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장의 스승은 누구인가

존경과 모방의 20세기 예술사

거장의 스승은 누구인가

화제의 요리 서바이벌 예능 <흑백요리사> 에는 사제관계가 종종 등장합니다. 33년 스승인 후덕죽 셰프 밑에서 요리를 배운 천상현 셰프는 대결을 마친 뒤 "저는 영원한 사부님의 제자입니다"라며 진심 어린 존경을 고백해 깊은 울림을 남겼죠.

예술계에서도 사제간의 존경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많은 예술가들은 요리를 배우듯이 스승을 따라하는 과정에서 자신만의 예술적 세계를 만들어 나가곤 했습니다. 스승을 따라 칼질과 재료 손질을 배우는 것처럼 형태의 기본기를 쌓고, 자신만의 레시피를 만들듯이 예술적 세계관을 형성합니다.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라는 말을 굳이 꺼내지 않더라도 유수한 예술가들을 지금의 자리에 있게 한 데는 보고 따라 배울 수 있는 스승의 존재가 강력하게 작용했다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아는 거장들은 어떤 스승을 모시고 모방하며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 수 있었을까요? 거장의 스승은 어떤 이들이었을까요? 사제관계를 중심으로 20세기 예술사를 살펴봅니다.

김중업의 건축 언어에 영향을 미친 르 코르뷔지에

이미지 출처: 김중업건축박물관

30살의 청년 건축가 김중업은 1952년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 아틀리에에 합류합니다. 베니스에서 개최된 제1회 국제예술가대회에 김중업이 한국 대표로 파견된 것이 계기였죠. 동경하던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를 만난 김중업은 적극적으로 건축사무소의 입사 의지를 밝히며 파리로 건너갔습니다.

르 코르뷔지에의 건축 정신을 가까이에서 보고 배울 수 있던 3년 2개월은 김중업의 건축 여정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 인도 샹디갈 수도 계획을 비롯해 여러 프로젝트에 참여했죠. 320여 개의 도면을 그리는 동안 모더니즘 건축의 언어를 흡수했습니다. 예술과 기술을 종합하는 바우하우스의 정신이나 이른바 '현대 건축의 5원칙'이라 불리는 르 코르뷔지에의 원칙은 고스란히 김중업의 건축에도 녹아들었습니다. 심지어는 스승의 뿔테 안경과 나비 넥타이, 수트를 따라 입으며 일상적으로도 르 코르뷔지에의 모든 면을 흡수하고자 했죠.

주한프랑스대사관 / 이미지 출처: 김중업건축박물관
이미지 출처: 김용관

한국으로 돌아온 김중업은 르 코르뷔지에의 유일한 한국인 제자로, 서구 모더니즘 건축을 국내로 들여온 선구자로 이름을 알리기도 했습니다. 1950-60년대 김중업의 초기작에는 특히 르 코르뷔지에의 모티브가 잘 드러나는데요. 인천 해무청 계획안에서는 필로티가, 서강대학교 본관에는 모듈러 구조가 적용되었죠. 삼일빌딩은 모더니즘의 대표적인 유리와 철골 구조 고층 빌딩을 그대로 옮겨냈어요.

초기에는 르 코르뷔지에의 조형 언어에 대한 비교적 직접적인 차용이 두드러졌다면, 시간이 흐를수록 김중업은 스승의 영향을 넘어서고자 했습니다. 이때 한국적 지역성과 정체성을 조화하는 방식을 활용했습니다. 서구 모더니즘의 언어와 한국적 정체성에 대한 탐구가 결합하며 김중업의 건축 세계는 점차 확장되었죠.

그 정점에는 김중업의 대표작으로 불리는 주한프랑스대사관이 있습니다. 한국 기와지붕의 곡선을 미니멀한 조형으로 구현했는데요. 콘크리트 지붕은 단순해 보이지만 정교한 곡률로 인해 한국적인 멋이 드러나죠. 정문부터 옥상까지 산책하듯이 공간을 경험하는 설계 방식은 르 코르뷔지에의 산책로(promenade)를 떠올리게 하는 한편, 경사지를 자연스럽게 활용하는 사찰 건축의 배치와도 닮아 있습니다.

김중업과 르 코르뷔지에의 관계에 대해서는 <대화: 두 건축가의 운명적 만남> 전시에서도 자세히 살펴볼 수 있는데요. 전시가 열리는 '연희정음'은 김중업의 만년작 주택을 개조한 공간이기도 합니다. 이곳에서 스승의 건축 세계를 발판 삼아 독자적인 건축관을 구축한 김중업의 이야기를 만나보시길 바랍니다.

존 케이지에 대한 존경을 퍼포먼스로 보여준 백남준

백남준과 존 케이지 / 이미지 출처: 아트센터 숨

"이것도 예술인가요?" 충격과 생소함을 주는 전위적인 예술가 백남준은 어떻게 탄생했을까요? 무엇보다도 스승과의 만남을 짚어보고 싶은데요. 전위 음악가 존 케이지(John Cage)는 백남준에게 무한한 영감을 준 20년 스승입니다. 아무런 소리도 연주하지 않는 연주곡 <4분 33초>의 작곡가로 유명하죠. 존 케이지는 일상적인 소리와 소음에 관심을 가지며 음악의 본질에 대해 질문하고 그 영역을 확장했습니다.

어려서부터 피아노를 좋아했던 백남준은 대학에서 음악과 미술사를 전공했어요. 독일 유학 이후 1958년 다름슈타트 국제 현대음악 여름학교에서 존 케이지와 만나게 됩니다. 백남준은 예술의 본질을 묻는 존 케이지의 전위적인 작품들에 매료되었고, 얼마 후 그에게 헌정하는 작품을 선보였어요. 1959년 뒤셀도르프 갤러리 22에 공연된 <존 케이지에 대한 경의: 테이프 리코더와 피아노를 위한 음악>입니다. 베토벤, 라흐마니노프의 연주곡부터 수탉 울음소리와 유리 깨지는 소리 등의 일상적인 소리까지 함께 공연했고, 이를 녹음한 릴 테이프를 액자에 넣어 설치했어요. 일상의 소음을 음악으로 만든 존 케이지의 작품은 백남준에게서 시청각적 작품으로 확장합니다.

내 삶은 1958년 8월 저녁 다름슈타트에서 시작되었어. 존 케이지를 만나기 전 해인 1957년이 내게는 기원전 1년이 되지. - 백남준
이미지 출처 : 백남준아트센터

그 밖에도 백남준은 수차례 존 케이지에 대한 헌정 작품을 만들었습니다. 스승의 이름을 언어유희로 활용해 '새장 속 케이지(Cage in the Cage)'라는 장난스러운 작품을 선보이기도 했고요. 가장 적극적으로 사용한 방식은 '행위예술'이었습니다. 넥타이를 자르고,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부수고, 누드의 인체를 첼로처럼 연주하는 충격적인 행위들은 당대의 용어로 '해프닝'이라고 소개됩니다. 오늘날에는 '퍼포먼스' 아트로 불리죠. 백남준의 퍼포먼스가 주목받은 첫 번째 계기는 바로 존 케이지의 넥타이를 자르는 일이었습니다. 1960년 <피아노포르테를 위한 습작>에서 백남준은 2대의 피아노를 부수고 객석에 앉아 있던 존 케이지의 넥타이를 잘랐습니다. 음악에 대한 테러라고 불릴 정도로 충격을 준 이 '해프닝'은 곧 백남준을 상징하는 전위적 퍼포먼스로 자리 잡습니다.

백남준의 타계 후 장례식에서 예술가 동료였던 오노 요코(Ono Yoko)는 조문객의 넥타이를 잘랐습니다. 백남준에 대한 헌정 퍼포먼스였죠. 300여 명의 조문객이 마치 백남준이 존 케이지에게 그러했듯이 서로의 넥타이를 잘랐습니다. 이처럼 모방의 퍼포먼스는 동료 혹은 스승에 대한 깊은 존중과 존경을 담습니다.

바우하우스로 이어진 사제관계, 요하네스 이텐과 군타 슈퇼츨

바우하우스의 마이스터들 속 군타 슈퇼츨 / 이미지 출처: dpa
이미지 출처: guntastolzl
친애하는 이텐에게,
1920년 바이마르 바우하우스에서 저를 여성 직조 공방 학생으로 받아주신 것을 기억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 오늘날 우리는 감사드립니다. 우리가 자신만의 길을 갈 수 있도록 해주셔서요! 선생님의 기초 과정에서 형태론, 질료론, 색채론 - 구성 - 질감 - 직물을 배웠고 (나중에 크리스마스 시장에서 팔렸던) 벽걸이와 장난감 동물들을 만들었습니다. 이 동물들 중 하나인 오벤버가 아직 보존되어 있어 보내드리려고 합니다.
군타 슈퇼츨, 1963.11.11. 취리히에서.

건축과 예술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바우하우스'는 공방의 도제 시스템으로도 유명한 교육 기관이었습니다. 금속, 목공, 도자, 연극, 직조 등 다양한 공방을 두고 공방마다 스승인 마이스터(Meister)가 존재했어요. 이는 견습생이 장인의 밑으로 들어가 기술을 배우는 중세 길드 시스템을 모방한 것이었죠. 바우하우스의 학생들은 스승과의 긴밀한 관계 속에서 예술과 기술을 발전시켜 나갔습니다.

그중에서도 직조 공방의 군타 슈퇼츨(Gunta Stölzl)은 학생으로 출발해 마이스터가 된 독특한 예술가입니다. 바우하우스의 유일한 여성 마이스터이기도 했고요. 1919년 바우하우스 개교와 함께 입학한 슈퇼츨은 곧바로 요하네스 이텐(Johannes Itten)의 예비 교육을 들었습니다. 6개월의 예비 교육 기간 동안 모든 바우하우스 학생들이 형태와 색채의 기본 원리를 학습했어요. 슈퇼츨은 특히 이텐의 교육 과정을 흥미롭게 묘사했는데요. 함께 모여 빈 방의 바닥에 앉아 스케치북에 목탄이나 연필로 엉겅퀴 같은 식물 혹은 환상의 동물들을 스케치하는 시간을 즐겁게 여겼습니다.

이텐은 색채 이론으로 유명한 화가이지만, 수공예와 직조의 가치를 중시하는 예술가이기도 했어요. 직물 디자인과 태피스트리 작품에 몰두하기도 했죠. 기계에 비해 수공예를 평가절하하고, 직조를 '여성의 것'으로 규정했던 다른 바우하우스의 지도자들과는 다른 부분이었습니다. 자연스럽게 슈퇼츨은 이텐과의 교류를 즐겁게 여겼어요.

이텐은 슈퇼츨이 1920년 '여성 클래스'를 만들고, 직조 수업을 확장할 수 있게끔 도왔는데요. 여러 베틀과 작업 공간을 확보할 수 있게 하고, 형태 마이스터로서 도움을 주었죠. 슈퇼츨은 수십 년의 시간이 흐른 뒤에도 이텐의 가르침과 도움에 감사를 표하는 편지를 쓰기도 했습니다.

직조공방에서 슈퇼츨은 추상회화에 가까운 작업부터 산업용 텍스타일 디자인까지, 폭넓은 범위의 작품을 생산했습니다. 이텐과 파울 클레(Paul Klee)의 회화에서 영향을 받은 슈퇼츨의 직물은 단순히 실내 장식으로만 기능하지 않고, 순수회화로서 예술적 가치를 지녔죠. 마르셀 브로이어(Marcel Breuer)의 의자 디자인에 쓰일 직물을 제작했고, 건축에서 직조의 역할에 대해 고민했습니다. 슈퇼츨의 직조 작업은 바우하우스가 주장하는 '예술과 기술의 통합'에 부합했어요.

이텐이 1923년 바우하우스를 떠난 후에도 슈퇼츨은 직조 공방을 발전시키며 스스로 마이스터로 성장해갔습니다. 1925년부터 공예 마이스터가 된 슈퇼츨은 1931년 바우하우스를 떠나기 전까지 직조 공방에서 학생들을 지도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하지만, 여성이라는 이유로 남성 동료들보다 낮은 급여를 받았고, 정치적 압력으로 결국 사임해야 했죠. 마이스터로서의 생활은 순탄치 않았지만 스승인 요하네스 이텐과의 만남이 중요한 분기점이 되었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슈퇼츨은 바우하우스의 도제식 교육 과정을 잘 보여주는 인물입니다. 이텐의 교육을 받으며 스승을 따라 자신의 직조 작업을 펼칠 기회를 얻었고, 다시 스승으로서 직조 공방의 제자들을 길러냈기 때문이에요.


잘 알려진 예술계의 거장들에게도 아이처럼 따라하게 되는 스승의 존재가 있었습니다. 처음엔 스승을 따라 배우며 발전하다가 이후에는 그 세계를 극복하고 자신만의 방식을 찾아 나서죠. 많은 예술가들의 작업 세계는 스승이라는 알에서 자라 깨고 나오는 과정으로 완성되었습니다.

'스승'이라는 말을 일상적으로 쓰기에는 어쩐지 어색하게 느껴지는 요즘입니다. 여러 분야에서 장인이 자신의 기술을 직접 물려주는 도제식 교육을 찾아보기 쉽지 않으니까요. 그러나 스승을 찾기 어려운 시대일수록 진심을 나누는 사제관계가 더 큰 감동을 주는 것 같습니다. 따라하고 싶은, 언젠가는 도달하고 싶은 스승이 있나요? 거장의 스승 이야기를 통해 각자의 스승에 대해서도 떠올려 보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