힙플레이스를 넘어서, 공간의 감상을 성숙시키는 책 3권

공간을 '힙하다'는 말로만 설명하고 싶지 않을 때

힙플레이스를 넘어서, 공간의 감상을 성숙시키는 책 3권
이미지 출처: 슬기와 민

언제부터인가 공간을 소개하기 위해 ‘힙(hip)’이라는 표현이 자주 사용됩니다. 집, 카페, 편집샵, 미술관, 도서관, 어떤 공간을 소개하든 감상은 ‘힙하다’는 한마디로 요약되기도 하죠. 주류 문화에 대항하는 라이프스타일에서 유래한 ‘힙’이라는 말은 이제 일종의 접두사처럼 여러 명사 앞에 붙어 신조어를 형성합니다. 흔하지 않은 디자인이나 고유한 개성을 가진 공간에는 ‘힙플레이스’라는 호칭이 뒤따라요.

그런데, 힙하다는 말에 가려진 우리의 진짜 감상은 무엇일까요? 공간에서 우리가 느끼는 감정은 무엇이길래, 자꾸만 색다른 공간을 찾는 것일까요? 다채로운 느낌을 뭉뚱그리는 납작한 표현을 버리고 나면, 공간에서 느끼는 감상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요?

소개하는 세 권의 책은 공간이란 무엇이며, 그 공간이 어떤 감각을 주는지 인문학적으로 고찰합니다. 우리를 둘러싼 수많은 공간이 근본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는지 살피죠. 공간에 대한 감상이 단지 ‘힙하다’에 그치지 않길 바라게 될 때, 인문 철학서를 시도해 보세요. 분명 공간을 다루는 언어와 생각이 성숙하는 과정을 경험할 수 있을 거예요.


조르주 페렉 『공간의 종류들』

  • 책 속에 등장하는 공간: 페이지, 계단, 아파트, 공항, 도시
확실한 것은, 아주 먼 옛날의 어느 시대에는, 그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통로도, 정원도, 도시도, 시골도. 문제는 우리가 여기에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일이다. 수많은 작은 공간 조각들이 있다.

어디까지 ‘공간’이라고 부를 수 있는 걸까요? 프랑스 작가 조르주 페렉은 ‘공간의 종류들’을 나열하며 일상의 감각을 깊이 사유했습니다. 조르주 페렉의 시선은 작게는 침대, 방, 아파트부터 크게는 도시, 나라, 세계까지 가닿습니다. 심지어 『공간의 종류들』의 첫 챕터는 종이 ‘페이지’로 시작해요. 여러 개의 종이를 나란히 펼쳐둘 때 생기는 물리적인 공간의 규모를 인식하고, 글이 쓰인 종이의 여백과 간격을 들여다봅니다.

더 나아가 글쓰기를 통해서 공간의 목록을 작성하는 일, 공간을 묘사하는 일이 공간에 대한 인식을 만든다는 점을 짚어주죠. 공간은 처음부터 존재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인식함으로써 발견된다고요. 이후 이어지는 챕터는 실제로 공간의 목록을 만들고, 자세히 관찰하고, 묘사하는 방식으로 작성되었어요.

© Pierre Getzler

지하철 통로, 계단, 도서관, 초원 등 수많은 공간의 조각을 묘사한 페렉의 글은 너무나 일상적이라, 개인적인 일기나 메모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하나의 메시지로 모이기보다는 개별적인 문장을 나열하고 감각을 발산해요. 여기서 평범한 사물과 공간으로부터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조르주 페렉의 글쓰기 특징을 엿볼 수 있는데요. 익숙한 공간을 자세히 관찰하고, 상상력을 뻗어 나가며 자신의 고유한 감수성을 쌓아갑니다. 평범하게 보려고 다짐하며, 꾸준히 글로 옮길 때 공간의 진면모가 속속들이 드러나요. 다른 누구의 인상도, 감각도 빌리지 않은 오로지 자신의 발견이지요.

공간에 대해 더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다면, ‘조르주 페렉식 글쓰기’를 시도해 보면 어떨까요? 잠시 펜과 노트를 들고 나가 우리 주변의 익숙한 공간을 새롭게 발견하고 자세히 관찰하고 나열하면서요. 그동안 몰랐던 공간의 조각이 드러날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계단에 대해서 충분히 생각하지 않는다. 옛 저택에서는 계단보다 더 아름다운 것이 없었다. 오늘날의 건물에서는 그보다 더 더럽고, 춥고, 적대적이고, 인색한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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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셸 푸코 『헤테로토피아』

  • 책 속에 등장하는 공간: 인디언 텐트, 정원, 묘지, 박물관, 극장, 목욕탕
그런데 이 온갖 장소들 가운데 절대적으로 다른 것이 있다. 자기 이외의 모든 장소들에 맞서서, 어떤 의미로는 그것들을 지우고 중화시키고 혹은 정화시키기 위해 마련된 장소들. 

어렸을 적에 이불과 의자로 집을 만들어 본 기억이 있나요? 집 안에 비밀 기지를 만든 기억 말이에요. 이 비밀 기지가 놓여 있는 거실과 방의 의미는 평상시와 달라집니다. 이불로 만든 집, 인디언 텐트, 비밀 기지는 일종의 ‘일탈의 공간’이에요. 우리에게는 일상적인 공간과 조금 다른 일탈의 공간을 만드는 힘이 있는데요.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는 이러한 일탈의 공간, 다른 공간에 맞서는 ‘반공간’을 정의하는 새로운 개념을 제시했어요. 바로 ‘헤테로토피아’입니다. 이상향이라는 뜻으로 잘 알고 있는 ‘유토피아’에서 변형된 말인데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공간인 ‘유토피아’와 달리, ‘헤테로토피아’는 실제 우리 주변에 존재하는 공간을 말해요. 현실화된 유토피아의 공간이죠.

예를 들어 ‘묘지’는 헤테로토피아예요. 동네, 마을과 같은 일상적인 공간과는 확연히 다르지만, 경계에 서서 일상과 연관을 맺는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푸코는 묘지를 ‘또 다른 마을’이자 ‘검은 집’이라고 불러요. ‘영화관’도 헤테로토피아입니다. 영화관 스크린을 마주하는 순간 우리는 전혀 다른 공간을 경험하고 오죠. ‘박물관’과 ‘도서관’도 헤테로토피아예요. 모든 시간과 시대를 한 자리에 모아놓고, 아카이브를 구축하는 신비로운 공간이기 때문이에요.

비일상적인 공간 개념인 ‘헤테로토피아’는 지금 우리 주변에서도 자주 마주할 수 있어요. 9월 초, 프리즈 기간에 열린 ‘아트나잇’에서는 일상적인 거리와 광장, 빈 공간을 모두 예술과 축제의 공간으로 바꾸었는데요. 이를 한시적인 헤테로토피아라고도 부를 수 있어요. 작은 서점, 청음공간, 갤러리, 페어 등의 문화공간은 우리에게 낯설고 새로운 감각을 환기합니다. 어딘가 ‘다른 공간’으로 느껴지는 우리 주변의 헤테로토피아를 한번 찾아보면 어떨까요?

거울은 헤테로토피아처럼 작동한다. 그것이 내가 거울 안의 나를 바라보는 순간 내가 차지하고 있는 자리를, 절대적으로 현실적인 동시에 절대적으로 비현실적인 것으로 만들기에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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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스통 바슐라르 『공간의 시학』

  • 책 속에 등장하는 공간: 집, 새집, 사막, 화단, 지하실
조그만 공간 속에서 행복해하며, 그는 하나의 공간 애호의 경험을 얻는다.
그는 내부로부터 내부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된다.

공간이 아늑하고 편안하다는 감각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어쩐지 오래 머무르고 싶고, 몸과 마음을 안정시키는 공간이 있죠. 우리 집일 수도, 내 방의 침대일 수도, 혹은 어느 카페 한구석이거나 작은 도서관일 수도 있어요. 프랑스의 현상학자 가스통 바슐라르는 ‘요나 콤플렉스’라는 용어를 통해 공간에서 느끼는 안온함과 평화로움을 설명했는데요. 우리가 어떤 공간에 감싸져 있을 때면, 마치 어머니의 태반 속에 있는 것처럼 편안함을 느낀다고 말해요. 바슐라르에 따르면, 우리가 좋아하는 장소에 대해 느끼는 애착은 이러한 원초적인 아늑함과 관련이 있어요. 

처음 살펴보았던 조르주 페렉의 책이 우리 주변에 실제로 존재하는 구체적인 공간을 묘사하고 나열하는 방식으로 쓰였다면, 반대로 바슐라르의 『공간의 시학』은 보편적인 공간의 이미지를 다루어요. 예를 들어 시 속에 등장하는 집은 직접 방문해 보지 못하더라도 우리의 상상력을 발휘해서 감정과 감각을 공유할 수 있죠. 공간에 대한 이미지와 상상력은 문학 작품을 이해하는 데 많은 영향을 미쳐요. 또, 반대로 문학과 독서는 우리가 좋아하는 공간을 이해하는 방식을 더 발전시키기도 하고요.

나의 집, 나의 구석, 나의 안식처는 어디인가요? 문학과 공간 사이를 오가며 ‘내밀하고 안온한 감각’에 주목한 바슐라르의 책을 통해 나를 편안하게 하는 공간의 모습을 떠올려 보길 바랍니다.

그리하여 독서를 통해 수많은 거주의 장소를 접했을 때, 우리들은 우리들 내부에 초가집과 성의 변증법이 울리도록 할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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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한 세 권의 책은 공간에 대한 저마다의 정의와 분류를 보여주는데요. 그 자체로 특별한 감각을 환기하는 공간이 있는가 하면, 일상적으로 여겼던 공간이 새롭고 낯선 감각으로 다가오기도 합니다. 인문 철학서는 어쩌면 어렵고 난해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지난한 독해의 과정을 거쳐 생각의 성숙을 경험할 수 있어요. 쉽게 접해보지 못한 언어는 생각의 스펙트럼을 넓히고, 우리의 감각을 적확하게 표현할 수 있게 도와요. 좋아하는 공간을 자신만의 언어로 설명하고 싶다면 공간 개념에 근본적인 접근을 시도하는 인문서를 읽어 보길 추천해요. 오랜 시간을 들여 고민하는 과정에서 공간에 대한 자신만의 감각과 표현을 찾을 수 있을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