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 서랍에서 꺼내보는 EP

바래지 않은 고요와 절제의 목소리

연말, 서랍에서 꺼내보는 EP
Photo by Jason Leung / Unsplash

싱글과 정규의 중간에 자리한 EP(extended play). 정규 앨범만큼 힘을 준 기획은 아니지만, 싱글보다 몇 곡을 더 즐길 수 있다는 매력이 있습니다. 5개 남짓의 트랙에서도 나름의 색이 묻어나고요. 작지만 알차서일까요, EP를 들을 때면 식판 위에 차려진 아침밥을 받아 드는 기분이 듭니다. 한 해의 마지막 달, 오랜만에 서랍에서 추억의 노래들을 꺼내보면 어떨까요? 기교와 욕심이 없어 더 그리운 목소리가 담긴 여성 싱어송라이터들의 EP를 소개합니다.


이예린 [슬픈 꿈]

이미지 출처 : 포크라노스

처음 소개할 EP는 2022년 발매된 이예린의 [슬픈 꿈]입니다. 이예린은 2013년 제24회 유재하 음악 경연대회 장려상 수상으로 데뷔한 싱어송라이터인데요. 담담하고 슬픈 목소리와 시적인 가사로 꾸준히 마니아 팬층을 만들어오고 있습니다. 그의 목소리에 얼굴이 있다면 왠지 무표정을 띄고 있지 않을까 싶은데요. 감정이 부재한 무표정보다는, 내색하기 어려워 많은 감정을 감추고 있는 무표정이 떠오릅니다. 다 꿈이었던 것처럼 슬픈 기억을 흘려보내고 싶은 분들에게 이 EP를 추천해요.


정은채 [정은채]

이미지 출처 : 미러볼뮤직

우리에겐 <정년이>,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 부장 이야기>와 같은 드라마의 배우로 익숙한 정은채. 그가 2013년에 5곡의 자작곡을 담은 EP [정은채]를 발표한 사실, 알고 계셨나요? 타이틀곡 ‘소년, 소녀’의 피쳐링을 부탁하기 위해 수소문 끝에 토마스쿡에게 연락한 일화도 유명한데요. 트랙 전반에 흐르는 나지막한 목소리가 그리워질 때마다 가끔씩 꺼내게 되는 EP입니다. 활기찬 희망보다는 조심스러움과 아쉬움의 정서에 잠기고 싶을 때 들어보세요. 


홍혜림 [Hong Haelim]

이미지 출처 : ㈜디지탈레코드

10년 전, ‘말린 꽃 Dry Flower’라는 타이틀곡의 제목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아름다운 꽃들에 대한 노래는 기존에도 많았지만, 말린 꽃에 대한 노래는 낯설어서요. ‘너는 점점 탁해지고 / 향기도 사라졌지만 / 예쁜 자태는 잃지 않았지 / 그렇게라도 나를 / 떠나지 않아서 다행이야’ 라는 가사는 홍혜림 자신의 노래 철학을 설명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화려한 멋은 없지만 본래의 자리를 떠나지 않는 목소리. 그런 홍혜림의 목소리를 오랜만에 듣다 보면 여러분도 ‘조금 덜 외롭고’ ‘조금 더 안심이’ 될 거예요.


수없이 신곡이 쏟아지는 가운데, 계속해서 손이 가는 오래된 노래들이 있습니다. 필자에겐 세 EP의 노래들이 그러합니다. 고요하고 절제된 목소리와 편곡은 첨단을 달리는 2025년의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아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욱, 여백이 있는 노래를 찾게 되는 리스너들도 많을 것입니다. 찬란한 소음이 줄 수 없는 위로를 찾아서요. 그런 노래들을 꺼내 반복 재생하며, 올해의 나를 다독여보면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