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는 어떻게 서로 다른 몸들을 껴안는가
국립현대미술관 《기울인 몸들: 서로의 취약함이 만날 때》

전시기획자로서 나는 때로 죄책감을 느낀다.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미안하지만, 이번 전시는 오기 힘들 것 같아. 사진이랑 서문을 보내줄게. 나중에 만나서 이야기하자.”라는 말을 해야 할 때가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건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계단을 오르거나 문턱을 넘을 수 없는 그들의 잘못도 아니고, 전시의 특성 혹은 예산 부족으로 접근성을 확보할 수 없었던 나의 잘못도 아니다. 사실 마음 깊은 곳에서는 내 잘못이라고 생각하지만, 적어도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부정은 항상 끈덕지게 머릿속에 회한과 슬픔을 남긴다.
“어쩔 수 없는 일에 왜 그렇게 매달려 있어?”라는 말을 듣기도 한다. 내가 더 도덕적이고 나은 사람이어서 전시장의 접근성과 포용성 문제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그저 두렵기 때문이다. 마치 지난겨울처럼, 크게 아파서 다른 사람의 부축 없이는 전시장에 가지 못하는 상황이 또 벌어질까 봐. 겨우 도착한 전시장에 향을 활용한 작업이 있어 치명적인 매스꺼움을 느끼며 도망쳐 나가는 일이 또 벌어질까 봐 두렵기 때문이다.
전시를 사랑하는 나는, 어느 날 내가 전시장에서 쫓겨날까 봐 두렵다. 어쩔 수 없으니, 전시를 보는 한가로운 여가 같은 건 포기하라는 이야기를 들을지 두렵다. 그리고 내가 어쩔 수 없다고, 미안하다고 말하며 쫓아내고 있는 사람들을 생각하며 죄책감에 사로잡힌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열리고 있는 《기울인 몸들: 서로의 취약함이 만날 때》는 그런 내게 다정하게도 기댈 곳을 마련해 주었다. 『페미니스트, 퀴어, 불구』의 저자 앨리슨 케이퍼는 비장애 중심주의(ableism) 사회가 장애가 존재하는 미래를 제한하고 단축해 버림을 지적하며, 이에 맞서 미래를 상상할 수 있는 권리를 요구한다. 《기울인 몸들: 서로의 취약함이 만날 때》는 내게 언제나 전시장을 누빌 수 있는 미래를 상상할 수 있는 여지를 주었다. 아프거나 늙었거나 미숙하거나 장애와 함께하는 몸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전시를 볼 수 있는 미래.
《기울인 몸들》이 제안하는 보다 열린 전시장

《기울인 몸들》 전시장 입구 벽면에는 기존의 다른 전시와 다르게 서문이 아니라 전시 접근성 안내가 쓰여있다. 이 전시의 서문이 전시 접근성 안내라고도 이해할 수 있다. 많은 장애 운동가가 사전 안내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접근성 확대를 위한 노력도 중요하지만, 가장 기본은 어떤 부분이 접근성 확대를 위해 제공되고, 어떤 부분이 부족한지를 정확하게 알리는 것이다. 접근성 안내는 ‘정상적인’ 몸을 가진 사람만이 공적 공간에 진입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사고에 대한 저항이다. 물론 《기울인 몸들》에는 제공하기 힘든 사항에 대한 안내는 없었지만, 전시가 제공하는 촉지도, 점자 안내, 점자블록, 음성 해설, 휴식 공간과 도움을 줄 수 있는 상주 직원에 대한 안내를 꼼꼼하게 기재했다.

흥미로운 점은 전시 접근성 확대의 수혜자가 사실 전시를 관람하는 모든 이들이란 점이다. 전시장 천장에 매달린 지향성 스피커 덕에 우리는 훨씬 편하게 작품을 보며 해설을 들을 수 있고, 점자블록 덕에 전시장의 동선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눈으로 감상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만지며 감상할 수 있는 작업 덕에 더 풍부한 방식으로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다리가 아파지면 휴식 공간으로 나가 잠시 쉬었다 전시를 감상해도 된다. 불안할 때는 차음헤드폰을 끼고 인형을 안고 잠시 앉아 있을 수도 있다. 《기울인 몸들》은 단순히 다양한 몸들의 취약함과 취약함을 기반으로 한 연대를, 작품을 통해서 보여주는 데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전시 방식 자체를 변화시킴으로 주제와 함께하는 태도를 전시에서 만들어내고 있다.

몸을 기울인 채 주위를 살피는 우리가
다른 몸과 마주 보는 순간

기획을 통해 다양한 몸들이 전시장을 드나들 수 있는 접근성을 확보한 《기울인 몸들》은 3개의 주제를 가지고 확장된다. 전시의 시작인 <기울인 몸들> 구역에서는 정상적인 신체에 대한 사회적 통념을 전복하는 작품들이 전시된다. 판테하 아바레시는 <닫힌 시스템>에서 여러 약물을 투약하여 지탱되는 신체를 묘사한다. 모르핀(진통제), 졸피뎀(진정제), 케타민(마취, 진통제) 등 작품에 등장하는 약물들은 매우 극심한 고통을 겪는 경우에만 처방된다. 이들을 통해 약물이 오가는 튜브와 플라스크로 은유 되는 신체가 얼마나 큰 고통을 겪고 있을지가 유추된다. 그럼에도 아바레시는 유쾌함을 잃지 않는다. 약물들의 이름과 더불어 다양한 색으로 지붕이 칠해진 집들이 원형을 그리는 이 작업은, 마치 가구마다 개성이 넘치면서도 사이좋은 마을을 보는 것 같다. <사물 욕망>에서 다리 보조기를 다루는 방식도 마찬가지다. BDSM 플레이 자세를 연상시키는 이 작업은 제한된 모빌리티를 지닌 몸 역시도 쾌락을 좇을 수 있으며, 제한과 구속이 고통만을 가져오는 것은 아님을 드러낸다. 아바레시의 작업뿐 아니라 <기울인 몸들>에 전시된 작업은 불완전한 몸에 대한 사적인 경험을 집단으로 전환한다. <기울인 몸들>은 완전한 몸이란 허상에 불과하며, 다양한 몸들이 모여 사회를 이루고 있음을 이야기한다.

두 번째 구역인 <살피는 우리>는 미술, 건축, 디자인 분야의 실천에 관해 탐구한다. 우리 사회가 다양한 몸들로 이루어져 서로 기대어 살아갈 수밖에 없다면, 몸들을 위한 어떤 사회적 실천이 필요할까? 데이비드 기슨, 브렛 스나이더, 아이린 챙의 <블록 파티: 자립생활에서 장애 공동체에 이르기까지>는 미국 버클리 지역을 중심으로 어떻게 지역 사회가 함께 장애인과 살아갈 수 있을지를 건축의 관점에서 연구한다. 장애인을 위한 시설이 개인이 아니라 지역 공동체를 통해 마련될 방법을 고민하는 이들은, 고민의 과정에서 사유지와 공적 공간에 대한 관념이 식민주의적 관점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발견한다. 장애인과 함께하는 지역사회를 만드는 것은 단순히 이들과 함께 사는 법을 고민하는 것에서 넘어 근대적 도시관에 대한 저항으로 이어짐을 <블록 파티: 자립생활에서 장애 공동체에 이르기까지>는 시사한다. <살피는 우리>에 전시된 작품들은 모두 공동체란 무엇인가에 대해 질문하고, 우리가 서로를 배척하지 않고 함께 살아내는 능력을 기르는 방법에 대해 논의한다.

전시는 마지막으로 <다른 몸과 마주보기>로 확장된다. <다른 몸과 마주보기>는 전시와 함께 이루어지는 강연, 공연, 모임으로 전시를 미적인 담론에서 머무는 것에서 끄집어내 사회적인 논의 과정으로 확장한다. 스무 차례가 넘는 다양한 행사는 이 전시에 접속하는 여러 사람이 직접 자기 생각과 경험을 나눌 수 있는 장을 마련한다. <기울인 몸들>이 개별 몸들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살피는 우리가> 공동체의 실천에 대해 말한다면, <다른 몸과 마주보기> 전시장 밖,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의 생생한 증언을 전시 안으로 들여온다. 이렇게 점점 확장되는 구조가 《기울인 몸들》의 서사를 더욱 풍부하게 만든다.
다양한 몸들을 포용하고 이야기하려는 태도가 단지 이 전시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열리는 여러 전시에 적용되기를 바란다. 그뿐만 아니라, 전시 접근성에 대한 논의가 이를 계기로 활발하게 일어나 《기울인 몸들》이 고려한 것 이상으로 확장되기를 바란다. 특정한 집단의 접근성에 대한 고려가 다른 집단 접근성 고려에 상충하는 경우나, 작품이나 전시 공간의 특성상 접근성을 확보하기 힘들 때 마련할 수 있는 대안 등 아직도 우리가 함께 고민할 부분이 아직 많이 남아있다. 이번 아티클에서는 《기울인 몸들》의 사례를 통해 전시 접근성에 관하여 이야기했지만, 사실 지금 한국 미술계에서는 전시 접근성에 대한 논의가 봇물 터지듯 일고 있다. 이러한 논의가 한 때의 유행으로 끝나지 않도록 모두의 관심이 절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