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 피아니스트의 첫 번째 앨범 3선
피아니스트 조성진, 임윤찬, 백건우가 만난 초심
지난 10월, 세계 3대 콩쿠르 중 하나인 ‘쇼팽 국제 피아노 콩쿠르’가 열렸습니다. 필자도 라이브 스트리밍으로 여러 연주자들의 무대를 감상했는데요. 한국인 연주자가 등장할 때면 더욱 응원하는 마음으로 지켜보곤 했죠. 아마 모든 연주자들은 이 무대를 위해 수 만 시간 넘게 연습하고, 적어도 수 십 번의 연습 무대를 가져왔을 겁니다. 그럼에도 땀 흘리며 연주하는 모습은 처음 연주하는 것처럼 매 순간에 집중력이 느껴졌습니다.
“나는 이제 막 태어난 사람이구나. 앞으로 가야 될 길도 멀고.”
10년 전, 같은 콩쿠르에 나왔던 피아니스트 조성진은 우승 이후 이렇게 생각했다고 해요. 자신만의 음악 세계를 증명하며 우승했음에도, 결말이 아닌 새로운 시작을 바라봤던 거죠. 이처럼 연주자에게 초심은 ‘계속 해야 하는 과정’인 것입니다. 이번 아티클에서는 피아니스트 조성진, 임윤찬, 백건우의 첫 번째 앨범을 소개합니다. 이들의 첫 번째 앨범에는 각자 다른 상황과 감정 속에 발매되며 다양한 의미로 초심을 마주합니다.
피아니스트 조성진
역사적인 첫 행보

‘젊은 거장, 피아노의 왕자, 쇼팽(Chopin) 가문의 조(Cho)성진’ 등 수많은 수식어를 가진 피아니스트 조성진. 사실 쇼팽 콩쿠르 이전에도 이미 유명한 완성형 피아니스트였습니다. 10대 부터 국제 콩쿠르 우승과 수많은 세계 무대에서 실력을 인정 받을 정도였으니까요. 그는 쇼팽 콩쿠르 우승 이후 “다시는 콩쿠르에 나가지 않아도 돼서 기쁘다”고 말했을 만큼 무거운 부담을 느꼈다고 합니다.
이렇게 우승한 이후 첫 정규 앨범을 발매했습니다. 쇼팽 콩쿠르 무대에서도 선보였던 피아노 협주곡 1번 4개의 발라드가 담겨 있는데요. 역대 쇼팽 콩쿠르 우승자들과 같은 행보를 이어가며 역사적으로도 많은 의미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런던에서 녹음한 장소는 애비 로드 스튜디오로 비틀스, 전설적인 지휘자 카라얀 등이 녹음했던 공간이었죠.
클래식 연주에서 흥미로운 점은 연주자마다 해석이 다르고, 같은 연주자라도 무대마다 해석이 다르다는 점인데요. 조성진의 첫 번째 앨범에서도 그런 매력을 느낄 수 있습니다. 같은 곡임에도 쇼팽 콩쿠르 무대와 앨범에서 보여주는 디테일한 차이를 들을 수 있습니다. 어떤 것이 더 좋은 연주인지 평가할 수는 없지만, 미묘한 변화와 감정을 느껴보는 재미도 있습니다.
피아니스트 임윤찬,
3관왕을 수상한 데뷔 앨범

피아니스트 임윤찬은 “저는 평범한 사람으로 매일 매일 연습하면서 진실하게 사는 게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스스로 겸손하게 소개하지만, 그의 첫 번째 앨범은 비범한 결과를 보여줬는데요. 앨범 발매와 동시에 BBC 뮤직 매거진 어워드 3관왕, 프랑스 디아파종 황금상 등 해외 주요상을 수상했습니다. 대중들에게 강렬한 인상과 존재감을 보여준 시작이었죠.
그는 2022년 반 클라이번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서 우승하며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는데요. 당시 역대 최연소 우승을 하면서 클래식 명문 레이블인 데카(Decca)와 레코딩 전속 계약을 맺어 첫 앨범을 발매했습니다. 앨범에는 쇼팽의 에튀드 전곡이 담겨 있습니다. 높은 기술적 난이도와 풍부한 음악성을 요구하는 곡으로, 피아노 연주자 (혹은 전공생)들에게는 꼭 거쳐가는 필수 곡이기도 하죠. 그도 어린 시절부터 오랜 시간 이 곡을 연습해왔다고 해요. 그렇기에 “이 나이에, 이 산을 넘고 싶다는 의지를 담았다”고 소감을 밝혔습니다.
임윤찬에게 초심을 말하자면 ‘끈기’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첫 앨범을 녹음하면서도 한 곡의 첫 두 마디를 연주하는 데만 7시간 넘게 연습했다고 말했는데요. 이런 끈기와 진실함이 첫 번째 앨범에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7시간 넘게 걸렸다는 부분을 듣고 싶다면, 아래 영상의 첫 두 마디(9초)에 집중해보세요.
피아니스트 백건우
백발의 순수함

앞서 소개한 ‘젊은 거장’ 연주자들과 달리, 피아니스트 백건우는 오랜 음악 인생을 살아온 거장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78세의 백건우는 자신에게 첫 번째 모차르트 앨범을 발표했습니다. 68년 연주 인생 동안 처음 녹음한 모차르트 작품 음반이었죠. 이전에 많은 앨범과 무대를 거쳐왔기에 ‘첫 번째’라는 수식어가 오히려 무게감 있게 느껴집니다.
이번 앨범은 또 다른 의미로 초심을 담고 있습니다. 그는 “모차르트로 시작한 그때로 다시 돌아온 기분”이라고 말했는데요. 음악을 처음 시작했을 때처럼 순수한 마음이 담겨 있다는 것이죠. 노년의 거장이 발매한 앨범에 ‘순수함’이 담겨있다는 점이 인상적입니다. 또한 아내 윤정희와 사별 이후 발표한 첫 앨범이기도 합니다. 두 사람은 오페라 공연장에서 처음 만나, 45년 넘게 결혼 생활을 이어가며 서로에 대한 깊은 사랑과 존경을 보여왔는데요. 아내와 함께 공연을 다니며 삶을 나눈 긴 세월을 뒤로 하고, 오롯이 음악에 집중하며 보낸 시간. 단순하고 순수한 멜로디를 들으면서도 복합적인 표정을 짓게 됩니다.
음악가들 사이에서 모차르트 곡은 ‘듣기엔 쉽지만 직접 연주하기엔 어려운 곡’이라고 불리곤 합니다. 백건우도 “(그렇게 말하는) 모차르트 음악의 깊이를 이제야 이해하게 됐다”고 말했습니다. 백건우의 모차르트 연주를 들으면 ‘이제는 양보할 줄 알게 된 어린아이’를 보는 기분이 듭니다. 백건우 피아니스트의 지나온 삶이 어렴풋이 그려지기 때문일까요.
클래식 연주자들에게 첫 앨범은 우승 직후의 결과물이자, 세계 무대로의 첫 시작이자, 역사적인 첫 행보가 될 수 있습니다. 혹은 힘든 시간을 지나 다시 음악에 집중할 용기일 수도 있죠. 피아니스트 조성진, 임윤찬, 백건우. 이들이 발표한 첫 번째 앨범은 각자의 음악 인생에서 새로운 시작을 열어준 순간인데요. 시작을 마주한 상황과 감정은 다르지만 음악 앞에 겸손한 마음, 그 순수함 만큼은 같았습니다. 이들에게 ‘초심’은 돌아가거나 되찾는 순간이기보다는 시간과 경험이 쌓여도 계속 진행되는 태도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