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머무는 것만으로 충분한 공간
복잡한 일상을 내려놓게 하는 정원 세 곳
우리의 일상은 스마트폰 알림이 끊임없이 울리고 해야 할 일 목록과 약속까지 쌓이면서 좀처럼 쉬어갈 틈을 찾기 어렵습니다. 이렇게 사람들과의 관계와 반복되는 루틴으로 꽉 찬 일상이 계속되다 보면 어느 순간부터는 무엇부터 정리하고 풀어가야 할지 막막하게 느껴지곤 합니다.
그렇게 답답한 마음을 잠시라도 덜어내기 위해 우리는 흔히 공원을 찾게 됩니다. 공원에는 조깅하는 사람도 있고, 강아지를 산책시키는 사람도 있으며, 친구를 만나 담소를 나누는 사람도 있습니다. 여전히 목적이 있고 사람이 있고 움직임이 있는 곳입니다.
반면, 정원은 조금 다릅니다. 걷고 앉고 바라보는 행위 자체가 목적이 되는 곳입니다. 누군가 정성껏 가꾼 풍경을 바라보다 보면 자연스럽게 발걸음이 느려지고 마음도 한결 가라앉습니다.
복잡한 관계와 빡빡한 일상에서 숨이 가쁘게 느껴지는 날, 고요한 풍경 속을 천천히 거닐며 마음의 여유를 되찾기에 더없이 좋은 정원 세 곳을 소개합니다.
비워둠으로써 완성되는 정원, 희원

희원은 호암미술관의 개관 15주년을 기념해 조경가 정영선이 설계한 정원으로, 오늘날에는 보기 드문 한국 전통 정원의 형식을 온전히 구현한 곳입니다. 안으로 들어서면 작고 한적한 공간감이 느껴지는데, 이는 희원을 설계할 때 비움을 의도했기 때문입니다. 희원은 차경(借景)의 기법을 활용하여 정원을 인공 조형물로 빼곡히 채우기보다 여백을 두고 시선을 자연스럽게 담장 너머 풍경으로 흘러가도록 했습니다.

그래서 희원을 거닐다 보면 시선이 단순히 정원 내부를 훑는 데서 그치지 않고 정원 너머로 이어지는 주변 풍경에 머물게 됩니다. 이러한 점 덕분에 정원의 경계가 인위적으로 닫혀 있지 않고 주변의 자연을 향해 열리는 듯한 개방감이 느껴집니다. 호암미술관의 전시 관람을 마친 뒤 가벼운 산책을 하며 둘러보기에도 좋고, 전시가 남긴 여운을 조용한 풍경 속에서 천천히 가라앉힐 수 있는 곳입니다.
생각이 옅어지는 속도로 걷는 정원, 사유원

이름 그대로 생각하는 정원을 지향하는 이 공간은, 들어서는 순간부터 일상의 번잡함을 자연스럽게 내려놓게 하는 독특한 구조로 설계되어 있습니다. 약 70만 제곱미터에 이르는 넓은 부지는 숫자만으로 쉽게 실감하기 어렵지만, '마음을 비워 고요함에 이른다'라는 뜻의 치허문(致虛門)을 지나면 바깥과 분리된 드넓은 공간이 펼쳐집니다. 이어지는 여러 갈래의 산책로를 따라 천천히 걷다 보면 끝이 보이지 않는 조용한 경관 속에서 마음속에 가득하던 생각과 근심이 한층 옅어지며 마치 명상에 잠긴 듯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또한 이곳의 조경을 만든 정영선과 건축가 승효상, 알바루 시자 등 여러 인사가 각자의 방식으로 공간을 구성했으며, 산자락을 따라 자리한 크고 작은 건축물들은 저마다 다른 분위기로 방문객의 발걸음을 조용히 붙들어 둡니다. 사유원을 서둘러 둘러보려 하면 오히려 숨이 차고 풍경이 제대로 눈에 들어오지 않기 쉽습니다. 오르막을 천천히 걸으며 잠시 멈춰 앉아 숨을 고른 뒤 다시 걷는 과정이야말로 이 정원을 가장 깊게 즐기는 방법입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정원, 명옥헌 원림

번잡한 세상의 일을 잊고 자연 속에 온전히 스며들고자 했던 조선 중기 학자 오희도의 철학이 고스란히 배어 있는 이곳은, 그가 '세속을 잊는 집'이라는 뜻의 망재(忘齋)라 이름 붙인 처소에 머물며 지극정성으로 가꾼 소박하면서도 깊이 있는 원림입니다. 정원 안에는 인공 석재를 거의 쓰지 않고 자연 그대로의 지형을 살려 조성한 두 연못과 수령이 100년에서 300년에 이르는 배롱나무들이 어우러져 있습니다. 전체 구조도 정자 마루에 앉아 물소리를 들을 수 있을 만큼 아담하고 소박합니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단순함이야말로 이곳에 오래 머물게 하는 가장 큰 힘이 됩니다. 볼거리가 많지 않은 대신 정자 위에서 물소리를 듣고 배롱나무가 드리운 그늘에 조용히 앉아 있는 것 외에는 특별히 할 일이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매년 여름 배롱나무가 분홍빛 꽃을 활짝 피우는 시기에 특히 많은 이들이 찾지만, 어느 계절에 와도 이 정원이 선사하는 고요함은 크게 달라지지 않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이 유난히 필요한 날에 더욱 잘 어울리는 정원입니다.
촘촘하게 짜인 일상의 결 사이에서 잠시 벗어나는 것을 두려워하거나 그럴만한 마음의 여유조차 없다고 느껴지는 순간들이 종종 찾아오곤 합니다. 하지만 진정으로 비워낸다는 것은 단순히 자리를 떠나는 행위가 아니라, 본연의 모습으로 다시금 돌아가기 위해 내면을 가다듬는 준비 과정에 가깝습니다. 실제로 정원에서 한두 시간 정도 보내고 나면 그전까지 숨이 막힐 듯 빽빽하게만 느껴졌던 복잡한 문제들이 이전과는 조금 다른 시선으로 보이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러니 사람 관계든 쌓인 일이든 혹은 나 자신이든 숨 가쁜 긴장감 속에 갇혀 어쩔 줄 모르고 있다면, 잠시 한 발 물러나 정원이 주는 고요한 여백을 즐겨보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