닿을 수 없기에 타오르는 팬덤의 열기
케이팝을 작동시키는 감정의 메커니즘

“아이돌이 밥 먹여주는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좋아해?”
아이돌을 좋아해 본 사람이라면 한 번쯤 들어봤을 법한 말입니다. 그때는 그냥 웃어넘겼지만, 돌아보면 이 질문이 마음속에 오래 남았습니다.
우리는 왜, 그리고 어떻게 한 번도 만나 본 적 없는 누군가에게 열광하고, 온 마음을 다해 좋아하고 또 좋아할 수 있을까요? 곰곰이 생각해 보면, ‘덕질’은 단순히 어떤 가수나 배우, 춤이나 음악 자체를 좋아하는 행위라기보다 그 대상을 좋아하는 나 자신과, 그 감정을 함께 나누고 연결되는 경험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이런 감정은 반드시 눈앞에 실체가 있어야만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대상이 부재하거나 손이 닿을 수 없을 때 더 뜨거워지는 경우가 많죠.
중국의 작가 리 슈앙(Li Shuang) 은 밴드 ‘마이 케미컬 로맨스(My Chemical Romance)’의 팬으로서의 경험을 토대로, 팬덤의 감정을 회화·영상·조각 등 다양한 매체로 시각화합니다. 그녀의 작업은 팬이 된다는 감정이 단순히 “좋아하는 대상이 눈앞에 있기 때문”이 아니라, 상상하고 연결하며 관계를 조직하는 감정의 구조임을 보여줍니다. 이번 아티클에서는 리 슈앙의 작품을 통해 팬덤의 감정이 어떻게 구조화되고, 그것이 어떻게 뜨거운 열기로 이어지는지를 탐구해 봅니다.
공연 직전의 가장 뜨거운 찰나
콘서트가 시작되기 전, 텅 빈 무대 앞에 가득한 팬들은 모두 응원봉을 들고 상기된 얼굴로 곧 시작할 공연을 기다립니다. 공연이 머지않았음을 알리는 전광판 영상만으로도 팬들은 이미 마음속으로 무대를 그리고, 마치 실제 대상을 본 것처럼 들뜹니다. 잠시 후, 정전과 함께 공연장은 거대한 함성으로 뒤덮입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암흑 속에서 마치 나의 아이돌이 등장한 것 같은 폭발적인 열기가 만들어집니다.

이 순간의 열기는 단순히 공연을 즐기는 기쁨을 넘어섭니다. 수개월간 기다려 온 찰나를 앞두고, 텅 빈 무대 앞에서 부재와 결핍으로 인해 고조되는 벅찬 감정이 오히려 열기를 극대화시키죠. 오랫동안 꿈꿔 온 장면을 머릿속으로 그리며 처음 보는 사람들과 공유하는 기다림은, 부재 속에서도 감정을 응축시키는 압도적인 힘을 발휘합니다.

리 슈앙의 작품 〈Heart is a Broken Record〉(2023) 은 이러한 기다림의 감정을 시각화합니다. 하트 모양의 분수 바닥에 투사된 영상은, 20년간 팬들이 올린 유튜브 콘서트 영상 중 공연 직전 암흑 속 함성만을 반복해서 보여줍니다. 간헐적인 불빛과 피·용암을 연상시키는 그로테스크한 이미지가 뒤엉키면서 결핍과 기대, 열기가 만들어내는 복합적인 감정을 관객에게 환기시키죠. 수만 명의 서로 모르는 사람들이 한 공간에 모여 나누는 열기는 한겨울에도 땀이 날 정도로 뜨겁고, 어쩔 수 없이 몸을 밀착해야 하는 데서 오는 불쾌감과 대상의 부재가 채워지려는 찰나의 카타르시스가 뒤섞입니다. 작품의 이미지처럼, 열기는 대상에 도달할 때가 아니라 연장된 대기, 즉 무(無)의 상태에서 가장 뜨겁게 타오릅니다.
‘포카’에 투영된 팬덤의 컬트적 열기
공연장 밖의 팬덤 문화에는 다양한 상징과 의례가 존재합니다. 콘서트, 생일 카페, 챌린지, 손민수 등 수많은 팬 활동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것은 단연 굿즈입니다. 손바닥만 한 포토카드 한 장을 얻기 위해 수만 원, 때로는 수십만 원을 기꺼이 투자합니다. 그렇게 손에 넣은 포토카드는 단순한 사진을 넘어 아이돌의 분신처럼 기능합니다. 팬들은 이 작은 사각형을 들고 음식과 함께 일명 '예절샷'을 찍거나, 포토북에 끼워 신줏단지처럼 소중히 보관합니다. 공장에서 대량으로 찍혀 나온 사진일 뿐인데도, 그 안에는 나만의 감정과 열정이 고스란히 담기며 ‘나의 최애를 가진다’는 특별한 감각을 부여합니다.


이미지 출처: 에디터 본인 제공
흥미로운 점은 이 감정이 종종 실제 대상보다 굿즈의 이미지, 또 굿즈가 내포한 상징에 더 강하게 반응한다는 것입니다. 실체 없는 대상일수록 감정은 오히려 더 쉽게 상상 속에서 증폭됩니다. 굿즈는 단순한 상품을 넘어 팬덤의 정체성과 소속감을 시각화하는 감정의 매개체이자, 부재를 대신 채우는 상징적 분신으로 작동하죠. 이러한 행위는 반복적 구매, 인증, 소유의 과정을 통해 일종의 의례처럼 이어지며 팬덤만의 컬트적 면모를 강화합니다. 실제 아이돌과의 거리가 멀어도, 굿즈를 통해 형성된 감정의 연결은 결핍을 채우고 열기를 유지하는 장치가 되는 겁니다.


좌: Li Shuang, Heart is a Broken Record, 2023 , 우: Li Shuang, All the letters I’ve ever written, 2023 이미지 출처: Peres Projects
팬 아트를 떠올리게 하는 다양한 일상적 물건들이 레진 주조 벽면 회화 작품 속에 동결되어 있습니다. 작가는 팝 펑크 문화와 팬덤 오브제들을 곰팡이 핀 돌연변이처럼 그로테스크하게 왜곡해 표현합니다. 리 슈앙의 작품에 등장하는 추상적 조각과 오브제들도 실존하지 않는 대상을 상징하며, 팬들은 여기에 감정을 투사하고 의미를 부여하며 존재하지 않는 대상을 실재처럼 느낍니다. 이는 굿즈의 메커니즘을 은유하죠. 실제 대상보다 상징에 대한 열광이 더 크다는 점에서, 팬덤은 실체 없는 ‘대상’을 스스로 창조하고 그 안에서 열기를 나누는 독특한 구조를 보여줍니다.
더 애틋한 화면 속 최애
이처럼 팬덤의 열기는 직접적이고 물리적 접촉에서만 발생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닿을 수 없음과 거리감이 감정을 더욱 뜨겁게 만들죠. 코로나19 이후 팬 사인회는 비대면 영상 통화로 대체되며 ‘영통 팬싸’라는 새로운 문화가 자리 잡았습니다. 과거의 대면 팬사인회에서는 같은 공간에서 최애를 바라보고, 사인을 받으며 긴 여운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2분 남짓한 화면 속 대화와 택배로 받은 앨범이 전부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물리적 거리는 감정을 더 애틋하고 절박하게 만듭니다. 화면 너머로만 이어지는 2분의 시간은 기다림과 설렘으로 과장되고, 팬덤은 그 순간을 위해 수십, 수백 장의 앨범을 구매합니다. 닿지 못함이 곧 감정의 증폭 장치가 되는 것이죠. 팬덤의 서사는 이 ‘부재’와 ‘거리’에서 만들어지는 애틋함과 기다림으로 더욱 강화됩니다. 즉, 팬덤의 열기는 실재하는 접촉보다 상상된 관계와 감정적 밀착에서 비롯되며, 거리가 멀수록 그 강도는 오히려 높아집니다. 닿을 수 없는 관계 속에서 만들어진 이 감정적 에너지가 팬덤을 지속시키는 힘이자, 열기를 증폭시키는 원동력인 셈입니다.

리 슈앙은 이러한 감정 구조를 퍼포먼스로 재현합니다. 작가는 현장에 직접 가지 않고, 20명의 대역을 섭외해 자신을 아바타처럼 연기하게 합니다. 이 퍼포먼스는 작가의 부재와 물리적 거리, 그리고 그것을 대신 채우는 감정적 친밀감의 생성 과정을 탐구합니다. 물리적 존재 없이도 감정이 형성되고 공유될 수 있음을 실험하는 것입니다. 마치 K-POP 팬덤의 ‘영통 팬싸’처럼, 직접 만날 수 없기에 오히려 더 뜨거워지는 감정의 구조를 보여줍니다. 영상 통화라는 간접적인 조우가 오히려 우상에 대한 환상을 깨지 않고도 가까이 닿고 싶은 욕망을 충족시켜 줄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방법이기도 합니다. 최애가 나와의 통화에 성실히 임해 주기만 한다면 말이죠.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전례 없는 열풍은 단순히 콘텐츠의 완성도만으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표면적인 아시아 이미지를 소비하던 기존의 동양 배경 작품들과 달리, 이 작품은 실제 한국의 현실과 풍경을 섬세하게 담아냈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이유는, ‘팬덤’이 만들어내는 벅차고 황홀한 감정을 모두가 동시에 공유할 수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팬덤의 핵심은 바로 이런 집단적 열기에서 드러납니다. 나의 아이돌은 내 삶 깊숙이 스며들어 있으면서도 동시에 손에 닿지 않는 가장 먼 존재입니다. ‘덕계못(덕후는 계를 못 탄다)’이라는 말처럼, 우리와 그들 사이에는 결코 넘을 수 없는 거리감이 존재합니다. 이 실현될 수 없는 열망과 결핍이야말로 팬덤을 작동시키는 가장 상징적인 메커니즘이죠. 그리고 이러한 감정은 비단 한국인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전 세계가 공통적으로 공유할 수 있기에 지금의 엔터테인먼트 시장이 가능해졌습니다.
결국 팬덤, 나아가 케이팝 산업을 움직이는 힘은 현실에는 부재하지만 가상의 세계에서만 존재하는 듯한 최애를 향한 애틋함과 열망, 그리고 그것을 함께 나누며 형성되는 감정 공동체입니다. 국적이나 문화가 달라도 이 감정의 톱니바퀴가 맞물리는 순간, 전 세계의 팬들은 하나가 됩니다. 그들이 만들어내는 열기는 끊임없이 이어지며, 닿을 수 없기에 더 강렬하게 타오릅니다.
여러분도 누군가의 ‘헌터스(HUNTERS)’였던 적이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