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으로 돌아가는 예술을 위하여

예술은 왜 대중으로부터 괴리 되었는가?

일상으로 돌아가는 예술을 위하여
복합문화공간 '베타클럽'의 전경

*이 글은 복합문화공간 ‘베타클럽’에서 전시를 기획 중인 필자의 현장 경험을 바탕으로 쓰였다.

“재미없으니까 사람들이 안 오는 거야.”

한 지인의 이 말은 미술 전시에 대한 냉소일 수도 있지만, 동시대 예술의 구조적 문제를 정직하게 드러낸 통찰이기도 하다. 미술은 왜 점점 사람들에게서 멀어졌는가? 그리고 다시, 어떻게 사람 곁으로 돌아올 수 있을까?

 

미술을 어렵게 만든 것은 누구인가

 

전시장을 찾는 사람들 대부분은 작가의 지인들이다. 전시 이후 작가에게 남는 것은 축하가 아니라, 묘한 허탈감이다. 이는 나 개인의 경험이라기보다는 많은 작가와 기획자들이 공유하고 있는 공통된 현실이다. 우리는 작품보다 관람객을 먼저 걱정하고, 전시의 메시지보다 SNS 노출 빈도를 먼저 고민하게 되었다.

그 중심에는 현대미술이 만든 장벽이 있다. ‘이해해야 하는 예술’, ‘읽어야만 감상 가능한 작업’이 반복되며, 미술은 점점 더 설명 중심, 해석 중심의 구조로 고착되었다. 그 결과 대중은 전시장에 들어서자마자 스스로를 검열하며 “내가 이걸 모르니, 이건 내 것이 아니다”라고 결론짓는다. 이때부터 미술은 일상에서 이탈한다.

또한 현대미술은 고가의 거래와 독점적 향유로 대중과 괴리되어 있다. 일부 부유층과 컬렉터만이 주요 미술 작품을 소유하고, 유수의 아트페어가 이들의 손에 좌우되는 현실은 미술을 ‘그들만의 리그’로 만든다. 미술은 인간의 보편적 정서와 사회적 담론을 담는 매체임에도, 이처럼 제한된 소비 구조는 생태계의 다양성과 지속 가능성을 위협한다.

 

공공지원에 기대는 생태계의 한계

 

시장성 없이 고립된 예술은 자연히 공공지원에 의존하게 된다. 각종 지원금, 공공미술 프로젝트, 행정 보고서가 창작보다 앞서는 현실은 많은 예술가의 에너지를 분산시키고 있다. 예술이 사회적 기능을 담당할 수는 있지만, 그것이 자생적 창작과 생태계를 대체할 수는 없다.

더 큰 문제는 대중의 미술 소비 자체가 구조적으로 막혀 있다는 점이다. 음악은 스트리밍으로, 영화는 OTT로 확장되었지만, 미술은 여전히 특정 공간에 ‘찾아가야만’ 감상할 수 있는 장르로 남아 있다. 동시에, 감상법조차 별도의 ‘학습’을 요구한다. 이 높은 문턱 앞에서 대부분의 관객은 미술을 외면한다.

 

재미는 미술의 적이 아니다

 

김민희 작가의 LIVE ZERO 프로젝트, GENTLE MONSTER

이제 미술은 ‘재미’와 ‘오락성’을 경계의 대상이 아니라, 중요한 키워드로 삼아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오락성은 예술의 가벼움을 뜻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예술이 대중과 접점을 만들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장치다. 아트토이, 프린팅 에디션, 아트 굿즈, NFT 등은 이 같은 접근성 확보의 실험적 사례다. 조형성과 대중성의 경계에서 새로운 미술 소비 방식이 나타났고, 이는 미술의 범주와 영향력을 확장시키고 있다.

국내 아이웨어 브랜드 젠틀몬스터는 예술과 일상의 경계를 허무는 시도로 주목받고 있다. 단순히 제품을 진열하는 쇼룸을 넘어서, 예술적 경험이 펼쳐지는 전시 공간으로 재구성하며 브랜드 고유의 미학을 구축해 나가고 있다. 이러한 움직임의 일환으로 진행된 LIVE ZERO 프로젝트는 회화 작가 김민희와의 협업을 통해 더욱 확장된 예술적 실험을 선보였다. 젠틀몬스터의 플래그십  스토어인 ‘하우스 도산’ 1층이 작가의 공개 작업실로 탈바꿈 되었고, 김민희 작가는 한 달간 공간에 머물며 대형 회화 작업을 완성해 나갔다. 그 과정은 관람객에게 실시간으로 노출되었으며, 유튜브 채널을 통해 생중계되기도 했다. 프로젝트 종료 후에는 완성된 작품이 약 3주간 같은 공간에서 전시되며 작업의 총체적 결과물이 대중과 마주했다.

LIVE ZERO는 예술 창작의 과정을 ‘전시’의 형식으로 구현함으로써 예술의 의미와 경험을 새롭게 사유하게 만든다. 특히 이 프로젝트는 대중이 단순히 완성된 작품을 감상하는 데에서 나아가, 창작의 긴 호흡과 감정의 결을 실시간으로 체험할 수 있게 함으로써 미술과의 관계를 더욱 밀접하게 만든다. 관람객은 작가의 손끝에서 점차 형태를 갖춰가는 작품을 바라보며 예술을 동시대적 리듬 속에서 경험하게 되고, 그 과정 자체에서 ‘재미’라는 감각적 반응을 끌어낸다.

 

전시, ‘일상’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미술의 일상적 소비를 이끌어낼 플랫폼으로 내가 주목한 방식은 ‘갤러리 카페’이다. 전시가 반드시 백색 큐브(white cube) 안에 있을 필요는 없다. 오히려 커피를 마시며 자연스럽게 작품을 감상하는 공간은 미술의 권위성을 낮추고, 일상성과 감상의 접점을 만들어낸다. 이와 같은 ‘비의례적 감상’은 작품을 소유하지 않더라도 예술을 향유할 수 있는 새로운 소비 문화를 창출한다.

이러한 ‘대안적 소비’는 단순한 보완책이 아닌, 미술 생태계를 재구성하는 핵심 키워드로 떠오른다. 대안적 소비란 미술이 전통적인 거래 이외의 방식으로 소비되고, 다양한 삶의 장면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말한다. 이때 중요한 것은 소비의 질과 접점이다. 감상과 소통, 공감과 해석이 가능한 방식으로 예술이 유통될 때, 미술은 다시 살아 있는 언어로 기능하게 된다.

런던의 ‘The Photographers’ Gallery Café’, 도쿄의 ‘Daikanyama T-Site’,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The Laundry SF’ 같은 공간들은 예술을 ‘생활의 일부’로 만든 대표적 사례다. 이들 공간에서는 전시가 관람보다 대화에 가깝고, 감상이 아닌 체류 경험으로 확장된다.

필자는 경기도 산본에 위치한 복합문화공간 ‘베타클럽’에서 이와 같은 시도를 실천 중이다. 예술이 다시 사람 곁으로 다가가기 위해선, 먼저 사람이 있는 장소로 예술이 이동해야 한다는 믿음 때문이다.

미술은 본래 사람 곁에 있었다. 동굴 벽화에서 거리의 그래피티까지, 예술은 삶과 동떨어진 적이 없었다. 오늘날 미술이 사람들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만들어온 난해함과 권위의 껍질을 벗어야 한다.

‘재미’는 결코 예술을 가볍게 만들지 않는다. 오히려 예술을 더 많은 사람들의 삶 속으로 스며들게 하는 강력한 동력이다. 예술이 사회와 다시 연결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 회복은, ‘이해받는 예술’보다 ‘즐겨지는 예술’에서 시작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