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을 항해하는 도시 함부르크

과거와 현재를 아우르는 낭만적인 항구 도시 여행기

낭만을 항해하는 도시 함부르크

예술과 문화 여행지로 독일을 떠올려보신 적 있나요? 필자는 독일로 문화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독일은 유명한 음악가부터 독특한 건축 작품, 노벨 문학상을 받은 작가, 낭만적인 그림을 그린 화가를 품은 문화 강국입니다. 그중에서도 북독일에 위치한 항구 도시 함부르크는 바다와 거의 맞닿아 있어 하늘과 물길을 품은 아름다운 풍경을 지니면서도, 근대부터 활기찬 산업 활동으로 경제적으로 왕성하게 성장했던 대도시입니다. 이렇게 활발한 도시에서 아름다운 예술과 문화가 탄생하지 않았을 리 없겠죠? ‘독일’ 하면 떠올리는 강인하고 딱딱한, 혹은 난해하고 추상적인 예술보다는 ‘낭만’을 가득 품은 예술의 흔적을 찾아 함부르크로 향했습니다. 그곳에서 조우한 도시 풍경과 어우러져 탄생한 아름다운 문화의 결실을 마주한 생생한 감상을 꺼내놓고자 합니다.


함부르크 음악가, 요하네스 브람스

함부르크 모습. 이미지 출처:OX.pl
함부르크 모습. 이미지 출처:OX.pl

항구 도시 함부르크에는 거대한 엘베강이 유유히 흐릅니다. ‘물의 도시’하면 곧장 이탈리아의 베네치아를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지만, 함부르크도 베네치아 못지않게 건물 사이로 흐르는 무수한 강줄기의 모습이 인상적인 물의 도시죠. 함부르크를 거니는 동안 ‘이 도시와 참 닮았다’는 생각을 들게 하던 브람스의 교향곡을 배경 음악 삼아, 함부르크라는 도시를 소개해 보겠습니다. 함부르크가 지닌 색채, 그리고 그 특징을 고스란히 품은 음악가 브람스의 《교향곡 4번 마단조, 작품 번호 98》 입니다. 아래 영상으로 음악을 감상하며 함부르크의 풍경을 생생히 그려보시죠.

강처럼 깊은 심연을 거닐은 음악가

함부르크 태생으로 유명한 음악가 요하네스 브람스를 모르기란 쉽지 않을 겁니다. 낭만주의 시대의 독일 작곡가로, 베토벤 이후 무게감 있는 교향곡의 전통을 이어받은 거장으로 인정받는 작곡가죠. 브람스는 물길을 따라 예술이 넘실대는 함부르크 도시 그 자체를 닮아, 함부르크 예술의 상징과도 같은 음악가입니다. 그의 음악은 바다와 맞닿아 거센 바람이 불고 물줄기가 흐르는 변화무쌍한 항구 도시 함부르크의 인상을 닮았습니다. 격정적으로 폭발하는 감정보다는 깊은 내면에서 천천히 번지는 감정을 자아내는 음악들인데요. 그래서인지 그의 교향곡은 저 멀리서 나를 향해 다가오는 거대한 바다 물결을 담담히 바라보는, 강인한 심성을 가진 사람의 고백처럼 들리기도 하죠.

작곡가 요하네스 브람스

브람스는 한 시대를 앞선 음악 선배 베토벤의 그림자를 피해 갈 수 없었습니다. 새로운 교향곡이 발표되면 당대 독일, 나아가 유럽 교향곡의 모범 답안과도 같았던 베토벤의 곡과 비교되곤 했죠. 20년의 세월을 투자해 내놓은 첫 번째 교향곡은 ‘베토벤의 제10번’이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였고, 두 번째, 세 번째 곡도 여전히 베토벤 음악의 동기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평가받았습니다.

하지만 지금 재생되고 있는 마지막 교향곡은 앞선 훌륭한 세 곡의 교향곡을 뛰어넘어 ‘자신만의 교향곡’을 완성했다는 극찬을 받습니다. 어둠으로 시작해 결국 광명으로 나아가는 베토벤 음악의 서사와는 달리, 브람스는 오히려 비극으로 뚜벅뚜벅 걸어가는 피날레를 만듭니다. 단조의 우울함을 버리지 않고, 풍부하고 서정적인 음색을 다채롭게 펼쳐내면서 말이죠. 무너지듯 추락해가는 멜로디와 뚝뚝 떨어지는 차갑고 단단한 곡조는 마치 저 멀리서 다가오는 운명 같은데요. 엘베강 너머 광활하게 펼쳐져있는 바다의 모습을 상상하게 만듭니다. 그렇게 몰아치는 감정 속에서도 정교하게 얽힌 리듬, 단단한 화성에서는 ‘과연 독일’이라는 생각이 들죠. 마치 함부르크의 석조 건축물처럼 강인하고 체계적인 구성입니다.

이미지출처: Geheimtipp Hamburg
“거인이 내 뒤로 뚜벅뚜벅 쫓아오는 소리를 항상 들어야 한다고 생각해 보게. 그때 그 기분을 자네는 전혀 상상할 수 없을 걸세.”

베토벤을 의식하며 내뱉은 브람스의 말을 떠올려봅니다. 마침내 베토벤이라는 거인에게서 벗어나 깊고 어두운 내면의 바다와 정면으로 마주하기 위해 뚜벅뚜벅 걸어가는, 과연 항구 도시에서 태어난 강인한 예술가다운 곡이라고 생각하며 음악을 따라가게 됩니다.

독일 국민 화가, 카스파르 다비드 프리드리히

도시와 어우러지는 음악에 앞서, 함부르크를 여행의 최종 목적지로 정하게 만든 예술 작품 하나가 있습니다. 바로 한 폭의 그림입니다. 이 그림을 보면서 어떤 감정이 드시나요?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

안개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 풍경을 마주한 방랑자. 절벽 위에서 자욱한 바위산과 안개의 바다를 바라보는 사람의 뒷모습은 그림을 보는 이의 발걸음을 한순간 멈춰 세웁니다. 고요하지만 압도적인 이 풍경은 우리 자신의 내면 같습니다. 우리 모두 마주하고 있는 ‘무엇도 확신할 수 없는 삶 그 자체’를 연상시키도 하고요. 풍경화 그 이상의 회화로 독일 낭만주의 회화의 중심을 굳게 세운 화가, 카스파르 다비드 프리드리히의 이 작품은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입니다. 이 그림을 함부르크의 미술관, 함부르크 쿤스트할레에서 직접 볼 수 있다는 정보를 듣고 곧장 함부르크라는 도시를 경험해 보기로 마음을 굳혔습니다.

함부르크 쿤스트할레의 모습. 이미지 출처: typisch-hamburch

함부르크 쿤스트할레(Hamburger Kunsthalle)는 19세기 중반 설립되어 독일에서 가장 중요한 미술관 중 하나로 손꼽힙니다. 중세부터 현대까지의 유럽 회화를 폭넓게 다루고 있으며 독일의 국민 화가 프리드리히뿐만 아니라 우리가 잘 아는 피카소, 클로드 모네, 파울 클레, 바실리 칸딘스키 등 다른 나라와 현대 작가의 작품들까지 다양하게 감상할 수 있어 볼거리가 무척 풍성한 미술관이죠. 그중에서도 프리드리히의 작품을 따로 모은 전시실이 있다는 가이드북을 보고 곧장 달려갔습니다.

자연을 거울 삼아 깊은 내면을 마주하는 그림

<얼음 바다 - 난파선>

프리드리히의 그림을 모은 전시실에 들어서면 가장 눈길을 끄는 그림이 있습니다. 도슨트들이 모두를 집중시키고 설명하는 프리드리히의 대표 작품이기도 한 <얼음바다-난파선>입니다. “북극해의 난파선”, “파괴된 희망”이라고도 불리는 이 그림은 그의 작품 중 가장 극적이고 불길한 분위기를 가진 작품이기도 합니다. 거대한 얼음덩어리들이 바다 위를 깨부수고 솟구쳤습니다. 그 사이에는 산산 조각 난 배의 잔해가 엿보이죠. 자연 앞에서 완전히 부서진 인간의 의지, 신념이 떠오릅니다.

바다와 가까운 지역일수록 자연의 위력에 겸손해지는 인간의 관조적 시선을 담은 문화를 지녔다는 특징이 있는데요. 바다와 맞닿은 북독일의 도시에 살았던 사람들은 어떤 마음으로 인생과 세상을 바라보았을지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는 작품입니다. 독일 북부의 그라이프스발트라는 작은 항구 도시에서 태어났던 화가, 프리드리히의 배경이 이 작품에도 반영되지 않았을까 추측해봅니다.

<해변의 수도승>
<바닷가의 달맞이>

카스파르 프리드리히는 자연을 단지 아름다운 대상, 혹은 관조의 대상으로만 여기지 않았습니다. 자연 속에서 인간 존재의 고독, 신비, 삶의 숭고함을 찾았죠. 그의 작품에는 폐허가 된 수도원, 서리 내린 들판, 해가 지는 숲, 텅 빈 회색 하늘과 조용한 바다처럼 암울하고 어두운 배경이 많습니다. 그 때문에 당시에는 지나치게 어둡고 이해하기 어렵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20세기 이후 철학, 심리학, 문학 작품에서 인간의 근원적인 감정을 전달하는 작품으로 재조명되면서 지금은 독일 낭만주의의 정수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이미지 출처: Time out

그의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은 대부분 등을 돌린 채 어디를 바라보는지, 무엇을 말하려는지 알 수 없게 모호한 곳에 서 있는데요. 관객이 그림 속으로 자신을 몰입하도록 연결하는 매개체가 되어줍니다. 이런 요소들을 하나하나 뜯어볼수록, 프리드리히의 그림 앞에서 우리는 관찰자에서 사유자로 변화하게 됩니다. 시간의 흐름을 잊고 사색에 잠기게 만드는 그림 앞에 앉아 한참 동안 자리를 뜨지 못했습니다.

하펜시티(HafenCity)와 엘프 필하모니(Elbphilharmonie)

변화를 멈추지 않는 엘베 강

슈파이허슈타트(Speicherstadt)이미지 출처: Germany sights

함부르크는 오랫동안 ‘북유럽의 관문’이라고 불릴 만큼 거대한 항구 도시입니다. 엘베강이 북해로 흘러가는 유역에 있어 19세기부터 유럽 무역의 중심이었죠. 그중에서도 붉은 벽돌 창고들이 늘어선 ‘슈파이허슈타트(Speicherstadt)는 커피, 향신료, 직물 등이 오가던 상업의 거점이었습니다.

옛 항구 지대인 엘베 강변은 ‘하펜시티(HafenCity)’라 불립니다. 산업과 무역의 중심지였던 이곳은 파란 하늘과 대비되는 붉은 벽돌 창고들이 줄지어 있어 낭만적인 풍경을 자아냅니다. 운하 사이로는 오래된 다리들이 도시의 시간을 가로질러 낭만적인 분위기를 더하죠. 하지만 과거와 달리, 산업구조가 바뀌고 대형 물류는 다른 곳으로 이전하면서 점점 기능을 다하게 된 지역입니다.

이미지 출처: KCAP

시간의 궤적을 오롯이 품은 이 지역이 도시 재생 프로젝트 중 하나로 재탄생하고 있습니다. 오래된 산업 유산은 그대로 보존하고, 그 위에 문화, 상업, 공공, 거주 공간이 어우러진 도시를 세우는 실험으로 주목받고 있는 프로젝트는 슈파이허슈타트(Speicherstadt)와 현대 건축이 공존하는 새로운 도시의 모습을 만들어냈습니다.

함부르크의 미래를 보여주는 건축, 엘프필하모니

이미지 출처: wallpapermagazine

하펜시티 프로젝트의 중심에는 스위스 건축가 헤르조그 & 드 뫼롱(Herzog & de Meuron)의 작품, 엘프 필하모니(Elbphilharmonie) 공연장이 있습니다. 바다 물결을 닮은 아름다운 곡선형 지붕이 인상적인 이 구조물은 마치 바다를 향해 뻗어나가는 거대한 배 같기도, 출렁이는 파도의 모양 같기도 합니다. 도시 어디에 있더라도 눈에 들어오는 이 건물이 함부르크의 랜드마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바다를 향해 나아가고자 하는 함부르크의 도시적 야망과도 상통하니 더더욱 그렇지요.

헤르조그 & 드 뫼롱은 1960년대에 지어진 카이슈피허 A(Kaispeicher A)라는 옛 창고 건물을 활용해 엘프 필하모니를 설계합니다. 붉은 벽돌 창고 건물을 기단으로 삼고, 그 위에 유리와 강철로 만든 완전히 새로운 구조물을 얹는 방식을 사용했습니다. 상부, 하부 구조가 맞닿은 층에서는 전통적으로 오래된 적벽돌이라는 재료와 현대의 유리, 강철이라는 재료가 어우러진 경계에서 함부르크를 내려다보는 독특한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바닥은 벽돌, 천장은 강철, 창문은 유리라는 부조화에서 도리어 서로 다른 시간이 만나 어우러졌을 때 탄생하는 ‘창의적인 조화’를 온몸으로 느낄 수 있습니다.

이미지 출처: elbphilharmonie.de

엘프필하모니는 형태와 기능이 극적으로 통합을 이룬 곳입니다. 과거 적벽돌 창고였던 하부 구조는 20세기 산업의 상징이자 하펜시티의 과거를 상징하는 구조로, 로비, 주차장, 물류, 백오피스 공간으로 활용됩니다. 그 위에 증축된 상부 구조는 최첨단 음향 설계를 바탕으로 건축된 콘서트홀과 함부르크 시내 전체가 내려다보이는 전망대이자 플라자(Plaza)로 운영되고 있고요.

이미지출처: arquitecturaviva

특별히 이곳에서 공연을 감상하기 위해 티켓을 예매했는데요. 공연 관람 전, 아름다운 도시 전체를 감상해보고자 전망대로 향했습니다. 아름다운 풍경은 말할 것도 없고, 건물 가까이 이르러 확연히 눈에 들어오는 1,000개가 넘는 곡면 유리 패널은 구조물이 살아 숨 쉬는 듯 유려한 입면을 만들어 건축물에 생동감을 더해줍니다. 외벽에 비쳐 보이는 하늘과 강의 빛은 눈부시게 반짝이며 함부르크라는 도시와 조응합니다. 마치 건축물이 도시 전체와 파도를 타며 대화를 나누는 듯했죠. 이중 곡면으로 된 이 유리는 이처럼 독창적인 파사드를 만들 뿐 아니라, 태양열을 제어하는 기능까지 넉넉히 감당하는 고마운 요소입니다.

그레이트 홀. 이미지 출처: elbphilharmonie.de

건물의 핵심 공간인 그레이트 홀(Großer Saal)은 하부의 적벽돌 창고와 완전히 분리된 이중 구조의 이 공간입니다. 외부 진동과 소음을 차단하는 데 특화된 ‘무진동 설계’로 이루어졌는데요. 철도와 항만 트럭이 지나가더라도 완전한 침묵 속에 공연을 감상할 수 있는 곳이죠. 공연장은 무대를 중심으로 객석이 계단식으로 둘러싸인 ‘빈야드(vineyard)’ 구조로, 2,000석 규모의 홀 어디에 있더라도 연주를 감상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 공연장의 공간감에 웅장함을 더합니다.

화이트 스킨 패널. 이미지 출처: elbphilharmonie.de

이곳은 세계적인 음향 디자이너 ‘야스하 히라타’가 주름처럼 설계한 ‘화이트 스킨’ 패널이 인상적인데요. 해변의 모래, 혹은 바닷속 조개껍데기를 연상시키는 독특한 텍스처가 돋보여서 마치 바닷속 공연장에서 음악을 감상하는 듯한 기분이 됩니다. 이 패널은 벽과 천장에 사용되어 최상의 음향 반사를 유도해 독보적인 감상 경험을 끌어내 주는 기특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건축 설계적, 구조적인 의미를 차치하고서라도 엘프필하모니는 함부르크의 과거와 미래가 맞닿은 특별한 작품입니다. 과거의 산업을 상징하는 구조물, 현대의 건축, 음향 공학, 공공 문화가 조율된 완성품이죠. 이곳은 단순히 전망대, 공연장 그 이상으로 함부르크가 나아가고자 하는 도시의 미래 모습 그 자체이기도 하기에 의미가 깊습니다. 탄탄하고 냉철한 구조를 바탕으로 낭만을 완성해 낸 아름다운 건축물에서 일몰을 감상하며, 함부르크의 찬란했던 과거와 더욱 활기차게 빛날 미래를 그려봅니다.


함부르크처럼 예술과 도시가 유기적으로 어우러진 도시가 또 있을까요? 함부르크는 독일을 ‘노잼 국가’라고 칭할 만한 요소들을 모두 반박할 수 있는 요소들을 품은 생동감 넘치는 도시였습니다. 브람스의 음악적 유산은 오늘날에도 함부르크의 도시 정체성을 대표해 주고, 화가 프리드리히의 작품은 북독일 특유의 감성을 넘어 독일의 정신성을 보여주고 있었죠. 엘프 필하모니와 하펜시티는 산업도시에서 문화, 나아가 경제 도시로 다시 발돋움하는 함부르크의 계획을 가시화하고 있었습니다.

고전과 현대가 어우러진 도시를 방황하며, 저는 자신의 과거와 현재도 여러 번 겹쳐가며 도시와 공명할 수 있었습니다. 도시 해석을 나의 일상 해석으로 가져올 수 있는 매개체들이 가득했죠. 왜 이 도시에서 위대한 예술이 탄생했는지 알 것 같습니다. 물은 고이는 순간 썩는다고 하는데요. 고이지 않고 흐르는 강물처럼, 함부르크는 계속해서 새로운 모습을 향해 자신의 항해를 지속하고 있었습니다. 낭만을 품은 도시 함부르크에서의 항해를 즐기며 나는 앞으로 어떤 일상을 설계해 갈 수 있을까 생각해 보는 여행, 어떠신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