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를 울게 만든 캐릭터들

대학로 대표 오열극 뮤지컬 <홍련> 그리고 연극 <오펀스>

우리를 울게 만든 캐릭터들
이미지 출처 : 뮤지컬 홍련 공식 계정

혹시 ‘오열극’이라는 단어를 들어보신 적 있으신가요? 관객을 오열하게 하는, 다시 말해 목 놓아 울게 만드는 극을 뜻하는 용어인데요. 장르와 소재를 막론하고 객석을 자주 울리는 작품에 붙이는 수식어입니다.

사실 저를 처음 울게 만든 건 오열극으로 자주 분류되는 작품은 아니었습니다. 이전 아티클에서도 다룬 적 있는 연극 〈어나더 컨트리〉였거든요. 참 이상하죠. 그날 처음 관람한 것도 아니고, 이미 열 번 넘게 봤던 시점이었는데 그날따라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지금 돌이켜 보면, 그날 저를 울린 건 작품 자체가 아니라 ‘그 순간의 가이’와 ‘그 순간의 토미’였던 것 같습니다. 두 캐릭터의 아픔이 그 어느 때보다 제게 실체적으로, 깊이 와닿은 순간이었던 거죠.

그래서인지 저는 ‘오열극’이라 불리는 작품들을 볼 때마다 캐릭터를 면밀히 살피게 됩니다. 객석을 울리는 건 결국 캐릭터가 앓고 있는 아픔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자주 하기 때문인데요. 캐릭터의 결핍이 우리 자신의 것이기도 할 때, 우리는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습니다. 무대 위 인물이 끝내 손에 쥐지 못한 것이 우리 역시 그토록 원했던 무언가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수많은 오열극 중에서도 대학로 대표 ‘오열극’ 두 편을 소개해볼까 합니다. 연극 <오펀스>와 뮤지컬 <홍련>이 바로 그 주인공인데요. 두 작품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의 결핍은 무엇일까요? 어떤 아픔이 우리를 그토록 울게 만드는 걸까요?


격려가 필요한 모두를 위한 연극 〈오펀스〉

2026.03.10~2026.05.31 │ 대학로 TOM 1관 │ 160분(인터미션 15분 포함)

연극 <오펀스> 공식 티저

이곳은 필라델피아 북부 ‘카맥 스트리트 60-40’에 위치한 낡은 집입니다. 이 집에는 고아 형제가 살고 있죠. 좀도둑질로 생계를 책임지는 형 트릿, 그리고 집 밖의 세상을 두려워하며 격리된 채 살아가는 동생 필립이 그 주인공입니다.

두 사람에게 ‘가족’이란 아주 오래전에 유실된 데이터입니다. 부모의 부재 속에서 동생마저 잃을 수 없었던 트릿은 다소 폭력적이고 통제적인 방식으로 필립을 보살핍니다. 필립은 두려움 속에서 형의 규칙을 따르면서도, 마음 깊은 곳에서 넘쳐나는 호기심을 감추지 못합니다. 이렇게 처음 시작할 때만 보면 사회에서 소외된 이들의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작품은 진행될수록 보다 본질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두 형제에게 부모의 공백은 단순히 ‘보호자’의 결핍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두 사람은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지만, 제대로 사랑을 나눠본 적이 없습니다. 진심을 주고받는 방법도 모르죠. 누군가로부터 감정적 지지를 받아본 경험이 없는 이 소년들은 자신이 세상에 존재해도 괜찮은 사람인지조차 확신하지 못합니다. 트릿이 필립에게 보이는 폭력적이고 권위적인 모습 역시 그런 불안에서부터 비롯된 것입니다. 쓸모 있는 존재, 즉 동생의 유일한 보호자라는 위치를 확인받아야만 자신의 존재 가치를 느낄 수 있었던 것이죠.

연극 <오펀스> 프레스콜 하이라이트

그러던 중 두 사람 사이에 시카고 갱스터 해롤드가 나타납니다. 트릿이 몸값을 노리고 납치해 온 사람이었는데, 뜻밖에도 해롤드는 그 모든 사실을 알면서도 두 형제에게 안정적인 환경을 제공하려 합니다. 금전적인 지원만이 아니라 정서적인 지지까지도요. 이 다정함을 먼저 받아들인 건 동생 필립입니다. 진짜 사랑을 처음으로 경험하며 필립은 깨닫습니다. 자신이 그토록 원했던 건 집 안에 홀로 갇혀 안전하다고 느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어디에 있는지 누군가가 알고 있고, 그 사람이 기다려 준다는 믿음이었다는 것을요.

반면 트릿은 끝까지 해롤드의 지지를 거부하고 날을 세웁니다. 하지만 해롤드가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 감춰두었던 트릿의 진심이 마침내 드러납니다. 그는 사실 동생을 부양하는 강한 형이 되고 싶었던 게 아니었습니다. 그저 사랑받고 싶고, 격려가 필요한 어린아이였을 뿐이죠.

우리가 〈오펀스〉를 보며 눈물을 흘리는 건, 트릿과 필립이 겪는 결핍이 낯설지 않기 때문입니다. 존재에 대한 불안, 감정이 공유되고 있다는 확신, 그리고 안정감. 그것들을 간절히 원했던 기억이 우리 안에도 어딘가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이 작품이 유독 관객의 마음에 오래 남는 건, 형제의 서툶이 우리를 닮았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누구나 자신의 상처는 직접 돌보기 힘든 법이니까요.


구원이 어디 있는지 묻는 뮤지컬 〈홍련〉

2026.02.28~2026.05.17 │ 충무아트센터 중극장 블랙 │ 90분

뮤지컬 <홍련> 공식 트레일러 영상

여기는 저승의 ‘천도정’입니다. 삼도천에 위치한 천도정은 수장 바리공주를 필두로 죽은 자의 재판을 담당하는 기관인데요. 오늘 재판에 회부된 피고는 홍련입니다.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아는 ‘장화홍련전’의 그 홍련이죠. 그녀가 이 재판에서 주장하고 있는 혐의는 ‘아버지를 살해하고 동생을 헤친 것’입니다.

하지만 뭔가 이상하지 않나요? 우리가 알고 있는 이야기 속 홍련은 가해자가 아닙니다. 오히려 피해자에 가깝죠. 새어머니의 모함과 동생 장쇠의 계략으로 언니 장화가 죽고, 언니를 잃은 슬픔을 견디지 못한 홍련이 목숨을 끊었으니까요. 그렇다면 뮤지컬로 각색하면서 이야기를 바꾼 것일까요? 아닙니다. 사실 이 재판에서 홍련이 하고 있는 ‘자백’은 진실이 아닙니다. 피를 나눈 아버지의 방관과 새어머니의 가해 아래 언니의 죽음을 지켜봐야 했던 홍련이 만들어낸 이야기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 속에서 홍련을 진짜로 옭아매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겉으로는 불행한 가족 서사 같지만 이 작품이 파고드는 건 그보다 더 깊은 곳입니다. 언니를 지키지 못했다는 부채감, 누구에게도 보호받지 못했다는 비참함 속에서 홍련은 끝내 자기 자신을 용서하지 못했습니다. 그녀가 선택한 죽음은 가해자를 향한 복수이기 전에, 자신을 향한 가장 가혹한 처벌이었습니다. 재판 내내 쏟아지는 분노의 화살은 결국 자기 자신을 겨누고 있습니다.

뮤지컬 <홍련> '네 얘기의 결말' 넘버 라이브

저승신 바리는 그런 홍련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집니다. 그리고 홍련이 감추고 싶었던 상처 속 소녀를 억지로 끄집어내어 눈을 맞추게 합니다. 고통스러운 과정입니다. 하지만 그 끝에서 홍련은 비로소 자신의 진짜 욕망을 마주합니다. 그녀가 원했던 건 아버지의 사과도, 가해자의 파멸도 아니었습니다. 스스로를 가련하게 여길 수 있는 마음, 자기 자신과의 화해였습니다.

우리가 〈홍련〉을 보며 눈물을 흘리는 건, 홍련의 외침이 낯설지 않기 때문일 겁니다. 누구나 감추고 싶고 또 드러내고 싶지 않은 결핍과 상처가 있습니다. 애써 외면하고 또 다른 것들을 끌어다 감추죠. 하지만 그 아픔을 온전히 이해하고 끌어안을 수 있는 상대는 오로지 ‘나’뿐입니다.

홍련이 천도정의 재판 끝에 발견한 것도 그런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바리가 홍련에게 건넨 건 판결도, 용서도 아니었습니다. 스스로를 똑바로 바라볼 수 있는 용기였습니다. 진짜 구원은 외부에서 오지 않습니다. 나를 가장 오래, 가장 가까이서 들여다볼 수 있는 사람은 결국 나 자신뿐이니까요. 

〈홍련〉이 오래도록 마음에 남는 이유는, 그 진실이 무대 위에서 너무나 선명하게 빛나기 때문일 겁니다.


캐릭터의 결핍이 우리를 울리는 순간

〈오펀스〉의 형제들이 타인의 손길을 통해 결핍을 메워가는 과정을 보여준다면, 〈홍련〉은 가족이라는 이름의 가장 지독한 결핍을 스스로 돌파해 나가는 과정을 그립니다. 두 작품이 결핍을 채우는 방식은 다르지만, 결국 같은 질문을 향해 나아갑니다. 당신이 그토록 간절히 원하고 있는 것은 무엇이냐고.

우리는 흔히 결핍을 메워야 할 구멍이나 지워야 할 흉터로 여깁니다. 하지만 두 작품을 보고 나면 생각이 달라집니다. 결핍은 우리가 무엇을 향해 손을 뻗고 있는지 알려주는 가장 정직한 이정표입니다. 〈오펀스〉의 형제들은 부모의 부재를 통해 격려와 연대의 소중함을 깨달았고, 〈홍련〉은 가족의 배신을 통해 자기 구원이라는 단단한 자아를 건져 올렸습니다. 두 작품 모두 ‘가족’이라는 관계가 준 상처에서 시작되었지만, 그 끝에서 발견한 것은 결국 ‘나로서 온전히 존재하고 싶다’는 욕망이었습니다.

그들이 마주한 결핍 앞에서 우리도 눈물을 흘리는 건, 캐릭터가 앓고 있는 결핍이 우리 것과 닮아 있기 때문일 겁니다. 그 눈물은 단순히 슬픔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내 안에 무엇이 비어 있는지 확인하는 순간, 그 빈자리를 무엇으로 채워야 할지도 비로소 보이기 시작하니까요.

살다 보면 때로는 어떤 순간이 나를 갉아먹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객석에 앉아보실 것을 권합니다. 캐릭터와 함께 울고 웃는 그 순간이, 분명 무언가를 달라 보이게 할 테니까요. 지금도 대학로의 어느 극장에서 자신의 감정과 조용히 마주하고 있을 분들을 응원합니다. 이 글이, 또 이 공연들이 마음을 다독이는 작지만 단단한 격려가 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