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각의 해상도
감각 인플레이션의 시대, 우리가 말하는 감각의 뉘앙스
언어도 패션처럼 시대를 탑니다. 몇 년간 유독 자주 눈과 귀에 들어온 단어가 있습니다. 바로 '감각'입니다. ‘감각적인 공간, 감도 높은 브랜드, 감각 있는 사람’과 같은 말들, 어디선가 한 번쯤 들어본 적 있지 않으신가요?
그런데 이런 표현들은 다소 추상적이고 모호합니다. 화려해 보이지만 어딘가 공허합니다. 감각적인 게, 감도 높은 게 도대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알고 싶어집니다. 어쩌면 우리는 ‘감각’이라는 있어 보이는 라벨 뒤에 숨어 그 안에 담긴 맥락과 디테일에 대한 묘사를 편리하게 건너뛰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동안 흐릿하게 소비되던 감각이라는 단어의 해상도를 조금 더 높여보고 싶습니다. 이 시대의 화두가 된 감각에는 오감으로 온전히 담아내지 못하는 미묘한 뉘앙스가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선택을 이끌어내는 힘에 가까운 감각입니다.
이 아티클은 막연한 느낌을 넘어, 일종의 ‘능력’으로 자리 잡은 감각의 의미를 탐구합니다.
감각 인플레이션의 시대
유사 이래 이렇게 많은 선택지를 마주한 시대는 없었습니다. 시청각 정보도 끝이 없죠. 눈을 뜨는 순간부터 잠들기 직전까지 온갖 이미지, 소리, 활자에 노출됩니다. 기술의 발전과 함께 사람들의 미적 기준도 상향평준화 됐습니다. 기능만 갖춘 것으로는 부족합니다. 지금은 감성과 상상력을 자극하는 그 무언가가 우리의 선택을 좌우하죠. 바로 이 지점에서 감각은 영향력을 발휘합니다.
감각은 언어로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이 모호함 덕분에 감각이라는 단어는 더 유용해졌습니다. 설명하기 애매한 것들을 간편하게 포장해 주니까요. 그 결과 감각은 더 넓게, 더 쉽게 쓰이는 말이 됐습니다. 통화량이 늘어나면 화폐가치가 떨어집니다. 감각도 비슷합니다. 빈번하게 쓰이는 과정에서 감각이 지닌 의미는 희미해졌습니다. 이른바 감각의 인플레이션 현상이 발생한 겁니다.
느낌을 넘어 능력으로서의 감각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감각은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즉 오감(五感)으로 대표됩니다. 엄밀히 말하면 오감은 개념적인 구분일 뿐입니다. 감각은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음악을 들으며 장면을 상상하고, 그림을 보며 온도와 질감을 느낍니다. 인간의 뇌는 서로 다른 채널로 들어온 말초적 감각을 중추신경에서 하나의 지각적 판단으로 통합합니다. ‘분위기, 무드, 결, 기세’ 같은 전반적인 인상은 이 통합된 지각 경험에서 비롯됩니다. 이것이 ‘느낌’으로서의 감각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느낌이 아니라 ‘능력’이라는 맥락에서도 감각을 사용합니다. 예를 들면 ‘직업인의 감각’, ‘감각 있는 사람이 살아남는다’ 같은 문장을 떠올려보죠. 이때 감각은 상황을 읽고 적절한 결정을 내려 현실에 구현해내는 힘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저는 시대의 경쟁력이자 역량이 된 감각을 이렇게 표현해보고 싶습니다.
1) 감각은 맥락적이다
감각과 함께 자주 언급되는 단어가 ‘취향’입니다. 그렇다면 취향과 감각은 어떻게 다를까요? 취향은 마음이 향하는 방향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 내가 끌리는 것처럼 취향은 ‘나’를 중심으로 하는 개념입니다. 1인칭 시점이죠. 취향과 비교하면 감각은 3인칭 시점에 더 가깝습니다. 언제나 외부 대상과의 관계 속에서 드러나는 것이 감각입니다. 그 대상이 사람이든, 사물이든, 공간이든 서로가 연결되어 맥락이 생기는 순간 비로소 감각이 존재합니다.
그래서 감각은 고정 되어있지 않습니다. 상황에 따라 계속해서 달라지죠. 그때그때 맥락에 맞는 적절함을 요구합니다. VAN 자켓의 창립자 이시즈 겐스케가 제시한 TPO라는 개념이 좋은 비유가 되겠습니다. 시간(Time), 장소(Place), 상황(Occasion)을 고려한 때에 맞는 옷차림과 비슷합니다. 페스티벌에서 입는 옷과, 비즈니스 미팅에서 입는 옷은 다를 것입니다. 감각도 마찬가지입니다. 대상을 둘러싸고 있는 배경과 이야기가 그려질 때 감각이 발휘됩니다.
2) 감각은 직관적이다

감각은 언어보다 빠릅니다. 논리적인 추론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반응하고 떠오릅니다. 자연스럽고 무의식적인 과정입니다. 우리가 감각을 설명하기 어려운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이미 느낀 것을 역추적하면서 번역해야 하니까요. 암묵지를 형식지로 바꾸는 작업입니다. 적확한 표현을 찾으려 애쓰지만 애초에 언어로 사고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쉽지 않습니다.
이 직관성과 설명하기 어렵다는 특성이 감각에 대한 미묘한 거리감, ‘아우라’를 만들어냅니다. 우리는 무언가 특별해 보이는 것을 봤을 때도 감각적이라고 표현하죠. 그래서 타고난 재능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감각은 경험과 피드백의 축적을 통해 발전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추상적인 개념과 영감이 아니라, 구체적인 선택과 결과 속에서 드러나는 힘이 감각이기 때문입니다.
3) 감각은 판단력이다
우리가 “감각 있다. 감각적이다”라고 느끼는 대상은 수많은 가능성 사이에서 판단하고 선택한 결정들의 총합입니다. 실현되지 못한 시도와 아이디어는 한 개인의 관념 속에 머물 뿐입니다. 현실에 구현된 결과만이 세상과 타인을 만나 감각의 대상으로 인식됩니다.
잠시 화면에서 시선을 돌려 주위를 살펴봐 주세요. 수많은 사물이 여러분을 둘러싸고 있을 겁니다. 이 모든 것들이 누군가의 감각이 만들어낸 결과물들입니다. 무엇을 더하고, 무엇을 덜어낼지 끊임없이 고민하며 내려온 판단들이 물성이 있는 형태가 되어 여러분들과 만난 겁니다.
오늘 걸어가며 골라 들었던 노래, 누군가에게 건네는 섬세한 말 한마디, 책상에 물건을 배치하는 방식. 이렇게 개인의 취향에서 비롯한 선택들도 타인과 소통하며 공유되는 순간, 그 사람만의 감각으로 받아들여집니다.
일상은 선택의 연속입니다.
우리는 매 순간 감각을 발휘하고, 동시에 서로의 감각 속에서 연결되며 살아갑니다.
언어의 한계와 우리에게 필요한 질문

노자는 《도덕경》에서 “도를 도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참된 도가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감각도 비슷합니다. 언어로 고정된 감각은 불완전합니다. 상황에 따라 달라지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이 감각이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언어로 생각하고 소통하는 존재입니다. 그렇다면 ‘감각적이다’라는 납작한 표현에서 나아가 자신만의 언어로 입체적인 관점을 만들어가 봅시다. “왜 좋지?” “어디가 어떻게 별로지?” 질문을 던지고, 잠정적인 결론을 용기 있게 내려보면서요. 진리는 아닐지 몰라도, 일리가 있을 겁니다. 주관적인 의미의 세계에 정답은 없습니다. 다양한 해석이 공존하며 서로를 설득해나갈 뿐입니다. 오늘의 의견이 내일 달라져도 괜찮습니다. 당장은 ‘지금 여기’의 나를 설득할 수 있으면 충분합니다. 그렇게 하루하루 내 안에 축적된 자기언어는 언젠가 타인의 마음을 움직이는 감각으로 이어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