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 발레계 트렌드 K-발레리노 르네상스

세계인의 시선을 붙잡은 새 얼굴 박윤재·전민철

클래식 발레계 트렌드 K-발레리노 르네상스

섬세한 선과 점프, 독무의 테크닉과 군무의 웅장함, 고전적인 음악과 무용수가 뿜어내는 생생한 역동성이 한 무대에 공존하는 것이 발레의 매력입니다. 클래식 발레는 미의 형식을 철저히 따라야하는 엄격함을 요구하기에, 그 완벽에 닿기 위한 인간의 몸짓이 경외감까지 불러일으킵니다. 그간 국내 관객에게 발레는 <백조의 호수>, 우아한 클래식 튀튀(옆으로 빳빳하게 퍼진 모양의 치마 의상) 혹은 여성 무용수를 먼저 떠올리게 했지만, 2025년 들어 흐름이 바뀌고 있습니다. 지난해 엠넷 서바이벌 프로그램 <스테이지 파이터>가 남성 무용수들의 아름다움과 폭발적인 힘을 대중적으로 전하며 화제를 모았고, 올해 국제 무대에서는 더 뜨거운 기록들이 터졌죠. 스위스 로잔발레콩쿠르(Prix de Lausanne) 2025에서 16세 박윤재가 한국 남성 최초 그랑프리를 거머쥐었고, 21세 전민철은 러시아 마린스키 극장에 솔리스트로 입단해 데뷔했습니다. 이런 소식은 “한국 발레는 여성 중심”이라는 고정관념을 단숨에 무너뜨리며 세계 클래식 강국 지도를 새로 그려 넣고 있습니다.

두 개의 도약

하나의 흐름

로잔 발레 콩쿠르 판도를 바꾼 박윤재

스위스 로잔발레콩쿠르 2025 클래식 파이널 무대, 동영상 출처: Prix de Lausanne 유튜브 채널

2025년 2월, 박윤재가 스위스 로잔발레콩쿠르 결선 무대에 올랐습니다. 그가 선택한 작품은 고전 발레 <파리의 불꽃(Flame of Paris)> 바리에이션. 공중에서 가위처럼 다리가 찢어지는 동작 ‘시저’로 단숨에 시선을 사로잡고, 한 발을 축으로 팽이처럼 도는 동작 중 가장 큰 ‘그랑 피루엣’으로 감탄을 자아냅니다. 심사위원단은 “완벽한 테크닉 위에서 드라마를 조각한다”는 평과 함께 최고 점수를 줬고 박윤재는 로잔 53년 역사상 첫 한국인 남성 그랑프리 수상자가 됐죠. 바르나·잭슨·모스크바·파리와 함께 세계 5대 발레 콩쿠르로 꼽히는 이 대회는 15~18세만 출전할 수 있어 발레 유망주들의 관문이라 불리는데요. 한국 무용수들은 최근 10년간 파이널리스트에 꾸준히 이름을 올리며 존재감을 키워 왔지만 지금의 결과는 또 새로웠습니다.

스위스 로잔발레콩쿠르 2025 컨템퍼러리 파이널 무대, 동영상 출처: Prix de Lausanne 유튜브 채널

사실 타 무용수에 비해 허벅지 근육이나 종아리 근육 자체가 두꺼운 점은 단점이 되기도, 장점이 되기도 했다는 박윤재입니다. 다소 둔해 보인다는 지적도 있었지만, 점프력과 폭발력을 만들어내는 원천이 되어 그의 춤을 돋보이게 하는 가장 특징적인 요소가 되었습니다. 같은 춤을 춰도 개인이 갖춘 신체조건이나 기량, 해석력이 각기 다른 정서를 전달하기에 ‘타고남’을 얼마나 잘 받아들이고 갈고 닦는지가 관건인 셈입니다.

우승 직후 국제 러브콜이 쏟아졌지만 박윤재는 “학생으로서 마지막 담금질이 필요하다”며 미국 아메리칸발레시어터(ABT) 산하 JKO 발레학교의 장학생 제안을 택했습니다. 오는 9월부터 뉴욕으로 향해 클래식·네오클래식·컨템퍼러리 커리큘럼을 소화하며, ABT 스튜디오 컴퍼니 객원 무대에도 설 예정이라는데요. 한국 남자 발레리노에게 쉽지 않았던 해외 주역 직행 통로가 그의 도약으로 활짝 열렸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지금 박윤재의 발끝은 소년과 프로의 간극을 넘나들며 세계 무대에 한국 발레의 새로운 좌표를 찍고 있습니다.

YAGP 그랑프리에서 마린스키까지, 전민철

YAGP 2025 클래식 파이널 무대, 동영상 출처: YAGP Youth America Grand Prix 유튜브 채널

전민철의 2025년은 무용수 인생에서 한 번 마주하기에도 어려운 비약(飛躍)의 연속으로 기록됩니다. 3월, 그는 ‘발레계 올림픽’으로 불리는 유스아메리카그랑프리(YAGP·Youth America Grand Prix) 시니어 남성 무대에서 <지젤>, <에스메랄다> 바리에이션을 올렸습니다. 그리고 모든 부문과 연령대를 통틀어 최고 실력을 선보인 참가자에게 주어지는 전체 대상인 그랑프리를 거머쥐었습니다. 심사위원은 “고전과 현대 양쪽에서 움직임의 언어를 재구성하는 20대 초반 남성 무용수는 드물다”는 총평을 남겼습니다.

동영상 출처: Mariinsky Theatre 유튜브 채널

전민철은 대회 내내 경쟁 참가자들의 견제가 아닌 환호를 받기도 했습니다. 무대를 막 뒤에서 지켜보던 참가자들이 감탄하며 박수치는 모습이 서브 카메라에 잡힌 것입니다. 이미 프로 무대 제안을 받은 소문난 신예 스타였기 때문인데요. 상트페테르부르크 마린스키 발레단 계약 소식이 있었습니다. 마린스키 발레단은 세계에서도 보수적이기로 유명합니다. 외국인에게 장벽이 높을 뿐더러 통상 무용수가 무대에 서려면 군무 코르 드 발레 단계를 먼저 밟아야 하지만, 전민철을 곧바로 정식 솔리스트로 영입한다는 사실은 더욱 화제를 낳았죠. 7월17일 마린스키 무대에서는 고전 발레 <라 바야데르>의 솔로르 역으로 첫 주역을 맡았습니다. 2011년 김기민 발레리노의 입단 이후 14년 만의 일이자, 21세라는 나이에 비춰 보면 전례 없는 속도입니다.

전민철은 입단 발표 직후 다양한 매체를 통해 일상을 공개하기도 했습니다. 오전 9시 바(Barre) 클래스, 오전에서 오후까지 이어지는 레퍼토리 리허설, 이후 피지컬 트레이닝, 저녁에는 러시아어 수업까지 소화하는 일정. 그는 한 인터뷰에서 “발레에 가장 필요한 건 열정과 끈기”라며 “자신에게도 있고, 발레를 하는 친구들이라면 모두 갖춘 이 요소는 오랫동안 지속하기 어려운 만큼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발레는 노력에 앞서 소위 ‘적합한 신체’를 가져야 하는 잔인한 예술이기도 하지만, ‘타고남’만이 모든 것을 만들어주지는 않는다는 속뜻이 전해집니다.


두 개의 별, 이어질 별자리

박윤재와 전민철은 한국을 넘어 세계의 밝은 별로 떠올랐습니다. 그러나 하늘에 뜬 두 점이 전부가 아닙니다. 올해 전민철과 함께 유스아메리카그랑프리에 출전해 발레 시니어 남자 솔로 부문 2위를 기록한 성재승, 지난해 같은 대회에서 대상을 차지한 박건희 등 여러 이름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국제 콩쿠르 우승, 유럽 발레 학교 합격, 해외 갈라 초청은 이제 일상이 되어 가고요. 관객과 매체가 박윤재, 전민철의 반짝임에 열광하는 사이 무대 뒤에서 흘리는 땀의 서사는 저마다 다르게 쓰여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튀튀 대신 타이즈를 입은 발끝들이 더 높이, 더 멀리 날아오를 수 있도록 관객의 시선도, 지원도 일회성에서 그치지 않기를 바라게 됩니다. 열기가 식지 않도록 청소년 단계 장학금·리허설 홀·의료 지원 같은 기초 생태계가 더욱 탄탄해지는 환경, 또한 남성 무용수의 레퍼토리를 꾸준히 확장해 ‘돌아올 무대’를 마련하는 국내 공연장 시스템이 뒷받침되는 것. 지금 필요한 것은 ‘다음 별’들이 연결될 별자리 지도를 미리 그려 두는 일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