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시 정지'에서 피어난 통찰

안규철, 에마 미첼, 존 버거처럼 관찰하기

'일시 정지'에서 피어난 통찰
Photo by Paran Koo / Unsplash

저처럼 '생산성 강박'에 시달리는 분, 계실까요? 발전하지 않으면 도태된다는 두려움이 당연한 시대입니다. 영민하게 자기계발과 투자에 임해야 한다는 부담이 우리를 덮칩니다. 원하는 만큼 휴식하기에는 죄책감이 앞서고요.

감수성이 그 어느 때보다 짙었던 20대 초반에는 달랐습니다. 행선지를 향해 걸으면서도 자꾸만 머뭇거렸습니다. 식당의 간판, 낙엽, 신호등. 지금이라면 아무 생각 없이 지나칠 법한 것들이 공상을 시작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나이를 먹을수록, 목표가 많아질수록, 시간을 낭비하지 말아야겠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힙니다.

a man in shorts and a t - shirt is playing with a frisbee
Photo by Adam Davis / Unsplash

'발전'이라는 단어 앞에서 우리는 앞으로 전진하는 모습을 떠올립니다. 부단히 몸을 움직이고, 열정적으로 달려 나가는, 그런 전진 말이죠. 진일보라는 말도 있듯이, 발전을 위해서는 어떻게든 한 걸음 한 걸음 더 내디뎌야만 할 것 같습니다.  

제자리에 멈춰 서서 무언가를 가만히 관찰할 때도 우리는 발전할 수 있을까요? 이번 아티클에서 이야기할 세 명의 저자는 그렇다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눈앞의 사물, 자연, 인간을 각각 골똘히 응시하면서요. 우리는 '일시 정지'함으로써 생각지 못한 또 다른 결과를 이룰 수 있습니다. 각자의 분야에서 남다른 관찰을 보여준 미술가 안규철, 박물학자 에마 미첼, 비평가 존 버거의 책을 소개합니다.


방 안을 응시한 관찰자

안규철, 『사물의 뒷모습』

이미지 출처 : 현대문학
"내가 거쳐온 세상이라는 학교가 내게 박아 넣은 나사못들, 내가 모르는 사이에 서서히 내 속에 들어와 지금의 나를 만든 이 이물질들, 나사못들로 엮여 있는 습관과 관념의 덩어리가 바로 나다."_안규철, 『사물의 뒷모습』 - 56page

이 책을 읽다 보면 주위를 두리번거리게 됩니다. 눈에 들어오는 건 책상 위의 시계, 오래된 화분, 먹다 만 귤껍질 같은 것들입니다. 나사못만큼 미미한 존재감으로 우리의 공간을 오래도록 차지하고 있는 사물들이죠. 묻게 됩니다. 나는 저들의 뒷모습을 상상한 적 있는지. 나에게 저들의 쓰임새는, 의미는 무엇인지.

『사물의 뒷모습』은 조각을 전공한 미술가 안규철의 에세이집입니다. 이 책에는 나사못을 비롯해 인공눈물, 연필 같은 일상의 평범한 사물에 기반한 사유가 담겨 있습니다. 언어와 예술, 삶에 대한 그의 여러 에피소드와 생각도 이어집니다. 각 장에선 그가 직접 종이에 연필로 그린 사물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작은 사물에서 뻗어나간 이야기는 그가 발견한 하나의 '뒷모습', 곧 우리가 잊어버린 어떤 본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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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으로 나선 관찰자

에마 미첼, 『야생의 위로』

이미지 출처 : 도서출판 푸른숲
"그렇게 차를 몰아가는데 문득 도로 중앙분리대에서 자라나는 조그만 묘목들이 눈에 들어온다. 눈앞을 스치는 푸른 잎사귀와 엔진의 규칙적인 진동이 내면의 참담한 소음을 가라앉힌다. 한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던 나의 온전한 부분, 자연 속에서 치유를 구하는 뇌의 일부분이 깨어난다." _에마 미첼, 『야생의 위로』 - 134page

산책이 스트레스와 불안을 완화한다는 말, 익숙하실 겁니다. 숲을 걸을 때 피톤치드가 심신을 안정시킨 경험도 있었을 겁니다. 동식물과 광물, 지질학을 연구하는 박물학자인 에마 미첼은 그러한 자연의 효과를 열두 개의 챕터에 걸쳐 감각적으로 설득합니다. 1월부터 12월까지의 각 달마다 그는 숲뿐만 아니라 집 앞의 정원, 톨게이트 근처의 좁은 초원 등을 산책합니다. 그 산책길에서 멈춰 버들강아지 솜털의 촉감, 검은지빠귀의 울음소리, 블루벨의 향기를 느끼죠.

에마 미첼은 25년간 우울증을 겪었습니다. 그는 치유되기 위해 숲의 관찰자가 되어야만 했습니다. 자연을 통한 사유는 박물학자만의 것이 아닙니다. 『사물의 뒷모습』이 행한 것처럼, 근거리에서 새로운 의미를 길어 올려 봅시다. 냉이, 민들레, 씀바귀, 박새, 물까치… 누구의 것도 아닌 채로 당신의 시선을 기다리고 있을지 모릅니다. 가까이엔 어떤 위로가 있을까요. 『야생의 위로』는 매 계절 발밑에 존재하지만, 쉽게 지나쳐버린 강력한 위안을 말하는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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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으로 인간을 포착한 관찰자

존 버거, 『존 버거의 글로 쓴 사진』

이미지 출처 : 열화당
"그리고 그 뒤의 언덕으로는 마치 커다란 녹색 극장의 특별석들처럼 밭이 이어져 있다. (...) 마을은 근년 들어 많이 바뀌었다. 그러나 겨울 햇빛 아래 멀리서 보면, 마을은 이 세기가 시작되던 때의 모습 그대로일 것이다. (...) 순간 나는 그녀의 소리 없는 웃음을 들었다. 마을을 보고 있었던 사람은 바로 그녀였고, 그녀는 나로 하여금 자기 눈을 통해 마을을 보게 했다. 젊은 날의 눈을 통해 보게 해준 것, 그것이 그녀가 지금 웃는 까닭이었다."_존 버거, 『존 버거의 글로 쓴 사진』 - 20page

『존 버거의 글로 쓴 사진』은 영국의 비평가 존 버거의 산문집입니다. 앞에서 소개한 두 책이 그림과 사진을 포함하고 있다면, 이 책에는 이미지가 거의 없습니다. 그야말로 '글로 쓴' 사진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스스로 이 글들에 '포토카피'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한 장의 사진을 보지 못한 사람에게 당신을 보여주기 위해, 나는 말로 된 이 포토카피를 만든다"(133page)는 문장을 통해 글로 쓴 사진이란 어떤 것인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책이 포착한 피사체는 우리에게 낯설기만 합니다. 존 버거의 친구 혹은 오래전 만난 사람이 대부분이기 때문이죠. 저자만이 알고 있는 주변인의 얼굴을 굳이 상상해야 하는 이유를 물으신다면, 대답 대신 책을 건넬 수밖에 없겠습니다. 사진을 보지 못한 독자에게 바치는 치밀한 문장들을 읽을 때면 극장에서 영화를 보며 느꼈던 감각의 충만함이 되살아납니다. 카메라의 셔터를 누르는 짧은 순간, 인간의 겹겹을 포착하는 그의 풍성한 시선이 활자에서 펼쳐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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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권의 책을 읽다 보면 나도 모르게 주위를 둘러보게 됩니다. 책상 위의 머그잔, 작은 지우개, 책갈피 같은 사물들을 말없이 응시하게 됩니다. 또 어떤 순간에는 0.5배속의 화면처럼 세상을 느리게 바라보게 됩니다. 길을 걸으며 떠오르는 잡념들을 흘려보내지 않고 하나 하나 채집해 기록하기 시작합니다. 그 정지의 순간에 우리에게는 무엇이 남을까요.

도약을 갈망할수록 희미해진 건 현재입니다. 현재를 상실한 우리들이 존 버거의 포토카피처럼 어떤 장면을 복원할 때, 어제는 보지 못했던 사물의 뒷모습이 그려집니다. 초록빛이 우리를 감싸고 치유합니다. 짧은 만남도 온전히 감각하고 의미화하게 됩니다. '일시 정지'하기 전, 그 멈춤의 쓸모를 미리 알고 싶은 분들께 세 권의 책을 추천합니다. 마음에 가는 것부터 페이지를 넘겨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