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상처를 껴안은 모든 아이를 위해
몸집보다 큰 다정 - 영화 <이사>

성장과 아이는 떼놓을 수 없는 단어 같습니다. 나무가 햇볕을 쬐고 비를 맞으며 자라듯 아이의 몸도 충분한 시간과 영양이 주어진다면 자연스레 자라납니다. 그런데 마음은 어떨까요? 마음의 성장은 분명 시간 외에도 어떤 것들을 필요로 합니다. 영화 <이사>는 부모님의 별거로 어머니와 단둘이 살게 된 렌코가 세 가족이 다시 함께 살기를 바라며 고군분투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영화는 렌코가 사건을 겪어 내는 과정을 따라가며 그녀의 변화를 포착합니다. 렌코의 시선을 따라가며, 원하지 않아도 어떤 잘못 없이도 기어이 우리의 세계를 흔들면서 찾아오는 성장의 순간을 살펴봅니다.
*영화 <이사>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농담과 침묵

아버지가 홀로 이사를 떠나기 전, 세 가족은 삼각형 모양의 식탁에 앉아 식사를 합니다. 부모님의 별거라는 사건을 맞닥뜨린 렌코가 처음 택한 방식은 농담입니다. “야채도 못 먹으면서 혼자 살 수 있겠어?” 렌코의 농담 아버지는 애써 웃어 보이고 남겨질 어머니는 침묵합니다. 과거 즐거운 이야기가 오갔을 식탁은 이제 어색한 농담과 침묵이 묘한 긴장감을 만들어 냅니다.
아버지의 이삿날, 렌코는 학교로 가던 발길을 돌려 이사 트럭을 쫓습니다. 짐을 다 풀기도 전에 아버지와 장롱 앞에서 장난을 치던 렌코는 또 하나의 농담을 던집니다. “이 장롱 속이 내 방과 연결되면 좋겠다.”

렌코에게 부모님의 별거는 재해 같은 사건입니다. 자신의 의지와 잘못과는 무관하게 일어났고 어쩔 수 없이 함께 겪어 내야 합니다. 렌코의 농담은 이전의 일상을 붙잡으려는 언어적 시도입니다. 그녀는 곧 일어난 부모의 별거를 인식하면서도 그 사건에서 발생할 결핍을 웃음으로 은폐합니다. 하지만 연결되고 싶다는 욕망은 그들이 분리된다는 현실의 균열을 선명하게 드러냅니다. 농담은 상황을 잠시 부드럽게 봉합하는 듯 보이지만 그 아래로 현실은 소리 없이 흘러갑니다.
외침과 깨진 유리창

부모님의 별거는 더 이상 농담으로 덮을 수 없는 현실로 다가옵니다. 렌코는 다시 이전으로 돌아가기 위해 적극적으로 행동합니다. 이혼 합의서를 숨기고, 어머니가 내건 둘만의 생활 수칙이 적힌 종이를 찢고, 아버지에게 왜 함께 살 수 없는지 묻습니다. 진전이 없자 렌코는 욕실 문을 걸어 잠구고 침묵으로 시위합니다. 그녀를 설득하기 위해 모인 부부는 대답 없는 욕실 문을 앞에 두고 점차 서로를 향한 비난을 쏟아냅니다. 임신 기간을 외롭게 보낸 어머니의 상처가 드러나며 말은 점점 더 날카로워집니다. 그때 조용하던 욕실에서 렌코의 외침이 팽팽한 긴장을 찢고 나옵니다. “왜 낳았어?”
아이의 외침과 동시에 어머니는 맨손으로 욕실 유리창을 부숩니다. 카메라는 욕실 안에서 피 묻은 주먹과 함께 어머니의 얼굴을 비춥니다. 분노와 슬픔, 안심과 공포가 뒤섞인 표정으로 어머니가 렌코를 바라봅니다.

사람은 자신이 살아가는 이야기 속에서 정체성을 형성합니다. 부모에게서 아직 독립하기 전인 렌코는 부모의 서사 속에 자신을 위치시켰을 것입니다. 부모의 갈등은 이 내러티브를 파괴합니다. 언제까지나 이어질 것 같던 길이 절벽으로 끊기는 순간은 그야말로 혼돈입니다. 부모의 날 선 대화는 과거에 머물고, ‘만약’이라는 단어는 기억을 거울처럼 무한히 되비춥니다. 그 끝에 고독한 자기 부정이 있습니다. 렌코의 외침은 단순한 반항이 아니라 정체성을 위협받는 순간의 비명처럼 울려 퍼집니다. 하지만 그 비명 속으로 어머니의 피 묻은 주먹이 렌코의 외로운 공간을 깨부수고 들어옵니다. 그 순간 렌코가 마주한 어머니의 표정에서 그녀는 무엇을 보았을까요. 공포일까요? 사랑일까요? 아니면 그 모든 것일까요?
몸집보다 큰 다정

욕실 사건 이후, 부부는 렌코의 감정을 살피려 함께 하는 시간을 만들고, 과거 여행지로 휴가를 떠납니다. 하지만 그곳에서 드러난 것은 단란했던 시절의 추억이 아니라 서로의 미숙함과 상처입니다. 왜 함께 살 수 없는지에 대한 아버지의 대답에 실망한 렌코는 도망치듯 달아나다가, 다시 방향을 돌려 아버지를 지나쳐 달려 나갑니다. 길 위에서 자신을 찾던 어머니와 재회한 렌코는 ‘어른이 되겠다’고 말한 뒤, 자신만의 초현실적인 여정을 떠납니다.

산을 넘고 물을 건너 바다에 다다른 렌코는 환영처럼 단란했던 가족을 마주합니다. 축제를 즐기며 즐거워 보이던 모습도 잠시, 축제 장식은 불타오르고 아버지와 어머니는 바닷속으로 사라집니다. 남겨진 것은 바닷속에 홀로 선 자신입니다. 렌코는 ‘혼자 두지 말라’며 절규하는 자신의 환영을 껴안습니다.

결국 렌코의 계획은 실패한 것 같습니다. 부모님은 화해하지 못했고, 여행은 끝났습니다. 하지만 돌아오는 기차에서 렌코는 숨겨 두었던 이혼 합의서를 어머니에게 내밀며 예전보다 단단한 표정으로 어머니와 마주 웃습니다. 렌코는 일상의 균열을 없었던 일로 되돌리는 대신 자신의 위치를 바꿈으로써 성장합니다. 부모의 서사에 자신을 붙들어 두는 대신 자신의 서사를 쓰기 시작한 것입니다. 상처는 지워지지 않습니다. 되돌릴 수도 없습니다. 다만 상처를 기억 속에서 다룰 수 있을 때 우리는 그것을 껴안을 수 있습니다.
평일 늦은 저녁 작은 독립 영화관에서 열 명이 채 되지 않는 관객들이 이 영화를 보았습니다. 입장할 때 본 뒷모습들은 모두 의자 위로 머리가 훌쩍 올라와 있었는데요. 영화가 중반을 넘어가자 훌쩍이는 소리가 영화관을 내내 가득 채웠습니다. <이사>는 렌코라는 아이의 성장에 관한 이야기면서 동시에 또 다른 아이가 떠오르게 합니다. ‘성장 영화 속 유달리 굳센 초상들(김소미)’과 달리 과거의 나를 껴안지 못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아이를 기억 속 바다 어딘가에 내버려둔 채 어른이 된 사람들은 어느 밤에 불현듯 울음 섞인 외침을 듣습니다. 어른이 자신만의 굴에 숨어 제 상처를 핥고 있을 때 아이는 제 몸짓보다 훨씬 큰 다정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그 다정함이 또 한 명의 아이를 보게 합니다.
참고 자료
김소미 / 성장은, 어른의 긴장을 감각하는 일 – 국내 최초 개봉 소마이 신지 <이사> / 씨네21 / 2025-07-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