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KEA 뮤즈 부부의 세계
동등한 예술가, Karin & Carl Larsson

알고 보면 참 귀한데, 때론 누군가(또는 무언가)에 가리어져 존재감을 드러내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이것은 비단 당사자의 서운함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 사람의 가치를 놓친 모두의 손실이 된다.
예술가 중에도 그런 경우가 많다. 못지않은 실력과 가치를 품고 있었지만 시대와 상황에 가리어진다.
행복했지만, 남편에 비해 아내는 상대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 부부가 있다. 그동안 잘 보이지 않던 한 사람에 시선을 돌려보자. 아마 두 배로 넓고 깊은 예술 세계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절망의 동굴에 사는 소년
19세기 중반, 스웨덴 스톡홀름의 감라 스탄(Gamla Stan)에 한 남자아이가 살고 있었다. 아이는 불우했다. 늘 술에 찌들어 폭력을 일삼는 아버지는 가난과 불행의 근원이었다. 어느 것 하나 진득이 하지 못하던 그는 결국 어머니와도 갈라섰다. 하지만 어머니 혼자 아이들을 키우며 살아가는 삶 또한 평탄할 리 없었다. 수많은 이웃이 범죄자였고 콜레라를 옮기는 쥐들은 침대 매트리스를 오갔다. 아이에게 집과 가족은 곧 절망의 동굴이었다.
세 개의 빛
빈민층 자녀들을 위한 학교에 다니던 소년의 유일한 기쁨은 그림 그리기였다. 실력 또한 뛰어났다. 그 재주는 야콥센 선생님의 눈에도 띄었다. 13살. 지난했던 인생에 첫 번째 빛이 비쳤다. 선생님의 도움으로 스웨덴 왕립 예술 아카데미에 입학하게 된 것이다.
소년은 성장하여 스스로 가족을 부양할 만큼의 돈을 버는 화가이자, 삽화가이자, 디자이너가 되었다. 그리고 세상을 떠난 지 100년이 넘은 지금까지 스웨덴의 ‘국민 화가’로 불린다. 바로 ‘칼 라르손(Carl Larsson)’의 이야기다.
칼 인생의 두 번째 빛은 프랑스의 작은 마을인 바르비종(Barbizon)에서 빛났다. 훗날 여덟 아이를 낳고(한 아이는 세상을 일찍 떠났다.) 행복한 결혼 생활을 이어간 아내 카린 베르거(Karin Bergöö)를 만난 것이다. 열네 살부터 스웨덴 공예학교에서 판화, 수채화 등 다양한 미술을 공부한 그녀는 부유한 환경에서 자란 예술가였다. 하지만 당시 여성들의 사회활동은 대부분 제한되었다. 체계적인 교육을 받은 카린도 예외가 되긴 어려웠다.

그녀는 결국 예술계와 거리를 두게 되었다. 하지만 다행히 사랑하는 남편과 일곱 아이들, 그리고 그들만의 집 ‘릴라 히트나스*(Lilla Hyttnäs, ‘작은 용광로’라는 의미)’가 있었다. 릴라 히트나스라는 귀엽고도 열정적인(?) 별명을 가진 이 집은 두 사람이 결혼할 당시 카린의 부모님이 준 선물이었다. 순드보른(Sundborn)이라는 지역에 위치한 이 소박한 집은 칼 인생의 세 번째 빛이 되었다. 그곳에서의 삶과 가족을 화폭에 담은 작품들을 통해 훗날 국민 화가로까지 불리게 되었기 때문이다.





수많은 작품 속에 아내와 아이들의 평화롭고 행복한 모습이 담겼다. 특히 부부가 함께 고치고 만들어간 집은 중요한 배경이었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지난 후, 밝고 편안하면서도 행복감이 느껴지는 칼의 그림들은 세계적인 리빙 브랜드 ‘이케아(IKEA)’의 디자인적 뿌리가 되었다.

이미 널리 알려진 이케아의 칼 라르손에 대한 애정과 존경은 2016년 ‘셀스카프(Säellskap)’ 컬렉션을 통해 헌정되었을 정도다. 21세기, 머나먼 한국에 살며 하나쯤 이케아 제품을 사용중일 우리도 그의 작품세계를 누리며 사는 셈이다.

* 공식 명칭은 ‘Carl Larsson-gården’으로, ‘칼 라르손 농장’이라는 의미이다. 스웨덴을 여행하는 사람들의 인기 방문지다. 따뜻한 채도의 붉은 외벽과 지붕, 집 주변의 정원과 자작나무들은 매우 동화적이다. 특히, 집 안은 칼의 그림들 속에 등장한 인테리어를 바탕으로 재현되어 있어 백미로 통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릴라 히트나스는 칼 라르손의 예술 인생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매개체다.
빛에 가리어진 아내, 카린
하지만 이쯤 하여 시각을 조금 옆으로 돌려볼 필요가 있다. 남편 칼에 비해 상당 부분 가리어진 존재, 예술가 카린 라르손을 들여다보기 위해서다.
칼의 그림들에 등장하는 가구와 소품, 아이들의 옷 등 대부분의 것들은 카린의 손에서 탄생했다. 직접 배틀을 짜고 바느질을 했으며, 재봉틀을 돌렸다. 물론, 한 가정의 공간을 두고 자로 댄 듯 역할을 나눌 순 없고, 의미도 없다. 나아가 누군가에겐 관심을 갈구하는 유치한 투정으로 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분명한 건 이케아가 받았다는 디자인 영감은, 전달자로서의 역할이 더 컸던 칼보다 카린으로부터 더욱 많이 기인했다는 것이다. 유명 작가의 아내나 조력자 정도가 아닌, 독립된 예술가로서 다시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자기만의 집
1900년대 초반. 스웨덴 디자인의 스타일은 그곳의 날씨처럼 어둡고 무거웠다. 그런데 이러한 시류와 상관없이 카린은 자신만의 감각으로 스타일을 창조했다. 원색의 패브릭 원단, 밝으면서도 자연스러운 색감, 경쾌하고 기하학적인 패턴, 다양한 컬러 조합의 묘미로 공간을 채웠다. 그리고 그 새로운 스타일은 칼의 그림을 통해 이케아를 포함한 스칸디나비아 디자인에 영향을 주었다. 유의미한 전환점이었다.
한편 달라르나(Dalarna) 지방의 전통 디자인에도 관심이 많던 카린은 그곳의 직조법을 직접 배우기도 했다. 특유의 다채로운 색채는 우리가 이케아를 떠올리면 그려지는 이미지의 한 부분을 채웠다. 카린의 스타일에 바탕이 된 또 하나의 중요한 배경이다.
카린의 주도 하에 완성된 공간적 세계관의 마지막 화룡정점은 식물이었다. 이 또한 이케아를 포함한 전반적인 스칸디나비아 디자인 스타일에 영향을 끼쳤다. 친숙한 토마토, 시금치 등과 더불어 이국적인 형태의 아프리카 꽃을 키우기도 했다. 튤립, 백합, 수선화 등도 함께 자랐다. 창틀과 정원을 가득 메웠다. 이러한 식물들의 어울림은 이케아의 패브릭 패턴으로도 자주 볼 수 있다.

함께 일군 삶, 함께 한 예술
실제로 스웨덴 외의 나라에서는 카린의 예술 세계에 대해 알려진 바가 상대적으로 적다. 그러나 이처럼 시선을 살짝 돌리면, 이 부부의 예술 세계와 가족의 삶 전체를 더욱 풍성하게 이해할 수 있다. 누가 이것을 하고, 누가 저것을 만들었다는 팩트 체크를 넘어, 동등한 두 예술가가 함께 쌓아 두 배로 넓어진 세계가 보일 것이다.
칼 라르손은 자신의 최고 업적으로 ‘한 겨울의 제물(Midvinterblot)’이라는 북유럽 신화 배경의 대형 작품을 꼽는다. 하지만 1차 세계 대전 당시 참전 군인들이 성경책과 함께 칼의 그림을 품에 넣고 있었다고 할 만큼, 그가 그린 집과 가족은 모두의 마음 안에 그림 그 이상으로 자리했다. 칼 본인에게는 미안할 수 있지만, 이는 부정할 수 없다.
그리고 그 가치는 카린의 예술이 함께했기에 생성 가능했다. 카린이 (주로) 만들고, 칼이 (주로) 그려 ‘함께’ 전하는 집과 가족의 의미. 앞으로도 수많은 브랜드와 예술가의 뮤즈로 남을 것 같다. 물론, 릴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