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신인을 키우려면 온 업계가 필요하다

열매를 맺는 패션계의 안목

한 신인을 키우려면 온 업계가 필요하다
이미지 출처 : LVMH Prize 인스타그램

이제는 ‘팝업 스토어’라는 단어를 듣는 것만으로 피로가 몰려오곤 합니다. 그 폭발적인 성장의 기점이 된 성수동부터, 더현대 서울을 비롯한 백화점 등 온갖 공간들은 팝업 스토어의 일시적인 에너지를 자신에게 응집하려 노력하는데요. 이 같은 팝업 스토어 홍수 속에서도, 최근 아주 흥미롭게 지켜본 사례가 있습니다. 그 주인공은 다름 아닌 한 대학생인데요. 영국의 유명 예술 대학이자, 패션계 최고 명문 학교 중 하나로 꼽히는 CSM(센트럴 세인트 마틴스)에 재학 중인 김재우 씨를 필두로, 재학생 및 졸업생들의 작품이 국내 한 편집숍에서 팝업 스토어의 형태로 공개되었죠. 해당 팝업 스토어에는 학생 디자이너의 신선한 시각을 엿보고자 방문한 패션 애호가도 많았지만, 무엇보다 동시대 산업과 문화의 새 물결을 미리 포착하고 그들을 지원하고자 모인 업계 선배들이 다수 포진했다는 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의식주’로 묶일 만큼, 의복을 다루는 패션은 우리 삶에 필수적인 요소이며, 동시에 끝없이 변화하는 트렌드와 날 선 감각을 요구합니다. 그렇기에 패션 시장은 언제나 새로운 인물에 큰 관심을 보내죠. 특히 업계 선배가 후배를 이끌고, 이미 자리 잡은 브랜드가 신생 브랜드를 지원하며, 업계에 직간접적으로 얽힌 관계망은 언제나 ‘새로움’을 탐닉하죠. 오늘날 패션계에서 아직 여물지 않은 열매를 발견하고, 빛을 보지 못한 원석을 가려내어 그 신선함을 문화 전반에 이식하는 다양한 방법을 알아봅니다.


학생을 품은 산업, 학교를 넘어선 학생

앤트워프 식스 | 이미지 출처 : Karel Fonteyne

드리스 반 노튼, 앤 드뮐미스터, 월터 반 베이렌동크, 더크 반 샌, 더크 비켐버그, 마리나 이. 이들의 이름을 들어본 적 있나요? 이 여섯 명의 인물은 패션 역사에 깊이 이름을 남긴 디자이너로도 유명하지만, 동시에 그들을 묶어 부르는 앤트워프(안트베르프) 식스라는 이름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앞서 언급한 CSM과 함께 패션 명문 대학으로 꼽히는 벨기에의 앤트워프 왕립예술학교를 졸업한 6명의 디자이너는 같은 도시의 한 신발 매장에서 맺은 인연을 바탕으로 커리어를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1986년 다 함께 런던 패션 트레이드쇼에 방문해, 건물 꼭대기에 위치한 쇼룸에서 자신들의 작품을 선보였고, 직후 유력 바이어의 선택을 받아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죠. 오늘날까지도 패션계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이름이 된 이들은, 또 다른 이야기가 얽혀있음에도 그룹의 공통점인 ‘학교’를 중심으로 묶여 언급되곤 합니다. (나아가 월터 반 베이렌동크는 자신의 브랜드 활동에 더해, 앤트워프 왕립예술학교에 재직하며 훗날 라프 시몬스, 뎀나 바잘리아 등의 유명 디자이너가 그를 스승으로 두기도 했죠.)

대다수의 예술 전공이 그렇듯, 패션을 전공하는 학생들은 자신의 졸업작품을 이후 진로 및 활동 전개를 위한 초석으로 삼는데요. 단순 취업뿐 아니라, 졸업 작품 전시와 쇼를 찾은 업계 종사자를 통해 곧바로 유명 브랜드에 투입되거나 직접 디자이너로 데뷔하는 사례도 심심찮게 발견되죠. 또한, 앞에서 말했듯 패션 업계 자체가 젊음과 새로움의 상징인 학교와 학생에 큰 관심을 두는데요. 파리 패션위크는 IFM(Institut Français de la Mode, 프랑스 패션학교)과, 런던 패션위크는 CSM 및 LCF(London College of Fashion, 런던 패션 학교), 도쿄 패션위크는 문화복장학원과 연계한 런웨이를 매년 기획하는 등, 주요 패션위크들은 자국과 도시의 유명 패션 학교와 함께 신성들의 재능을 널리 퍼뜨리기 위해 노력합니다.

또한 패션 매거진과 편집숍, 패션 업계 선배에 의해 학생들의 졸업 작품이 곧바로 발탁되는 사례도 많습니다. 최근까지도 높은 주가를 올리고 있는 국내 브랜드 지용킴의 창립자 김지용은 일본의 문화복장학원을 졸업한 뒤, 영국의 CSM에서 재학하던 중 일본의 유명 편집숍 그레이트(GR8)에서 졸업 컬렉션을 바잉하며 그의 브랜드를 시작했습니다. 또 런던의 편집숍 머신-A는 매년 다양한 졸업 컬렉션을 바잉해 그들의 공간에서 선보이고 있는데요. 이후 켄드릭 라마에게 샤라웃을 받고, 아디다스와 잦은 협업을 펼치며, 버질 아블로가 작고한 뒤 루이비통의 남성복 디자이너 자리에 유력한 후보로 거론되었던 그레이스 웨일스 보너의 졸업 작품 또한 머신-A가 가장 먼저 포착했죠.

학교와 학생은 앞으로 떠오를 신성을 가장 앞서 포착할 수 있는 단계입니다. 신선한 감각과 번뜩이는 시야를 갈구하는 패션계가 앞으로 시장과 문화를 주도할 학생들을 지원하고자 적극적으로 나서는 이유 역시 쉽게 이해할 수 있죠. 무엇보다 단순히 선배가 후배를, 기업이 학교를 지원하는 단편적인 관계가 아닌, 학생들이 자신의 나이와 이력은 상관없이 업계, 문화와 다방면에서 협력하고 호흡을 맞출 수 있다는 점은 패션 업계가 가진 특이성이지 않을까요?


대기업이 소개하는 인재, 후원으로 키워내는 문화

LVMH 프라이즈의 심사위원단 | 이미지 출처 : LVMH Prize 웹사이트

대중음악에는 그래미, 영화에는 오스카가 있다면, 패션에는 어떤 상이 가장 유명할까요? 미국 패션 디자이너 협회(CFDA)가 운영하는 ‘CFDA 패션 어워즈’나 영국 패션 위원회(BFC)가 개최하는 ‘영국 패션 어워즈’ 등 각 국가별 시상식도 유명하지만, 무엇보다 많이 언급되는 사례는 LVMH 프라이즈입니다. 루이비통과 디올, 셀린느를 비롯해 유명 패션, 향수, 주얼리, 시계, 주류 브랜드를 품은 세계 최대의 패션 기업 LVMH는 2013년부터 자신만의 패션 시상식을 운영하고 있죠. 하지만 LVMH 프라이즈가 주목받는 이유는, 전 세계의 패션 브랜드와 인물을 대상으로 하는 거대한 범위의 시상식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해당 시상식의 본상이 ‘최고의 패션 디자이너 상’이 아닌, ‘영 패션 디자이너 상’이라는 점에서부터 알 수 있는데요. LVMH 프라이즈는 2개 이상의 시즌 컬렉션을 진행한 40세 이하의 디자이너만 지원할 수 있는, 젊은 신진 디자이너를 조망하는 시상식입니다.

그렇기에 LVMH 프라이즈는 패션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시상식이자, 스타 디자이너와 디렉터의 등용문이라고 불립니다. 수상 이후 유명 패션 하우스의 디렉터에 오른 뎀나 바잘리아(前 발렌시아가, 現 구찌 디렉터), 버질 아블로(前 루이비통 남성복 디렉터), 글렌 마틴스(現 메종 마르지엘라, 디젤 디렉터)는 물론, 자신의 브랜드를 활발히 운영 중인 시몽 포르테 자크뮈스, 마린 세르, 코페르니 등의 인물과 브랜드가 이 시상식을 통해 주목받기 시작했죠. 또한 민주킴, PAF, 강혁, 지용킴, 쿠시코크 등 우리나라의 디자이너와 브랜드 또한 LVMH 프라이즈에서 좋은 성과를 내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LVMH 프라이즈는 국가와 인종, 장르와 분야를 가리지 않고 말 그대로의 ‘원석’을 발견하려 애씁니다. 수상자는 큰 규모의 상금에 더해 피비 파일로, 니콜라 제스키에르, 조나단 앤더슨 등 최고의 인사들은 물론, 패션 미디어, 마케팅, 유통, 스타일링 등 업계 전 분야에 걸친 멘토링을 받을 수 있죠.

이처럼 신인을 발굴하려는 노력은 거대 기업이 개최한 시상식에 그치지 않고, 기업과 브랜드, 협회, 인물이 주관하는 여러 후원 재단에서도 목격할 수 있습니다. 영국 패션 위원회는 유명 매거진 보그, GQ와 함께 후원 재단을 운영하며, 미국 패션 디자이너 협회 또한 신진 디자이너 / 학생 / 산업 전반으로 범주를 구분한 후원 프로그램을 설립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유명 패션 브랜드 AMI는 IFM과, 랄프 로렌은 FIT(Fashion Institute of Technology, 뉴욕 주립 패션 공과대학교)와 협업해 학생 장학금 및 멘토링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죠. 이처럼 패션계에서는 규모와 형식을 제한하지 않고, 다양한 방식의 후원과 지원으로 새로운 인물을 찾고 성장하도록 돕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성장한 이들 역시, 자신이 받은 도움을 잊지 않고 후대에게 그 내리사랑을 선사하며 더욱 공고한 선순환의 구조가 만들어지도록 노력하죠.


문화가 만드는 연결

안나 윈투어 | 이미지 출처 : 보그 컬리지 오브 패션

앞선 챕터에서 소개한 학교와 시상식, 후원 재단이 다소 격식과 거대 구조에 치우친 것 같다면, 더 날 것의 사례를, 그렇기에 더 매력적인 관계를 설명해 보겠습니다. 최근 뉴욕에서 촬영 중인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2>의 촬영 현장이 대중에 공개되어 큰 화제가 되었는데요. 20년 전 개봉해 전 세계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킨 원작의 주인공이 최근까지 미국판 보그의 편집장을 역임한 안나 윈투어(現 보그 글로벌 디렉터)라는 사실은 더 말할 것도 없이 유명하죠. 안나 윈투어는 편집장이라는 위치는 물론 똑단발 뱅 헤어와 선글라스로 눈을 가리는 스타일로도 유명하지만, 무엇보다 패션계에서 수많은 신성을 이끌고 후원한 인물로도 유명합니다. 그가 보그 편집장으로 지낸 수십 년의 세월 동안 톰 포드, 마크 제이콥스, 존 갈리아노, 톰 브라운 등 훗날 세계 최고의 디자이너로 성장한 이들의 활동을 지원했다는 소식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죠.

인물 간의 관계가 만들어낸 긍정적 고리는 또 있습니다. 지방시와 디올, 마르지엘라의 수석 디자이너를 지낸 존 갈리아노가 훗날 루이비통과 펜디를 거쳐 디올 맨의 디렉터로 역임한 킴 존스의 졸업 작품 중 일부를 구입한 사례도 유명하죠. 현재 미국을 대표하는 디자이너 중 하나인 마크 제이콥스는 뉴욕의 한 부티크 숍에서 일하던 10대 시절, 가게에 들른 페리 엘리스의 조언을 듣고 패션 명문 대학 파슨스(Parsons)에 진학하며 오늘날의 명성을 일궈냈고요. 그뿐 아니라 프랑스의 전설적인 디자이너 장 폴 고티에는 글렌 마틴스, 시몬 로샤, 루도빅 드 생 세르넹 등 신진 디자이너를 초빙해 협업하며 자신의 컬렉션 중 일부를 선보이고 있습니다. 세계적인 브랜드 몽클레르는 '몽클레르 지니어스'라는 컬렉션을 통해 피엘파올로 피촐리, 릭 오웬스 등 베테랑 디자이너와 니고, 에이셉 라키 등 예술•문화계 인사를 비롯해 크레이그 그린, 시몬 로샤 등의 신진 디자이너와 협업하며 “하나의 하우스, 여러 목소리”라는 컬렉션의 비전을 구현하고 있죠.

패션 산업은 디자인뿐 아니라 브랜드 경영, 상품 유통, 마케팅 등 다양한 업무가 엮인 만큼, 시장에 새로 진입하는 이들이 겪는 고초가 상당한데요. 앞서 언급한 시상식과 후원 재단의 일부 사례처럼, 업계 내부의 여러 기업과 인물들은 신진 디자이너를 대상으로 여러 멘토링 프로그램을 운영합니다. 버질 아블로는 자신이 설립한 ‘포스트-모던’ 재단을 통해 아프리카계 미국인과 아프리카 출신의 패션 학도에게 장학금을 제공하며, 스텔라 맥카트니는 영국의 여성협회와 파트너십을 맺어 다양한 국가와 인종 등의 배경을 지닌 여성 디자이너를 지원하기도 했죠. 이처럼 패션 산업에 자리한 개개인의 인물부터 디자이너와 브랜드, 그 너머 매거진, 마케팅 등의 분야까지도 이어지는 끈끈한 연결망은 패션계가 새로운 인물과 흐름을 발견하고 그들을 성장시키는 강력한 동력이 됩니다. 단 한 명의 인물, 하나의 협회와 기업만이 노력해서는 달성할 수 없는 커다란 그물망을, 모두의 동의 아래 힘을 합쳐 만들어낸 것으로도 볼 수 있죠.


이미지 출처 : 아르마니 공식 홈페이지

얼마 전 우리 곁을 떠난 이탈리아의 전설적인 디자이너 조르지오 아르마니는 2016년 자신의 이름을 딴 재단을 만들었습니다. 그는 이 재단을 통해 지속 가능한 패션 산업을 구축하는 등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그만큼 아르마니가 중요하게 생각한 것 중 하나는 ‘다음 세대’를 찾고 지원하는 일이었죠. 그는 패션뿐 아니라 사진, 영화 등 패션과 밀접한 여러 분야의 학생과 신진 인물을 후원하고, 이탈리아를 넘어 미국, 중국 등 전 세계 학생을 대상으로 자신의 영향력을 설파했죠. 그뿐 아니라 샤넬과 디올, 에르메스는 미술과 사진 등의 분야를, 로에베는 공예 분야의 시상식과 후원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패션뿐만 아니라 다양한 시각 예술 분야와 공동 성장을 꿈꾸고 있습니다.

결국 패션은 사치재이자 필수재이고, ‘멋’과 ‘유행’을 좇으면서도 ‘의복의 본질’은 물론 ‘다른 분야와의 연결’을 놓칠 수 없는 업계입니다. 가장 빠르게 신선한 관점을 퍼뜨려야 하고, 어떤 분야에서든 자신의 모습을 감각적으로 선보여야 하는 패션계는 언제나, 어떻게든 새로운 피를 수혈해야 하는 입장에 있으며, 그들 스스로 그 점을 가장 잘 알고 있죠. 산업의 지속적인 발전을 위해 새로이 떠오르는 신성을 적극적으로 찾아내고, 그들이 성장하도록 돕는 모습은 어쩌면 당연하게도 느껴집니다. 하지만 다소 놀랍고도 인상적인 점은 따로 있습니다. 개인으로서, 기업과 협회, 브랜드 운영자와 업계 선배로서 당연하다는 듯 새로운 인물을 지원하고, 매거진과 유통사, 편집숍 등 판매점 등 가깝고 먼 업계 내 분야에 이르기까지 산업을 구성하는 모든 이들이 힘을 합쳐 아직 영글지 못한 열매가 무르익도록 연결된 구조가 특히 놀라운데요. 마치 ‘한 아이를 키우기 위해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격언처럼, 하나의 원석이 제 모습을 보이기 위해 업계 내 모든 이들이 연동되어 지원하는 패션계의 구조는 다른 문화•예술계 분야들이 배워야 하는 모습이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