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세계를 넓히는 인터뷰집 3권
낯선 목소리가 열어 보이는 새로운 시선들
대화는 때때로 우리의 세계를 흔듭니다. 대화하는 동안 우리는 ‘나’의 세계를 잠시 벗어나 ‘너’의 세계를 들여다보죠. 시선을 자신에게서 거두고, 상대의 고유한 경험과 감정, 생각에 귀 기울입니다. 그러다 보면 경험해보지 못한 누군가의 일상을 상상하게 되고, 그의 관점에서 주변을 다시 바라보기도 합니다.
이번 글에서는 타인을 향한 호기심으로 깊이 있는 대화를 이어가는 인터뷰집 세 권을 소개합니다. 이들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익숙한 세계의 풍경이 조금 다르게 보일지도 모릅니다. 그 작은 변화가 독자분들의 시선을 넓히고, 마음 한편에 오래 머무는 울림이 되길 바랍니다.
평범한 사람들과 나눈 특별한 대화
정성은, 『궁금한 건 당신』

최근에 낯선 사람과 대화해 본 경험 있으신가요? 평소 수많은 사람을 스쳐 지나가도, 정작 깊이 있는 대화로 이어지는 경우는 드뭅니다. 『궁금한 건 당신』은 바로 그런 사람들과의 대화를 담아냅니다. 저자는 미디어에서 주목하는 유명인이 아닌, 우리 주변의 평범한 사람들에게 대화를 청하죠. 잠깐 사이 깊은 고충을 나누게 된 택시기사, 앱을 통해 연결된 청소 전문가, 뉴욕 여행 중 만난 한인 세탁소 사장, 심지어는 여행지 숙소 옆방에 머무른 투숙객처럼요.
평소라면 이런 사람들은 대개 평면적으로 느껴질 수 있습니다. 감정적 교류 없이 필요한 말만 주고받다 대화가 금방 끝나버리기 때문이죠. 그런데 저자는 이들에게 한 걸음 더 다가가 깊고 내밀한 대화를 끌어냅니다. 사랑하는 이에 대한 마음부터 자신이 열정을 쏟아온 일,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는 상처까지 이야기 나누죠. 저자는 드라마 같은 이야기에 놀라기도 하고, 전혀 예상치 못한 이야기 앞에서 조심스레 반응하기도 합니다. 그들의 대화를 읽다 보면 스쳐 지나가는 수많은 사람들 또한 저마다 굴곡지고 입체적인 서사를 지니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런 이야기 속에서 담담하게 건넨 말들이 뜻밖의 울림을 남기며 저자의 관점을 흔들기도 합니다. 저자는 부모님 세대의 사람들과 이야기하며 그들의 마음을 조금은 헤아리게 되고, 동아리 후배와의 대화에서는 스스로 경험한 ‘포기’의 의미를 다시 써보게 되죠. 장애인을 가족으로 둔 소개팅남이나 누구에게도 커밍아웃하지 않은 친구와 대화를 나누면서는 자신의 편견과 위치를 되돌아보기도 합니다. 저자가 대화 속에서 겪는 작은 흔들림을 따라가다 보면, 주변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 또한 조금씩 깊어지는 듯합니다.
“한때는 이야기를 지어내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집 밖을 나가니 사람들이 주옥같은 말을 하고 있었다. 그것들을 받아적으며 세상이 더욱 궁금해졌다. 사랑하지 않으면, 궁금한 일조차 없을지 모른다. 이 책이 사랑이 이루어지는 공간이길 바란다. 그럴수록 우리는 서로를 더욱 궁금해할 테니.” _정성은, 궁금한 건 당신
대화를 통해 비로소 드러난 ‘일’들
경향신문 젠더기획팀, 『우리가 명함이 없지 일을 안 했냐』

명함을 처음 받았을 때의 뿌듯함을 떠올려봅니다. 명함 한 장에는 내가 하는 일과 그에 대한 자부심이 스며 있기 마련이죠. 하지만 평생 일하고도 명함 한 장 가져보지 못한 이들이 있습니다. 일찍이 학교 대신 생계전선에 뛰어들고 결혼 이후로는 돌봄과 가사노동까지 도맡아 왔지만, 정작 ‘일하는 사람’으로 대우받지 못했던 여성 노동자들입니다. 『우리가 명함이 없지 일을 안 했냐』는 굴곡진 현대사를 지나며 바깥일과 집안일을 모두 떠안았던 ‘큰언니’들의 삶을 조명합니다.
그 모습은 매우 다양합니다. 시아버지와 남편을 간병하며 생계를 책임져 온 진정한 가장, 수많은 직업을 거치는 동안에도 '집사람'이라는 호칭으로만 불렸던 어머니, 남성 농민의 이미지로 대표되는 농촌에서 평생을 함께 일해온 농부, 그리고 여전히 장래 희망을 품고 새로운 가능성을 탐색하는 노년의 일꾼까지. 이 책은 각각의 인터뷰를 통해 이들의 목소리를 생생하게 전하는 동시에, 통계 자료를 바탕으로 그들의 삶을 사회 구조 속에서 다시 짚어냅니다. 그동안 잘 드러나지 않았던 여성 노동자의 현실을 입체적으로 들여다볼 수 있게 하죠.
인터뷰이들 중 상당수는 이번 대화를 통해 자신이 해온 일의 가치를 처음 느끼게 됐다고 말합니다. 여성의 일을 가볍게 여겨온 사회적 시선을 오랫동안 내면화하여, 스스로도 그 가치를 제대로 인정하지 못했던 것이죠. 하지만 자신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어주는 누군가가 “정말 대단한 일을 해오셨다”라고 말할 때, 이들은 비로소 자신이 해온 노동의 의미를 새롭게 되짚어보게 됐습니다. 책은 이러한 변화를 독자에게도 경험하게 하며, 명함에 담기지 않았던 수많은 '일'의 무게와 가치를 다시 바라보게 합니다.
“우리는 평생 일한 여성들에게 명함을 찾아주고 싶었다. 언제나 N잡러였지만 ‘집사람’이라 불린 여성들, 이름보다 누구의 아내나 엄마로 불려온 여성들, 고단한 삶 속에서도 일의 기쁨을 느끼며 ‘진짜 가장은 나’라는 자부심으로 살아온 여성들, 남존여비의 시대에 태어나 페미니즘 시대를 지켜보고 있는 여성들.” _경향신문 젠더기획팀, 우리가 명함이 없지 일을 안 했냐
누군가와의 대화가 열어준 세계
김지우, 『우리의 활보는 사치가 아니야』

앞길이 막막한 순간, 그 길을 먼저 지나 본 사람의 짧은 말 한마디가 마음을 환히 밝힐 때가 있습니다. 『우리의 활보는 사치가 아니야』는 그런 대화의 힘을 담아냅니다. 청년 여성 장애인인 저자는 자신이 겪었던 고난과 외로움이 ‘휠체어 탄 언니’와의 대화로 단숨에 가벼워졌던 경험을 떠올리며, 더 많은 이들이 그런 순간을 누리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 책을 썼습니다. 10대부터 60대까지 다양한 세대의 여성 장애인을 만나, 운동과 여행 같은 일상적인 권리부터 사랑과 출산, 더 나아가 누구나 맞이할 노년기까지 삶의 여러 지점을 솔직하게 이야기합니다.
알 수 없는 미래는 누구에게나 불안하지만, 여성 장애인이라는 교차된 정체성을 지닌 이들에게 그 불안은 더욱 크게 다가옵니다. 다수자는 주변이나 미디어에서 참고할 수 있는 삶의 사례를 쉽게 찾을 수 있지만, 소수자는 비슷한 경험을 가진 이의 이야기를 접하기가 상대적으로 어렵죠. 저자와 인터뷰이들이 '언니와의 대화'의 중요성을 한 목소리로 강조하며, 자신보다 어린 상대에게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손을 내밀겠다고 말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이들의 대화가 당사자에게는 스스로의 가능성을 발견하고 문제를 풀어갈 힘이 되어 준다면, 비당사자에게는 그동안 충분히 생각해 보지 못했던 삶의 조건과 경험을 인식하게 하는 계기가 될 수 있습니다. 이들의 솔직하고 유쾌한 이야기는 불행을 전제로 한 전형화된 장애인 이미지를 깨뜨리며, 장애인이라는 집단 안에도 서로 다른 수많은 개인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나아가 그들의 구체적인 경험을 통해 장애와 관련된 사회적·윤리적 쟁점을 마주하게 하고,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와 일상을 다른 시선에서 바라보게 합니다.
“휠체어 탄 언니들을 만나고 나서 많은 것이 바뀌었다. 내 고난과 외로움은 지독히 독특하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것이 아니라, 많은 언니가 경험한 대수롭지 않은 일이거나 참고문헌을 따라 마주할 수 있는 일이 되었다. 휠체어를 탄 채로 어른이 된다는 것은 순응이나 실패가 아니라, 바퀴의 동력으로 더 멀리 구르는 삶을 살게 된다는 말이었다. 장애와 함께 사는 미래는 불투명한 미지의 시간이 아니라, 이미 수많은 갈래로 뻗어 나간 언니들이 있는 실제의 시간이기도 했다.” _김지우, 우리의 활보는 사치가 아니야
세 권의 인터뷰집은 서로 다른 목소리를 담고 있지만, 결국 한 가지 사실을 전합니다. 타인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잠시 그의 자리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순간, 우리가 보지 못했던 삶의 결이 비로소 드러난다는 점이죠. 익숙한 풍경을 낯설게 바라보는 그 사이, 우리의 세계는 조용히 확장됩니다. 오늘 만난 이야기들이 타인에게 한 걸음 더 다가가 말을 거는 용기로 이어지길 바랍니다. 그렇게 이어지는 대화 속에서 또 다른 세계가 천천히 열릴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