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을 베끼는 키린지의 음악

음악으로 짚어보는 사계절의 신감각

계절을 베끼는 키린지의 음악

계절이 바뀔 때마다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음악이 있습니다. 음악은 소리 너머의 어떤 분위기와 기억, 감정을 함께 불러옵니다. 같은 음악이라도 언제, 어떻게 들었는지에 따라 전혀 다른 인상을 남기기도 하죠. 그래서 우리는 종종 ‘이 노래는 여름 같다’, ‘겨울에 꼭 들어야 하는 곡이다’처럼 음악에 계절을 겹쳐 말하기도 합니다.

키린지는 1996년, 형제인 호리고메 타카키와 호리고메 야스유키가 결성한 일본 밴드입니다. 시적인 가사와 독특한 세계관, 그리고 일상의 감각을 섬세하게 포착하는 멜로디로 자신들만의 음악을 구축해 왔습니다. 키린지의 음악은 계절을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감정이 통과하는 시간의 결로 묘사합니다. 그들의 선율을 따라 사계절의 새로운 감각을 느껴봅니다.


겨울: 千年紀末に降る雪は (천년 세기말에 내리는 눈은)

<Arcadia> 앨범 커버 / 이미지 출처: Apple Music

크리스마스와 새해 사이에 낀 일주일은 어딘지 붕 떠 있는 느낌을 줍니다. 들뜬 연말의 분위기 속에서 끝과 시작이 겹치는 불안한 경계를 바라보는 이들이 있습니다. 한 해 동안 울지 않은 착한 아이들이 산타의 선물을 기다리는 동안, 더 이상 아이도 아니고 스스로 착하다고 말하기도 어려운 누군가는 과거에 대한 미지근한 후회와 미래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 사이에 서 있습니다. 우울 섞인 눈이 연말의 들뜸 이면에 놓인 정적을 응시합니다. 반짝이는 거리의 장식보다 뿌연 겨울 하늘이 더 가깝게 느껴지는 시간입니다.

君が待つのは 世界の良い子の手紙
당신이 기다렸던 것은 세계의 착한 아이들의 편지
君の暖炉の火を 守る人はいない
당신의 난롯불을 지켜주는 사람은 없어
永久凍土の底に愛がある
영구 동토의 땅 그곳에 사랑이 있어
_키린지, 千年紀末に降る雪は

‘千年紀末に降る雪は(천년세기말에 내리는 눈은)’은 키린지 식의 캐럴입니다. 세기말이라는 거대한 시간의 경계 앞에서 누군가는 축제에 섞이지 못한 채 한발 물러서 있습니다. 재즈풍의 멜로디와 걷는 보폭을 닮은 미드 템포는 우아함과 긴장감을 동시가 만들어 냅니다. 겨울의 불빛은 세계를 낭만적으로 만드는 것 같지만 축제 밖에 서 있는 이에게 그것은 오히려 처연한 감각을 불러일으킵니다.

곡이 진행되며 박자가 조금씩 보폭을 넓히면 보컬은 ‘영구 동토의 땅’에 있을 ‘사랑’을 노래합니다. 따뜻한 난롯불이 꺼지더라도 누군가는 아무도 찾지 않는 얼어붙은 땅에서 사랑을 찾아냅니다. 무거워진 하늘에서 눈이 내리기 시작하면 냉소적인 자세로 팔짱을 끼고 있다가도 손을 내밀어 눈송이를 잡아보게 됩니다. 투명하고 느릿한 계절을 바라보며 잃어버린 줄 알았던 사랑을 떠올립니다.

봄: Mimi O Uzumete

<47'45''> 앨범 커버 / 이미지 출처: Apple Music

새해가 밝고 차가운 공기가 서서히 물러갑니다. 지난해의 꺼지지 않을 것 같던 열정은 이제 먼 잔향만 남긴 채 사라졌습니다. 무언가 시작되어야 할 것 같은 계절이지만 마음에 남은 건 오히려 끝나버린 열기의 흔적입니다. 하지만 봄은 언제나 은밀하게 옵니다. 얼어붙은 땅을 밀고 올라오는 풀포기, 마른 가지에서 솟아나는 새순, 귀를 아주 깊숙이 파묻어야지만 겨우 들을 수 있는 초록의 기척을 들어봅니다.

“憂鬱はまさにそう! 凪いだ情熱だ”
“우울이란 바로 그런 것! 잔잔해진 열정이다”
_키린지, Mimi O Uzumete

키린지는 열정이 지난 뒤 찾아온 가벼운 우울을 음악으로 번역합니다. ‘Mimi O Uzumete’는 청각적 촉감이 강조된 곡입니다. 가볍게 달리는 듯한 박자는 흩뿌려지는 멜로디와 만나 긴장보다는 몽롱함을 형성합니다. 세밀하게 조정된 소리의 레이어가 서로 얽히며 어딘가 비어 있는 듯한 신비로운 공간감을 만들어 냅니다. 그 틈 사이로 퍼져나가는 소리에 귀를 기울입니다. 물기를 머금은 봄의 풀밭처럼, 뜨거운 열정이 지나간 자리에 남은 것은 무미건조한 삶이 아니라 조용하고 선명한 생의 기척입니다.

여름: Crazy summer

<Sweet Soul> 앨범 커버 / 이미지 출처: Apple Music

여름은 극단의 계절입니다. 타오르는 태양과 모래, 부서지는 파도와 짠 바다의 맛까지. 모든 감각이 과잉 상태로 밀려옵니다. 사랑도, 후회도, 분노도 쉽게 폭주하는 여름의 풍경은 때로 난폭하기까지 합니다. 여름은 이미 너무 깊이 빠져버린 시간이고,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헤어 나오지 못하는 계절입니다.

亂暴に愛した
난폭하게 사랑했어
夏の終わり
여름의 끝
Sunset
선셋
_키린지, Crazy summer

‘Crazy summer’는 지나가는 강렬한 사랑의 찰나를 포착합니다. 맑은 톤의 기타와 시원하게 뻗는 멜로디는 수면에 반사되는 햇빛처럼 반짝이는 음악의 질감을 만듭니다. 그러나 청량한 사운드와 달리 멜로디의 변화와 보컬의 목소리에는 왠지 모를 쓸쓸함이 배어 있습니다. 이것은 영원할 것처럼 뜨겁지만 그것이 결국 끝날 것임을 알고 있는 사람의 여름입니다. 이 곡이 그리는 것은 여름의 광기가 아니라 광기가 지나간 뒤에 남는 서늘함의 미학입니다.

가을: Drifter

<Fine> 앨범 커버 / 이미지 출처: Apple Music

가을은 정돈의 계절입니다. 차가운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지난 계절의 약속과 선택을 되돌아봅니다. 자연의 가을이 수확의 계절이라면 도시의 가을은 차갑고 건조합니다. 때때로 우리는 서로를 찾아 공중을 표류하는 낙엽 같습니다.

그러다 달빛이 비치는 가을 새벽, 냉장고에서 차가운 물을 꺼내 마시며 정신이 맑아질 때, 자고 있는 누군가의 옆모습을 보여 조용한 약속을 합니다. 때로는 쓸쓸하고 비참한 현실을 맨정신으로 견뎌내겠다고. 떨어지는 낙엽을 보며 슬퍼하기보다, 바닥에서 비로소 생에 가장 가까이 닿은 잎사귀와 드러난 하늘의 광활함을 마주하겠다고 말입니다. 

たとえ鬱が夜更けに目覚めて 獣のように襲いかかろうとも 
설령 슬픔이 늦은 밤 잠에서 깨어 짐승처럼 나를 덮친대도 
祈りをカラスが引き裂いて 
간절한 기도를 까마귀가 갈라놓고 
流れ弾の雨が降り注ごうとも 
유탄 같은 빗줄기가 퍼붓는다 하더라도 
この街の空の下 あなたがいるかぎり 
이 거리 하늘 아래 당신이 있는 한 
僕はきっとシラフな奴でいたいのだ 
나는 꼭 괜찮은 놈이고 싶어
_키린지, Drifter

절제된 건반으로 시작되는 곳은 독백처럼 조용히 흐르다가 현악기가 더해지며 웅장한 밀도를 얻습니다. 슬픔과 숭고함을 함께 만들어 내는 멜로디는 후반부에서 절정에 달했다가 다시 초반의 정적인 상태로 돌아옵니다. 이 지점은 폭풍이 지나간 뒤의 새벽녘 같은 고요함과 표류를 끝내고 땅을 딛는 안도감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 곡의 제목인 ‘Drifter’는 방랑자를 뜻합니다. 다시 돌아온 자리이지만 전혀 다른 내가 되어 있다는 감각은 이 음악의 숭고함과 맞닿아 있습니다. 


신형철 평론가는 일상의 단어와 감각을 길어 올리는 음악에 대해 ‘멋진 시(노래)는 굴러다니는 단어 하나를 깨끗하게 닦아서 영원히 가져가 버린다’고 말했습니다. 키린지의 음악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던 계절의 언어와 감각을 닦아 자신들만의 음악으로 가져갑니다. 이들의 노래를 듣고 나면 계절은 더 이상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내가 직접 통과해 온 살아있는 감정으로 몸에 남습니다. 키린지는 그렇게 우리의 사계절을 조용하게 베껴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