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정받지 못한 존재들
관계로 규정되는 자아와 비대칭적 시선에 대하여
케이팝 혼성 그룹 '올데이 프로젝트'의 멤버 타잔이 드레드(Dreadlocks) 헤어로 무대에 올라 논란이 된 적이 있습니다. 흔히 레게 머리로 불리는 드레드 헤어는 케이팝에서 꾸준히 목격할 수 있는 '스타일' 중 하나이지만, 역사적으로 흑인의 역사와 정체성을 상징하며, 혐오와 차별에 저항하는 수단으로 쓰이기도 했습니다. 흑인들에게 생존의 언어였던 힙합, R&B, 아프로 등의 장르와 각종 슬랭은 케이팝의 세계에서 그저 독특한 컨셉이자 세련된 장르, 힙한 표현이 됩니다. 하지만 단지 멋으로 전유하기에 이들의 문화는 오랜 차별과 억압의 역사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드레드 헤어를 하고 힙합을 한다는 이유로 여전히 차별받는 이들의 현실과 팝 산업 안에서 흑인 아티스트에게 돌아가는 몫을 고려한다면, 문화의 주체와 맥락에 대한 사유 없이 쉽게 소비될 수 없습니다.
왜 끊임없이 흑인의 문화를 차용하면서도 흑인이라는 주체성은 지울까요? 이 문제는 개인의 무지보다는 오래된 구조의 문제로 볼 수 있습니다. 정신과 의사이자 철학자인 프란츠 파농(Frantz Fanon)에 따르면, 흑인은 백인의 시선을 통해서만 '흑인'으로 규정됩니다. 흑인은 백인과의 관계 속에서만 정체성을 부여받는 반면, 백인은 그 관계와 무관하게 이미 완전한 개인으로 존재합니다. 관계는 있지만 서로를 동등하게 인정하는 '상호성'은 부재합니다. 바로 이 비대칭이 문화는 가져오면서 주체는 지우는 일을 가능하게 합니다. 인정받지 못한 존재의 것은 맥락 없이 소비될 수 있고, 인정을 필요로 하지 않는 존재는 그 소비의 기준이 됩니다.
이번 아티클은 이 비대칭적 관계의 구조를 동시대 예술 작품을 통해 살펴봅니다. 이들은 각각 다른 방식으로 같은 질문을 던집니다. 관계 속에서 정체성이 만들어진다면, 또 우리가 타자를 바라보고 규정하는 방식이 그저 우리와의 관계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그 정체성이 타자를 온전히 설명한다고 할 수 있을까요?
저는 사실 흑인입니다

미국 작가 에이드리언 파이퍼(Adrian Piper, 1948-)는 피부색이 밝아 백인으로 오인되는 경우가 많았습다. 파티나 모임에서 누군가 무심코 인종차별적 발언을 할 때마다, 직접 반박하는 대신 문구가 적힌 카드를 건넵니다.
"저는 흑인입니다. 방금 하신 말씀이 불편하게 느껴져 이 카드를 드립니다."
카드를 받은 사람은 조금 전까지 백인으로 알고 있던 상대가 알고 보니 흑인이라는 사실에 혼란에 빠집니다. 두 사람은 처음부터 같은 한 사람이었지만, 카드를 받는 순간 관계의 맥락이 전복됩니다. 인종차별적 사고를 하는 사람에게 흑인과 백인은 동등한 개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파이퍼의 정체성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카드를 받은 관객이 그를 어떻게 바라보고 받아들이고 있었는지가 드러났을 뿐입니다. 정체성이란 한 사람의 내부에 고정된 무언가가 아니라, 외부의 시선과 관계가 시작되는 순간 부여되는 것임을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파농이 말한 것처럼, 흑인은 백인의 시선 속에서 비로소 '흑인'이 됩니다. 파이퍼의 카드는 그 구조를 일상의 장면으로 호출합니다. 카드를 받아든 사람은 비로소 자신이 이미 오래전부터 그 구조 안에 있었음을 직면하게 됩니다.
흰 배경 위의 검은 글자

"나는 선명한 흰 배경에 던져질 때 가장 유색인임을 느낀다."
미국 작가 조라 닐 허스턴이 남긴 이 문장을 글렌 라이곤(Glenn Ligon, 1960-)은 작품의 제목이자 내용으로 삼습니다. 흰 캔버스 위에 같은 문장을 아래로 반복해 써내려 갈수록, 스텐실과 오일스틱이 서로 엉키며 글자는 점점 뭉개지고 번져 읽을 수 없게 됩니다.
배경은 처음과 같은 흰 캔버스입니다. 그러나 그 위에 반복되는 검은 글자는, 바로 그 흰 배경 때문에 '검다'는 사실이 더욱 도드라집니다. 흰 배경이 존재한다는 이유만으로 글자는 '검은 것'으로 호명됩니다. 마치 백인과의 관계 속에서만 '흑인'으로 가시화되고, 그 관계 안에서 끊임없이 자신을 증명해야 했던 흑인처럼요.

여기서 라이곤이 포착한 것은 반복 자체가 ‘소거’라는 역설입니다. 흑인의 목소리는 끊임없이 호명되고 반복되지만, 그 반복이 쌓일수록 개별 글자는 사라지고 검은 덩어리만 남습니다. 수많은 정체성을 지닌 한 개인은 '흑인'이라는 단일 범주 안에 포획되는 것을 은유하죠. 전 세계에서 한국계 인물들이 다양한 업적을 세워도, 그저 최초의 아시안으로만 소개되는 것 처럼요. 라이곤은 같은 문장의 반복으로 이러한 구조가 작동하는 방식 자체를 가시화합니다.
검게, 더 검게

사진과 영화의 기술적 토대는 처음부터 밝은 피부를 전제로 개발되었습니다. 코닥 필름의 색 보정 기준이 특정 피부색을 중심에 두고 설계되었듯, 초기 조명 기술 역시 어두운 피부를 정확히 담는 데는 최적화되지 않았습니다. 유색인종의 피부는 언제나 보정이 필요한 '예외'로 취급되었고, 기술의 표준 자체가 이미 특정 신체를 중심에 두고 있었습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 출신의 자넬레 무홀리(Zanele Muholi, 1972-)는 자신의 모습을 직접 카메라 앞에 세우고, 의도적으로 노출을 낮춰 피부를 가장 어두운 상태로 재현합니다. 그 배제의 역사를 보정하거나 은폐하는 대신, 과하게 드러내죠. 외부가 부여한 '흑인성'을 스스로 극단까지 수행함으로써, 그것이 외부의 언어였음을 역으로 증명하는 것입니다.

앞선 두 작품이 비대칭적 시선의 위계를 폭로하는 데 집중했다면, 무홀리는 그 구조 안에서 자기 자신의 시선을 되찾습니다. 타자의 언어로 이름 붙여진 정체성을 거부하고, 스스로를 한 개인으로 바라보는 행위, 즉 파농이 말한 "유색인을 그 자신으로부터 해방시키는" 실천이 여기서 가장 육체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파농의 분석은 백인과 흑인의 관계를 다루지만, 아시안인 우리도 그 구조 안에서 예외가 아닙니다. 동아시아의 문화가 경계 없이 '아시아 문화'로 뭉뚱그려지는 오리엔탈리즘의 대상인 동시에, 블랙핑크가 뮤직비디오에서 힌두교의 상징을 아무렇지 않게 차용하는 것 처럼 타자화의 주체이기도 합니다. 타자화는 우리에게 행해지기도 하고, 우리가 행하기도 합니다. 이 이중성이 불편한 이유는, 피해자라는 위치가 가해의 면죄부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케이팝이 흑인 문화를 세련되고 멋진 것으로 소비하는 동안, 흑인이라는 존재는 여전히 그 산업의 주변부에 머뭅니다. 역사와 고통은 지워지. 이것은 케이팝만의 문제가 아니라, 인정하지 않아도 되는 존재의 것은 맥락 없이 가져올 수 있다는, 파농이 분석한 바로 그 구조가 작동하는 방식입니다.
파이퍼의 카드를 받아든 사람은 자신이 이미 그 구조 안에 있었다는 사실을 그제야 직면합니다. 라이곤의 번진 글자는 반복될수록 개인을 지운다는 것을, 무홀리의 검은 얼굴은 타자의 언어로 이름 붙여진 정체성을 스스로 되가져올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죠.
그렇다면 우리에게 스스로에게 질문해볼 수 있겠습니다. 지금 내가 소비하는 문화가 누구의 역사 위에 서 있는가? 또 그것을 멋있다고 느끼는 내 감각이 어디서 만들어졌는가? 타자를 인정하는 일은 그 물음을 회피하지 않는 것에서 시작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