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의 새로운 예술 허브, 프리즈 하우스 서울

권태와 매너리즘을 이겨내는 새로운 도전

아시아의 새로운 예술 허브, 프리즈 하우스 서울
이미지 출처: Frieze

무언가 새로운 일을 시작할 때의 기쁨도 잠시, 어느 순간 권태를 느끼거나 매너리즘에 빠집니다. 일상마저 지루하게 느껴지죠. 이럴 때 가장 효과적인 탈출구 중 하나는 ‘새로운 일을 벌이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새로운 일을 시작하면 그 과정에서 다시 초심을 떠올리고, 낯선 도전에 적응하며 잊고 있던 재미를 되찾을 수 있죠.

프리즈(Frieze)가 지금의 위치에 오를 수 있었던 이유 또한 끊임없이 새로운 일을 만들고 도전하며 초심으로 돌아가려는 태도 덕분 아닐까요. 1988년 영국의 허름한 창고에서 시작한 프리즈는 이제 21세기 현대미술의 흐름을 이끄는 세계적인 아트페어가 되었습니다. 물론 아트페어라는 형식상 상업성을 전제로 하지만, 프리즈는 그 안에서도 실험적 시도와 긴장감을 유지하며 자신만의 정체성을 구축해왔습니다. 새로운 환경과 과제에 기꺼이 몸을 던지는 그 태도야말로, 긴장과 활력을 불어넣으며 긴 여정을 지속하게 하는 힘일 겁니다.

2022년, 프리즈는 한국의 아트페어 ‘키아프(KIAF)’와 손을 잡고 공동으로 아트페어를 개최했습니다. 팬데믹을 거치며 한국 미술 시장의 가능성을 목격했기 때문이죠. 그리고 3년이 지난 지금, 프리즈는 또 하나의 새로운 일을 벌였습니다. 바로 ‘프리즈 하우스 서울(Frieze House Seoul)’입니다.

이미지 출처: Frieze

예술 작품만을 위한 집

서울 약수동의 가파른 언덕길 위, 외관만 보면 평범한 주택 한 채가 있습니다. 바로 오랫동안 비워져 있던 주택을 개조해 만든 ‘프리즈 하우스 서울’이죠. 대문을 지나 마당에 들어서는 순간 펼쳐지는 일본 건축 스튜디오 ‘사나(SANAA)’의 설치 작품은 이곳은 오로지 예술을 위해 존재하는 공간임을 알립니다.

둥글게 마감된 화강암 벽과 정제된 목재 계단, 헤링본 타일 바닥, 그리고 중앙부의 높은 천장이 만들어내는 중정 속에서 작품들은 각각의 맥락과 메시지를 지닌 채 내부 공간에 자연스럽게 녹아듭니다. 개방된 구조는 각 공간을 구획하면서도 유기적으로 이어져 있어, 관람자는 계단을 오르내리며 다양한 각도에서 작품을 감상할 수 있죠. 특히 전시 공간에서는 보기 드문 유리 블록 창이 자연광을 조절하면서 작품을 보호하고, 동시에 이곳이 ‘가정집’이었다는 감각을 넌지시 환기합니다.

이미지 출처: Frieze

프리즈, 건축사무소 효자(Samuso Hyoja), 그리고 디자인 스튜디오 아워레이보(Our Labour)의 협업으로 탄생한 이 공간은 마치 예술적 진공 상태와도 같습니다. 난간 하나, 창문 하나에도 ‘작품의 의미를 어떻게 가장 효과적으로 드러낼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이 스며 있죠. 동시에 전형적인 화이트 큐브의 형식을 한국적 감각 안으로 끌어들입니다. 서구적인 전시 규범이 서울 약수동이라는 지역성과 만날 때 생기는 낯설고 생경한 조합은, 문화적 교류와 담론의 새로운 지형을 제시하려는 프리즈의 의도를 분명히 보여줍니다.

<언하우스> 전시 전경, 이미지 출처: Frieze

현대미술의 새로운 글로벌 허브

이번 프로젝트에서 프리즈가 시도한 것은 단순히 연례 아트페어의 부속 공간을 만드는 일이 아닙니다. 그들은 서울을 한국 현대미술과 국제 담론이 교차하는 아시아의 예술적 거점이자 새로운 예술 허브로 확장하려는 비전을 세웠습니다.

프리즈는 세계적인 아트페어답게 강한 상업성과 시장성을 지닙니다. 전 세계 작가, 미술 관계자, 컬렉터, 언론이 모인 현장에서는 “어떤 작품이 잘 팔리는가”, “최고가를 경신한 작가는 누구인가”, “어느 갤러리가 가장 높은 수익을 올렸는가” 같은 이야기가 오갑니다. 그 속에서 오롯이 작품과 작가에게 집중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Frieze Seoul 전시 전경, 이미지 출처: The Korea Herald

그러나 예술은 시장이 아닌 담론의 장 위에서 살아 숨쉴 때 비로소 의미를 가집니다. 예술은 실체 없는 형이상학이 아니라, 우리의 삶과 관계 맺으며 사회를 비추는 행위이기 때문이죠. 담론과 유리된 예술은 오래 지속될 수 없으며, 그런 예술을 다루는 아트페어 역시 오래가기 어렵습니다. 프리즈는 바로 그 지점에서 상업성을 완화하고, 예술의 본질적 의미를 되짚어보는 선택을 한겁니다.

특히 이주, 젠더 등 동시대 예술의 주요 담론은, 빠르게 변화하는 한국 사회의 정치, 사회적 환경 속에서 그 의미와 역할이 더욱 선명해집니다. 그래서 프리즈 하우스는 서울의 한복판에서 실험적이고 정치적인 행위로서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문화적 실험실을 세우고자 한거죠.

<언하우스> 전시 전경, 이미지 출처: Frieze

프리즈 하우스의 첫 번째 실험, <언하우스>

누군가에게 ‘집’은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지켜주는 아늑한 피난처이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가장 친밀한 전쟁터이기도 합니다. 큐레이터 김재석은 개관전〈언하우스(Unhouse)> 를 통해 퀴어(Queer)들에게 ‘집’이 지니는 양가적 의미를 탐구합니다.

전시는 신체/정체성, 공간/권력, 관계/돌봄, 기억/전승이라는 네 가지 키워드를 중심으로 꾸려졌습니다. 최하늘, 듀킴, 박그림, 캐서린 오피(Catherine Opie), 안네 임호프(Anne Imhof) 등 14명의 작가가 ‘집’을 퀴어적 시선으로 재해석하죠. 그리고 질문합니다.

"집에 대한 감각은 성별이나 성적 지향에 상관없이 누구에게나 보편적인가?"
"퀴어에게 집은 어떤 의미를 지닐 수 있는가?"

<언하우스> 전시 전경, 이미지 출처: Frieze

개관전은 공간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일종의 선언문입니다. 앞으로 이곳에서 어떤 대화와 전시, 담론이 펼쳐질지를 예고하는 프롤로그이기도 하죠. 프리즈 하우스 서울이 〈언하우스〉를 첫 전시로 택한 것은, 바로 자신들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분명히 드러내기 위함일 것입니다.

퀴어 아티스트들이 보여준 것처럼, 익숙한 것을 낯설게 바라보고, 위계를 해체하며, 억압에 저항하는 이번 전시는 프리즈 하우스의 지향점이자, 프리즈에게 예술이 가지는 의미 자체이기도 합니다. 예술의 진정한 가치는 작품의 거래가치가 아니라, 바로 ‘지금까지 당연하다고 여겨온 것들’을 해체하고, 낡은 사고를 전복하며 침묵 대신 발화하는 데 있습니다.


프리즈와 아트페어, 그리고 서울을 바라보는 시선은 늘 복잡했습니다. 프리즈가 한국 미술 시장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 넣었다는 평가도 있지만, 동시에 ‘이게 과연 서로에게 득이 되는 일일까’, ‘거대한 프리즈의 그늘 아래서 키아프가 설 자리를 잃는 건 아닐까’ 하는 우려도 있었죠.

그래서 이번 프리즈 하우스 서울은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기 위한 시도일지도 모릅니다. 처음으로 돌아가, 앞으로의 프리즈와 한국 미술의 관계를 새롭게 정립해보기 위해서요. 프리즈 하우스가 그런 돌파구가 될 수 있을까요? 물론 앞으로 어떤 전시를 선보이고, 그 안에서 어떤 이야기가 오가느냐에 달려 있겠죠.

확실한 건, 프리즈가 또 한 번 ‘새로운 일’을 벌였다는 사실입니다. 프리즈 하우스가 현대미술의 새로운 지평을 열 수 있을지, 아니면 잠깐의 실험으로 끝날지는 아직 아무도 모릅니다. 다만 그 불확실함 속에서 다시 긴장과 활력이 생겨난다는 건 분명합니다. 어쩌면 그게, 프리즈가 여전히 흥미로운 이유 아닐까요?

Frieze House Seoul | Friez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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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즈 하우스 서울 공식 홈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