스템의 일부로 등장하며, 마치 데이터 묶음처럼 다뤄집니다.
저는 미디어에서 AI를 묘사하는 방식이 중국 산업화를 묘사하는 방식과 동일하다는 걸 느꼈습니다.
- 로렌스 렉
로렌스 렉은 중국을 바라보는 서구적 시선이 마치 AI에 대한 시선과도 유사하다고 보았는데요. 창의성이 부재한 집단적 생산, 뛰어난 복제와 계산 능력에 대한 인식이 그렇습니다. 더 나아가 렉은 중국과 AI를 바라보는 막연한 두려움과 타자화의 시선까지 포착합니다.
중국을 거대한 인공지능으로 바라보는 렉의 사고실험은 어느 한쪽으로도 치우친 결론을 내놓지 않습니다. 대신 기술과 결합된 사회의 근미래적 풍경을 통해 인간성에 대한 질문을 던집니다. “인간과 AI를 정의하는 조건은 무엇일까?”, “우리는 인간인가? 혹은 이미 AI인 것은 아닐까?”
정글의 네온 불빛 아래에서 노래하기
<아이돌(AIDOL)>
예술과 창작을 주제로 한 SF 영화 <아이돌(AIDOL)>은 2065년의 말레이시아를 배경으로 펼쳐집니다. 작품의 주인공 디바는 잊혀져 가는 슈퍼스타로, e-스포츠 결승전의 공연을 위해 AI 작곡가와 손을 잡습니다. AI가 단순 모방과 생산을 넘어선 ‘창작의 의지’를 가지게 될 때 벌어질 일은 무엇일지 픽션을 통해 질문하는 작품입니다.
디바와 협업하는 AI ‘지오’의 이야기는 2017년 작품 <지오맨서(Geomancer)>에서 먼저 다루어졌는데요. 렉의 중화미래주의 연작은 <지오맨서>를 거쳐 <아이돌>로 마무리됩니다.
창의적인 예술가를 꿈꾸는 AI와 흥행을 꿈꾸는 인간의 협업은 모순적으로 느껴집니다. 그런 한편, 지금도 주변에서 이미 벌어지고 있는 현상이기도 하죠. 로렌스 렉은 실제로 AI 생성 음악에 큰 관심을 가졌는데요. 인간의 음악과 AI의 음악은 어떻게 다른지, AI와의 협업은 어떻게 이루어질지 심도 있게 질문하는 과정이 작품에도 녹아 있습니다.

흥미로운 건 작품의 모든 사운드트랙을 로렌스 렉이 직접 작곡했다는 점인데요. AI 음악을 다룬 영화인데, 그 사운드트랙은 인간이 만들었다는 모순이 작품 해석을 더 다채롭게 만듭니다.
작품의 세계관은 인간(바이오)과 AI(신스)의 대립 속에서 구축되지만, 전달하는 메시지는 두 세계의 구분을 뛰어넘습니다. 로렌스 렉은 AI의 등장과 함께 변화하고 있는 예술과 창작, 창의성의 개념을 되짚습니다. 자유로운 창작을 꿈꾸는 인공지능 지오와, 대기업 알고리즘 시스템에 종속된 채 흥행을 꿈꾸는 인간 디바 중 어떤 쪽이 더 인간적일까요? 인간성에 대한 로렌스 렉의 질문은 한 방향으로만 흐르지 않습니다.



작품의 배경이 되는 도시 역시 주목할 만합니다. 불안정한 기후의 미래 말레이시아인데요. 게임 속 풍경 같지만 실제 도시의 콜라주로 제작되었습니다. 반식민주의 운동의 역사를 지닌 말레이시아의 ‘정글’을 배경으로, 쿠알라룸푸르의 카지노 리조트, 싱가포르의 마리나 베이 샌즈 등 실존하는 건물이 등장하죠. 말레이시아, 홍콩, 싱가포르 등 여러 도시의 실재하는 역사적 레이어가 가상 공간에 축적되어 있습니다.
여러 중화권 도시의 건축물이 조합된 가상 공간은 로렌스 렉의 독특한 시공간성 인식을 잘 보여줍니다. 렉은 “가상 건축”이 “가봤던 장소나 경험했던 장소에 대한 기억을 담는 방식”이라고 설명합니다. 그에게 작품 속 도시의 풍경은 단순한 이미지가 아닌, 한 문화권의 기억과 관념을 전달하는 매체입니다.

기술이 그 자체로 중립적으로 존재한다는 전제는 환상일지 모릅니다. 정치 체제와 사회문화적 토양이 그 방향과 속도를 결정하니까요. 서구 민주주의의 윤리적 제동과 중국 권위주의의 무제한 가속, 로렌스 렉은 그 간극을 자세히 들여다봅니다.
중화미래주의는 이미 존재하는 SF다
- <중화미래주의 1839-2046 AD>
서양과 동양, 발전과 보존, 인간과 AI, 창작과 모방,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 수많은 이분법적 논쟁 속에서 로렌스 렉은 한쪽을 편드는 대신, 혼합된 세계관을 구축하고 질문을 던집니다. SF의 방식을 사용하고 있지만, 이는 단순한 유희적 공상이 아닙니다.
도나 해러웨이(Donna Haraway)는 ‘SF’를 공상 과학(Science Fiction)을 넘어 과거-현재-미래를 함께 엮는 실뜨기(String Figures)로 정의한 바 있습니다. 로렌스 렉의 작품 역시 가능한 미래를 엮어 나가는 사고실험의 과정에 있습니다. 현실에 기반한 가상 공간 속에서 로렌스 렉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우리가 정말로 원하는 발전은 무엇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