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자유와 존엄을 고집하는 세 권의 책

자기 자신이기를 고수하는 일

영화〈The Lonely Passion of Judith Hearne〉. 이미지 출처 : IMDb
영화〈The Lonely Passion of Judith Hearne〉. 이미지 출처 : IMDb

어떻게 자유롭고 존엄한 삶을 일구어 나갈 수 있을까요? 삶의 안전이 쉽게 위협 받고, 공동체의 균열을 일상에서 흔히 목도하는 시대입니다. 함께 사는 일도 어려운 마당에 자유나 존엄을 깊이 숙고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에요. 명상이나 수행에 시간을 쓰는 사람이 많아지는 까닭은 그런 데 있는지도 모릅니다.

흔히 자유나 존엄의 조건은 정치적, 경제적 자유, 의료 시스템이나 품위처럼 협소한 범위에서 셈해집니다. 그런데 특정한 능력이나 체계를 확보하면 자유와 존엄이 지켜질 수 있는 것일까요? 능력과 체계는 자유와 존엄의 필요조건이지만, 충분조건은 아닌 것 같습니다. 외부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는지, 살아갈 수 있는지가 자유롭고 존엄한 삶을 설명할 수 있다면, 그런 삶은 자신의 자유와 존엄을 관철시키는 태도에서 좀더 근본적으로 성립되는 것일 테니까요.

이번 아티클에서 소개하는 소설들은 자유롭고 존엄한 자신으로 살기 위해 고투하는 인물들을 보여줍니다. 이들은 주위의 요구에 따르지 않고 자기 삶의 방식을 밀고 나가는, 고집스럽고 껄끄러운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이 이상한 사람들의 고집은 우리에게 산에 은거하거나 막대한 부를 거머쥐지 않고도 자기 자리에서 자유와 존엄을 일구는 방법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세 권의 책과 함께, 자기 자신으로 사는 일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어디서든 나로 지내는 삶
브라이언 무어, 『주디스 헌의 외로운 열정』

『주디스 헌의 외로운 열정』 책 표지
『주디스 헌의 외로운 열정』 책 표지

『주디스 헌의 외로운 열정』은 교양은 있지만 매력은 없는 알코올 중독자 주디스 헌의 고독을 그리는 소설입니다. 가족이나 경제적인 기반 없이 하숙집을 전전하는 주디스 헌은 과장과 망상이라는 괴팍한 버릇마저 가지고 있어 사교적인 관계에 어려움을 겪습니다. 사회적인 통념과 요구에 부응하지 못하는 그를 누구도 이해하고 환대하지 않죠. 이런 곤란한 상황은 인생의 여러 불운-젠더적으로 가중된-이 겹쳐진 결과이자, 그의 선한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기에 안타까움을 불러 일으킵니다.

그런데 주디스 헌은 단순히 피해자로서 고독해지지 않습니다. 자신을 구원하지 않는 신을 의심하고, 자신의 슬픔과 고통을 가라앉히는 술에 스스로를 의탁하면서, 그는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하는 대신 어디서든 머물려 합니다. 냉담한 독자들의 눈초리를 의식하듯 주위 사람들은 그를 단순히 알코올 중독, 신경쇠약으로 치부해버리는데요. 그의 고통을 재단하지 않는 유일한 사람이 주류 판매점의 사장이고, 그가 하숙집에서 쫓겨나 호텔에서 술을 마실 때 비로소 자신을 ‘자유’라고 선언한다는 점은 우리를 자유롭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보게 합니다.

계속해서 자신을 고립시키는 세계에 패배하면서도 고집과 의심을 관철하는 이상한 사람. 주디스 헌을 따라 우리를 옭아매는 것들에게서 자유로운 장소를 마련해 보는 것은 어떨까요?

두 분이 나와 함께 있고, 날 지켜 주고 있다면, 새로운 곳도 집이 되는 거야.

- 브라이언 무어, 『주디스 헌의 외로운 열정』, 을유문화사, 32쪽

스스로 자유로운 삶
배수아, 『독학자』

『독학자』 책  표지
『독학자』 책 표지

배수아의 텍스트에서 우리는 으레 내적인 충만을 발견할 수 있지만, 2000년대의 배수아는 지금과 조금 다른 방식으로 그것을 쓰고 있습니다. 『독학자』는 1980년대를 배경으로 이제 스무 살이 되는 주인공이 부조리하고 전체주의적인 대학과 사회를 비껴 진정한 존엄과 자유를 추구하는 과정을 묘사합니다. 스스로 배우는 사람이 되겠다는 선언이자 정체성의 표지나 다름없는 제목이 내용을 압축하는 것이죠.

시간이 지나 대학의 성격은 크게 달라졌지만, 배움에 대한 나의 기대와 실제가 다를 수 있다는 사실은 비슷할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민주주의에 대해 더욱 뾰족하고 풍성하게 논의해야 하는 지금과 소설 속 풍경에서 공통점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고요. 그렇기에 자유와 민주주의가 오롯이 지켜져야 할 것 같은 대학이라는 공간에서 주인공이 느끼는 박탈감은, 대학에 진학한 사람이라면 지금도 공감할 수 있는 실존적인 고민으로 이어집니다. 집단에 휩쓸리지 않는 자유와 지성을 홀로 구축할 수 있다면, 그렇게 살기를 선택할 것인가.

스무 살의 다짐이란 위태롭고 치기 어린 것이어서, 몇 년만 지나도 후회하거나 번복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존엄에 대한 욕망을 밀어붙이는 『독학자』의 젊은 외골수는 자신의 다짐을 지켰을 것 같다고, 왠지 모르게 긍정하게 됩니다.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다면 시간을 내어 이 소설을 읽어보기 바랍니다. 의문과 욕망이 깊어질 때 주인공의 형상이 떠올라 힘을 보탤 거예요.

나를 기다리고 있는 미래가 어떤 모습인지 나는 모른다. 그러나 두려워하지는 않을 것이다. 시간은 더디게 흐르겠지만 초조해하지도 않으리라. 분명히 고독하고 틀림없이 두렵기도 하겠지만 흔들리지 않으리라. 그러다 이윽고 마흔 살이 되면, 그때 나는 스스로 만든 대학을 졸업할 것이다. 그때 나는 지금보다 훨씬 더 자유롭고 분명한 어떤 존재가 되어 있을 것임을, 나는 의심하지 않겠다.

- 배수아, 『독학자』, 레제, 176쪽

자기 충족적인 삶
라비 알라메딘, 『불필요한 여자』

『불필요한 여자』 책 표지
『불필요한 여자』 책 표지

아무도 자신의 작업을 알아주지 않더라도 그 일을 평생 지속할 수 있나요? 『불필요한 여자』의 알리야는 그렇다고 대답할 것 같습니다. 그는 자신의 기준과 질서 위에서 자신이 사랑하는 일, 문학을 읽고 번역하는 작업을 오래도록 해왔습니다. 발표나 판매와 무관하게 번역 자체에 의의를 두고요. 온갖 일에 자신이 읽고 번역해 온 텍스트를 포개 길게 이야기하는, 실로 문학적인 노인의 모습은 『독학자』의 주인공이 나이 든 이후를 상상하게도 합니다.

특별한 성취를 기대하지 않고 어떤 일을 지속하는 것을 동력이자 근원으로 삼는 삶은 언뜻 소탈해 보입니다. 그러나 전쟁과 파괴, 죽음과 변모가 일상인 레바논의 역사를 몸에 새긴 알리야가 오늘도 번역 계획을 세울 때, 삶은 언제든 끝날 불필요한 것에 그치지 않습니다. 동시에 그것은 기억하고 살아남는 고유한 하나가 되어 타자의 말에 나의 말, 나아가 이 지역의 말을 포개는 매개가 됩니다. 알리야가 타인에게 침해 당하지 않고 독서와 번역을 지속하기 위해 지키는 자유로운 삶이, 이기적이라는 비난을 받는 한편 사라지는 것들을 증언하기도 하는 것이죠. 일인칭으로 전개되는 알리야의 고백들은 그렇게 삶이 고귀하거나 부박하기만 할 수는 없다는 진실을 고스란히 드러냅니다.

오직 자기 충족적으로 하고 있는 업이 있나요? 그렇다면 오늘은 평소보다 조금 더 사랑하는 마음으로 업에 시간을 써보면 좋겠습니다. 모든 것을 자원화하고 콘텐츠화해야 한다고 강박하는 시대에, 알리야처럼 불필요해 보이는 어떤 일들로 지탱되는 삶도 있는 것이니까요.

이제 사암 집을 뒤로하고 걷는다. 원래 이 집의 꼭대기 층에는 아치 모양의 예쁜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이 있었다. 선명한 빨강, 오렌지, 그리고 기름에 잘 튀겨진 듯한 노랑이 추상적으로 어우러져 곡선과 소용돌이 문양을 이루고 있었다. 그 창문이 깨졌는지, 한밤중에 도난을 당했는지 나는 모른다. 어쨌든 사라지고 없다. 이제 내 기억 속에만, 내 프루스트적 기억 속에만 남아 있다.

- 라비 알라메딘, 『불필요한 여자』, 뮤진트리, 354

자유나 존엄과 같은 말들은 이데올로기적으로 쉽게 도구화됩니다. 외치는 사람은 많지만 진실로 추구되지 않고, 또 모두가 자유롭고 존엄하기 위해서는 많은 제약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그런 이유로 누구는 험담을 들으며 문제적 인간으로 살아가고, 누구는 더 자유로운 존재가 되기 위한 삶의 방식을 조직합니다. 다수의 질서에 매끄럽게 포섭되지 않는 모습일지라도 그것이 자유로운 삶을 얻어내는 방법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자기 자신으로 끝내 살아가는 일은 따라서 이기적인 방편이 아니라 세계와의 불화를 감수하고 자유와 존엄을 지켜내는 일로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는 현실을 살기 위해 종종 타협하고 세상 물정을 받아들입니다. 그 과정에서 깎이고 변모하는 자신의 모습을 불가피하게 수용하기도 합니다. 서로 연루되고 오염되며 공동의 세계를 구축하는 우리지만, 그 가운데 기어코 고집해야 하는 자기 자신이 있음을 상기하기를 권해 봅니다. 자유롭고 존엄한 삶의 가능성이 거기에 있을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