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데리고 살기 위해
자기 자신과의 관계를 말하는 '정우'의 음악 3곡
'혼자를 기르는 법'이라는 제목의 웹툰을 열심히 챙겨 보던 때가 있었습니다. 1인 가구 20대 여성의 일상을 작가 특유의 통찰과 센스를 담아 위트 있게 그려냈던 이 작품은 처음으로 ‘나의 마음을 돌본다는 것’에 대해 고민하게 했습니다. 내적인 고민이 외부에서 겪는 경험을 통해 심화되었던 시간들을 지나며, 결국 마음 깊이 자리 잡은 확신은 '내가 돌보고 챙겨야 할 가장 중요한 사람은 나'라는 것이었죠. 죽는 순간까지 평생 내 머릿속을 채울 가장 가까운 언어는 내 마음과 생각에서 비롯되기에, 그 누구보다 ‘나’와의 관계를 망치지 않도록 신경 써야 하는 것 같습니다.
‘나’와의 관계 맺기를 처음 고민했던 때로부터 꽤 시간이 지난 지금, ‘정우’의 음악은 그동안 내가 나와 걸어 온 길을 다시 한번 가만히 서서 돌아 보게 합니다. 그녀의 가사는 때론 다소 개인적이고 내밀한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나’를 데리고 살기 위해 치열하게, 또 집요하게 자신의 속을 들여다봤던 지난한 시간의 기록은 분명 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각자의 이야기와 맞닿을 수 있는 감정적 접점을 품고 있습니다.
이번 아티클에서는, 달궈졌다 식기를 반복하는 나와 나의 관계를 곧고 초연한 목소리로 노래하는 정우의 음악을 소개합니다. 2019년 첫 정규 앨범 <여섯번째 토요일>을 발매하며 데뷔한 여성 인디 싱어송라이터 ‘정우’는 포크, 록 등의 장르를 오가며 굴곡진 희망과 절망의 궤적을 담담히 노래합니다. 분명 담담하고 깔끔한 보컬이지만, ‘나’의 내면으로 파고드는 끝없는 질문과 성찰이 담긴 3곡의 가사들은 어쩐지 마음 끝에 오래도록 묵직하게 맺힙니다.
종잡을 수 없는 나를 붙들고
정규 2집 <클라우드 쿠쿠 랜드> - JUVENILE
세상 모든 일이 공평하게 흘러갈 순 없어요
맞아요
같이 죽자던 엄마는
나랑 제일 친한 친구가 됐고요
작년에 보내준 우리 집 강아지
한 번만 더 보고 싶고요
늙기 싫고요 아프기도 싫어요
노력 없이 좋은 추억 만들고 싶어요
죽으려다 망설이고 살아남긴 고단하고
겁이 나서 울다가도 어떻게든 될 것 같고
정우의 정규 2집 <클라우드 쿠쿠 랜드> 속 '나'의 상태를 한마디로 적어보자면 '속 시끄럽다'가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금방이라도 알 수 없는 방향으로 불꽃이 튈 것 같은 불안정한 정서가 앨범 전반을 감싸죠. 앨범의 소개글에 적힌 ‘미성년 시기의 기록’이라는 문구는 화자의 정체 모를 불안과 혼란이 성장 과정에서 비롯된 필연적 감정임을 짐작하게 합니다.
앨범의 이름이자 현실과 동떨어진 망상과 공상의 세계를 의미하는 영어 표현인 ‘클라우드 쿠쿠 랜드’는 화자가 느끼는 감정들의 배경이 됩니다. 분명 사람들 속에 섞여 현실을 살아가고 있지만, 보이지 않는 막을 두고 또 다른 자기만의 세계에 자신을 가둔 채 살아가기도 하는 미성년 시기가 마치 ‘클라우드 쿠쿠 랜드’ 같죠. 이 세계에 잠식되는 것도, 세계에서 벗어나 현실을 자각하는 것도 모두 분명 혼란과 고통을 수반하기에 ‘클라우드 쿠쿠 랜드’ 속 ‘나’의 이야기는 마치 괴로운 몸부림처럼 느껴집니다.
이 몸부림을 직관적으로 담아낸 5번 트랙의 'JUVENILE'은 시시각각 양극단을 오가는 '나'의 혼란한 심정을 푸념하듯 뱉어냅니다. ‘시샘하다 사랑하고’, ‘망가지다 고쳐지고’ ‘사무치게 외롭다가 괜찮아서 혼자 있’는 화자는 뜻대로 되지 않는 자신의 마음과 행동에 지쳐 버렸죠. 내 마음인데도 컨트롤 할 수 없이 내 속의 또 다른 나에게 이끌려 다니는 통제불능의 시간이 정신없이 흘러갑니다.
화자는 종잡을 수 없이 날뛰는 내 마음이 ‘영원할 거라 생각’하지 않고, 또 혼란과 모순을 안고 사는 게 삶이라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안다고 괴롭지 않은 것은 아니겠죠. 내가 나를 감당하는 것은 여전히 고된 일입니다. 그저 내 멱살을 쥐어 잡고 들이닥치는 감정의 파도를 유연하게 탈 수 있을 때까지 괴로운 시간을 버티는 수밖에 없습니다. 스스로를 붙들고 위태롭게 버티는 화자를 보니, 나와의 불협화음이 어느 때보다 시끄럽고 강렬하게 안을 채웠던 과거의 어느 시간이 떠오릅니다.
나와 나, 우리의 시간과 시선을 맞추며
Double Single <옛날이야기 해주세요> - 옛날이야기 해주세요
불행이 엎질러진 외갓집 나무 바닥. 할아버지가 주무시는 방의 미닫이문. 카펫. 냉장고. 말라가는 과일이 담긴 바구니. 내가 내게 일어난 재해를 똑똑히 바라본다. 나아질 일이 있을까. 나아질 마음은 있을까. 기회가 찾아온다면 행복해질 자신은 있을까. 새벽, 내 두 눈은 하얗게 말라간다. 몇 대 안 되는 승용차와 트럭이 삶과 같은 속도로 도로를 내지르는 모습을 보면서.
2023년 발매된 정우의 double single <옛날이야기 해주세요>는 마치 한 편의 시집과도 같습니다. 맥락을 더듬어 숨은 이야기를 읽어나가야 하는 시처럼, 화자가 들려주는 단편적이고도 개인적인 언어들의 한 줄 한 줄을 곱씹게 됩니다.
앨범명과도 동일한 이름의 첫번째 트랙 '옛날이야기 해주세요'는 제목 그대로 마치 누군가의 ‘옛날 이야기’를 듣는 듯한 구성의 음악입니다. 알 수 없는 타인의 대사, 생생하게 그려질 만큼 구체적인 풍경의 묘사 등이 가사로 쓰였고, 낭독회를 하듯 여러 여성의 목소리가 이 대목의 가사를 나레이팅하죠. 가사의 내용은 지극히 개인적인 서사로 읽히지만, 동시에 이건 누구의 이야기로도 가닿을 수 있다는 듯 여럿의 목소리를 통해 청자의 공명 가능성을 열어둡니다. 즉, 정우의 가사가 개인의 이야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닌, 도달하게 되는 저마다의 이야기로서 의의를 가질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음악이란 결국 듣고 부르는 많은 이들의 목소리로 완결된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되죠.
나레이팅 되는 파편적인 이야기는 '불행이 엎질러'졌던 과거의 어느 시기를 가늠하게 합니다. 과거의 페이지에 속한 이야기는 다 접힌 듯하다가도 불현듯 찾아오는 무의식의 꿈처럼 우리를 엄습하죠. 분명 지나온 시간임에도 마치 현재 닥친 사건처럼 과거가 다시 생생히 떠오르면 지금을 사는 화자는 또다시 잠 못 이루고 과거의 불행이라는 늪에서 허우적댑니다.
그러나 중요한건, 결국 이건 다 ‘옛날’이야기입니다. 꿈에서 마주한 기억의 조각들은 깨고 나면 사라지는 과거에 머무는 것들이죠. 다시 늪에 빠질지라도 오늘날의 화자에게는 과거를 과거로써 응시하고 때때로 나를 달래 진정시킬 힘이 생겼기에 스스로를 지금이라는 현재의 시간 안에서 ‘삶과 같은 속도로’ 흐를 수 있게 합니다.
화자처럼 우리도 이따금 자기 자신을 다시 괴로운 과거에 두고 오는 날이 있을 겁니다. 과거의 기억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는 것이 쉽지는 않겠죠. 그러나 정우가 우리에게 들려준 이야기는 분명 희망적입니다. 엉겨붙은 지난 시간의 불행을 털어서 다시 지금과 미래라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릴 수 있게 하는 것도 결국 나 자신이라고 말하니까요.
철과 같이 단단한 마음으로
EP <철의 삶> - 철의 삶
달군 머리를 변기에 처박고 울었다. 인정한다. 나는 쓸모없다.
당신, 녹슬면 끝이라 했지만 천 번을 두드리는 삶도 세상에는 있는 것이었다.
나는 철의 삶 철의 여인 뜨겁기 위한 말과 몸짓
파랑의 생을 받고 슬픔을 가눌 거야
피와 쇠의 머릴 밟아 세상의 끝을 겨눈대도
나의 품 안에서 너는 절대 부서질 일이 없을 거야
정우의 첫 EP이자 가장 최근 앨범 <철의 삶>은 이름처럼 삶을 살아가는 ‘무쇠의 마음’을 경쾌한 음으로, 그러나 가볍지는 않은 언어로 담아냈습니다. 뜨거운 불길에 달궈졌다가 다시 식기를 반복하며 더욱 단단해지고 강해지는 철처럼, 우리의 삶도 그러한 과정 안에 놓여있다는 메시지를 전하는 앨범이죠.
그동안 지리멸렬한 삶을 붙들고 자신을 가까스로 일으키던 정우의 앨범 속 화자들과 달리, 조금은 더 가뿐해지고 초연해진 <철의 삶> 속 화자는 이제 어디로 가야 할지 알 것 같다고도 말합니다.(‘천사’) 또 정우가 직접 적어 앨범이 발매될 때마다 찾아 읽게 만드는 앨범 소개글에는 이렇게 적혀 있죠.
‘<철의 삶>은 단단하고 아름답게 살아가기 위해 무얼 해야 하는지 자문하는 앨범입니다.’
여전히 끊임없이 자문하는 삶이지만, 그 질문이 더 이상 이전처럼 불안하지만은 않습니다. 마음의 단단함을 일궈낸 지난한 시간들이 내 안에 경험치로 쌓여있기 때문이겠죠.
앨범과 동명의 타이틀 곡 ‘철의 삶’은 내가 나를 지키고자 하는 오기와 끈기, 그리고 이 마음을 붙드는 에너지를 잔뜩 뿜어냅니다. 이 세상은 마치 내가 죽길 바라는 것처럼 가혹하지만, 나 같은 사람 하나쯤은 없어져도 아무 문제 없다는 듯 냉랭하지만, 화자는 반박하듯 살아나가죠. ‘녹슬면 끝이라’고 말하는 당신들에게 삶은 천 번을 두드려서라도 굳세게 이어질 수 있다고 말하며 화자는 아직 무르고 녹슨 채로 매일을 버티는 또다른 타인들의 삶까지 긍정합니다.
‘철의 삶’의 가사에는 ‘너’라는 청자가 분명히 등장하지만, ‘너’는 끝내 ‘나’로 읽히고 맙니다. 비로소 단단해진 마음으로 ‘나의 품 안에서 너는 절대 부서질 일이 없을 거야’라고 단언하는 화자의 말에선 오랜 시간 자신을 몇 번이고 두드린 자의 강인함이 배어 나오죠. 이 강인함과 단단함은 삶에서 슬픔을 완전히 몰아낸 자의 것이 아닌, 슬픔을 가눌 줄 알게 된 자의 것입니다. 철과 같은 삶이라는 건 결국 슬픔마저 나를 단단하게 만드는 재료로 쓸 수 있는 삶인 것 같습니다.
어떤 노래는 마치 듣는 이들이 스스로에게 불러주라고 만들어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정우의 ‘옛날이야기 해주세요’라는 곡이 여러 사람의 목소리로 완성이 되었듯, 듣는 이들이 자기 자신에게 불러줌으로써 완성되는 거죠.
위에서 소개한 세 곡을 포함한 정우의 음악들은 그렇게 각자에게 필요한 모양새로 가닿습니다. 나의 이야기를 덧입혀 듣고 부르고 나면 그 누구보다 ‘나’와 잘 지내고 싶어지는 마음이 조금이나마 솟아나는 기분이 들기도 합니다. 나와 싸우고, 나에게 붙은 불행을 털어주고, 끝내는 다독이며 다시 나를 일으켜 세워주는 주체가 ‘나’일 때, 그 담금질의 결과가 누구도 쉽게 부술 수 없는 내 안의 단단함을 만들어 줄 수 있을 것 같다는 막연한 믿음이 정우의 노래를 타고 더욱 굳건해 집니다.
타인과 연결되고 그들을 들여다 보는 것이 어느 때보다 쉬워졌지만, 그만큼 자기 자신과의 관계를 살펴보는 것이 어려워진 세상입니다. 내가 나에게 어떻게 다가갈지 모르겠다면, 먼저 그 길을 꾸준히 걸어 본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는 건 어떨까요? 자기 자신이 어려운 이들에게 정우의 음악은 단순히 ‘좋은 음악’을 넘어 ‘필요한 음악’으로서 존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