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정의 파리에서 시작된 질문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 - 나의 황금시대는 언제, 어디에 있는가?

어느덧 자정을 알리는 종소리가 묵직하게 울려 퍼집니다.
모두가 잠든 파리의 골목길 저편, 검은 차 한 대가 한 남자 앞에 멈춰 섭니다.
마치 오래전부터 약속이라도 되어 있었던 듯, 그는 누군가와 웃으며 안부를 나누고 차에 오릅니다.
야심한 밤, 그들은 과연 어디로 향하는 걸까요. 우리, 조용히 그의 뒤를 따라가 봅시다.
곧, 이성으로는 도저히 믿기 힘든 광경이 펼쳐집니다.
화려한 옷차림의 사람들이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환희에 젖어 있습니다.
잔 속 술은 일렁이다 못해 찰랑이며, 취기오른 술은 사람을 더욱 달아오르게 만듭니다.
그곳 한켠, 조금 전 우리가 따라온 남자가 보입니다.
얼핏 들은 바로는 소설을 쓰고있는 미국인이라더군요.
그의 이름은 ’길 팬더’. 저는 그를 ‘길’이라고 부릅니다.
- 현실과 이상 : 대척에서 공존으로
길은 할리우드에서 상업적으로 성공한 극작가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곧 행복을 향한 가도라고는 믿지 않습니다.
주위의 만류와 냉랭한 시선에도, 그가 소설가라는 꿈을 내려놓기란 대단히 어려운가 봅니다.
우리는 살아가며 수많은 ‘가면’을 씁니다.
어떤 것은 타인이 씌워준 것들이고, 또 어떤 것은 스스로 빚어낸 가면들이지요.
그러나 가면이 많아진다고 해서 반드시 ‘아름다움’이나 ‘성공’으로 귀결되진 않습니다.
선택지가 늘어날수록 오히려 혼란과 번잡함이 커질 때도 있습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솔직함'을 요구하지만, 민낯을 드러내면 현실과 동떨어진 이상주의자로 낙인 찍히기 쉽상이거든요.
길은 ‘참된 예술’을 갈망합니다.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창조하는 모든 것이 ‘예술’이라면, 그가 타협 속에서 써 내려간 대본도 분명 예술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타인이 부여한 평가일 뿐, 그의 내면 깊은 블만족의 뿌리는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외면적 충족 (상업성)과 내면적 만족 (성취감) 사이에서 방황하는 길의 모습은 곧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무엇을 ‘진실’이라 부르고, 어디까지를 ‘진심’이라 좇아야 할까요?
참된 나의 모습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일까요?
현실과 이상의 괴리가 커질수록 삶은 불안정해집니다.
마치 발 딛는 땅이 갈라져 두 다리가 점차 벌어지며 고통이 스미는 듯 합니다.
그렇다고 현실만이 나의 전부이고, 이상은 허상이라 단정 지을 수 있을까요?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현실과 이상은 어쩌면 모두 ’시간’이라는 동일한 지평 위에 놓여있는 가치입니다.
현실은 지금까지 내가 최선이라 믿고 선택해온 모든 순간들이 융합되어 만든 작품이고, 이상 또한 과거의 나 - 행동과 숙고의 흔적- 없이는 홀로 탄생할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현실과 이상의 경계를 구획하여 서로를 적대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 두 영역 위에 서있는 ‘나’를 이해하는 일입니다.
만약 어느 한쪽에만 치우친다면, 우리는 스스로를 반으로 가른 채, 현실과 이상이 반쪽씩 나를 ‘소유’하게 만들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중심이자 기준이 된다면, 현실과 이상은 그저 내가 서 있는 두 개의 땅일 뿐입니다.
"정확히 맞아요. 두 세계에 살고 있는거죠. 이상할 거 없는데요?"
2. 과거과 현재 : 황금시대 사고
길은 1920년대 비 내리는 파리를 동경합니다.
한 번도 살아본 적 없고, 앞으로도 살아볼 수 없는 그 시기에 왜 이토록 매료되는 걸까요?
혹시 파리의 비가 유난히 아름답게 내리기 때문일까요?
영화가 35분쯤 지나갈 때, 그의 입에서 ‘두려움’이라는 단어가 흘러나옵니다.
그의 현실은 지나치게 규격화되어있고, 예술적 욕구는 열량 없는 창작 활동으로 잠시 허기를 달래는 수준에 그칩니다.
마치 지금의 우리와도 닮았습니다.
‘잘난 인생’이라는 완성된 설계도 속으로 들어가야만 올바른 삶이라 여겨지는 시대.
그렇기에 정형화된 현재에서, 그가 희구하는 ‘진정한 예술’은 늘 오답이 됩니다.
그는 과거의 ‘황금시대’에서만 현실이 예술로 승화되는 유토피아가 가능하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그는 깨닫습니다.
1920년대의 아드리아나는 벨에포크(1890년대)를, 그 시대 사람들은 또 르네상스를 동경하고 있었다는 사실을요.
황금시대란 언제나 지나치게 ‘상대적’이라는 진리입니다.
인간은 모두 시간 위를 흘러갑니다.
생과 사가 필연인 우리에게 시간은 결코 소유물이 될 수 없습니다.
다만 다리 사이로 스쳐 흐르는 물결처럼, 잠시 발을 담글 뿐입니다.
현재가 불만스러운 게 아니라, 불만스러운 ‘나’가 현재 속에 놓여 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미래는 불확실하지만, 과거는 변하지 않는 듯 보입니다.
정체된 그림처럼 안정적이고 확실한 무언가로 느껴지기에, 우리는 과거를 그리워합니다.
하지만 영화의 결말에서 우리는 결론에 닿습니다.
바로 지금 이 순간이야말로, 훗날 누군가가 그토록 갈망할 ‘과거이자 영광’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요.
“여기 머물면 여기가 현재가 돼요. 그럼 또 다른 시대를 동경하겠죠. 상상속의 황금시대. 현재란 그런거예요. 늘 불만스럽죠. 삶이 원래 그러니까.”
![]() |
결국, 황금시대는 과거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지금 이곳에서 만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이곳에서 여러분의 ‘황금시대’를 시작할 용기가 있으신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