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을 사랑이라 할 수 있을까
사랑의 4가지 원형으로 짚어보는 영화들
고대 그리스인들은 사랑을 하나의 감정으로 뭉뚱그리지 않았다. 그들은 사랑이 관계의 형태에 따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작동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사랑을 네 가지 이름으로 나누어 불렀다.
1.에로스(Eros)는 욕망과 열정의 사랑이다. 강렬한 끌림으로 시작되며, 서로를 가장 빠르게 필요로 하게 만든다.
2. 스토르게(Storge)는 보호와 돌봄의 사랑이다. 부모와 자식처럼 책임과 헌신이 당연하게 전제된 관계다.
3. 필리아(Philia)는 우정의 사랑이다. 대등함과 친밀함을 전제로 하지만 그 균형은 늘 암묵적으로 유지된다.
4. 아가페(Agape)는 무조건적인 사랑이다. 조건 없이 주고, 계산 없이 감내하는 사랑으로 종종 가장 이상적인 형태로 불린다.
이 글은 네 가지 사랑을 출발점으로 삼아 영화 속 관계들을 다시 바라본다. 그리고 묻고자 한다.이 사랑들은 어디까지 사랑이며, 언제부터 의존이 되는가. 사랑의 이름으로 정당화된 의존의 얼굴을 하나씩 들여다보며, “이것을 사랑이라 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조심스레 꺼내본다.
에로스 : 블루 발렌타인(2010)
서로를 사랑한다는 말이 서로를 필요로 한다는 뜻이 될 때

<블루 발렌타인>은 한 커플의 시작과 끝을 교차 편집으로 보여준다. 딘과 신디는 강렬한 끌림 속에서 만나 결혼에 이르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관계는 조금씩 균열을 맞는다. 영화는 연애의 설렘보다 결혼 이후의 권태와 피로를 집요하게 따라가며, 왜 이들이 서로를 잃어가는지를 묻는다.
이 영화는 사랑이 시작되는 이유보다 사랑이 지속되지 못하는 과정을 집요하게 따라간다. 그리고 왜 이들이 사랑에 실패했는지를 보여준다. 사랑이라는 감정이 얼마나 많은 기대와 투사 위에 세워졌는지를. 두 사람은 자신이 해결하지 못한 결핍을 상대에게 얻기 위해 애쓴다.
에로스의 관계에서 의존은 가장 낭만적인 언어를 입는다. “너 없이는 내 삶의 의미는 없어.” “너만 있으면 돼.” 이런 말들은 사랑의 깊이를 증명하는 문장처럼 들린다. 하지만 그 말 속에는 위험한 전제가 숨어 있다. 나의 삶을 내가 아니라 상대가 지탱해주어야 한다는 기대다. 이 기대는 처음에는 친밀함으로 느껴지지만 시간이 지나면 부담으로 전환된다.
영화 속 주인공들이 서로에게 실망하는 이유는 사랑이 식어서가 아니다. 오히려 사랑에 너무 많은 역할을 부여했기 때문이다. 상대는 연인이자 친구이자 가족이자 구원자여야 했다. 그 모든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는 순간 사랑은 실망으로 바뀐다. 의존은 점점 더 조밀해지고 관계는 그만큼 숨 쉴 공간을 잃는다. 나를 행복하게 해줘야 하는 사람, 나를 버티게 해줘야 하는 사람. 그렇게 사랑은 서로를 끊임없이 요구하는 압박으로 다가온다. 이때 사랑은 견딜수 없는 감옥으로 변한다.
스토르게 : 마더(2009)
보호와 통제의 경계는 어디에서 무너지는가

<마더>는 살인 사건의 용의자로 몰린 지적 장애 아들을 구하기 위해 진실을 쫓는 어머니의 이야기다. 그녀는 아들의 무죄를 확신하며 그 믿음을 증명하기 위해 점점 더 극단적인 선택을 감행한다. 영화는 한 어머니의 헌신을 끝까지 따라간다. 아들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무엇이든 감당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이 사랑을 의심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오히려 의심하는 쪽이 비정해 보일 정도다.
부모와 자식 사이의 의존은 자연스럽다. 아이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타인의 돌봄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 그래서 이 관계에서는 의존이 문제로 인식되지 않는다. 진정한 문제는 이 의존이 언제까지, 어떤 방식으로 유지되는가다. 처음에는 필요이지만 그 경계가 흐려지는 순간 관리와 통제로 얼굴을 바꾼다.
“너를 위해서”라는 말은 질문을 차단하는 힘을 가진다. 그 말 앞에서 자식은 자신의 판단을 설명할 기회를 잃는다. 부모의 사랑은 선택지를 넓히기보다 하나의 길만 남긴다. 그 길이 옳다고 믿는 한 폭력은 자각되지 않는다. 이 관계 안에서 사랑은 여전히 사랑이라는 얼굴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영화가 불편한 이유는 어머니가 괴물이어서가 아니다. 그녀는 오히려 우리가 익숙하게 접해온 헌신적인 사랑의 전형에 가깝다. 스토르게의 위험은 바로 여기에 있다. 사랑이 너무 정당해 보일 때 의존은 가장 깊숙이 스며든다. 그리고 그 침투와 조종은 종종 관계의 바깥이 아니라 진정한 사랑의 이름으로 이루어진다.
필리아 : 프란시스 하(2012)
가장 평등하다고 믿는 관계의 불균형

<프란시스 하>는 절친 소피와 살고 있는 27살 뉴요커 프란시스의 이야기다. 활동적인 성향, 긍정적인 사고, 시원한 웃음을 가진 그녀는 무용수로 성공할 날만을 기다리며 매일 연습을 한다. 아직 견습생으로 가끔씩 무대에 서지만, 아직 포기하긴 이르다고 생각한다. 프란시스의 절친 소피는 출판사에서 일하는 청년이다. 둘은 반대의 성향과 취미생활을 가졌지만 서로를 ‘자기’라고 칭할 만큼 각별한 친구 사이를 유지한다.
어느새 아파트 계약만료 기간이 다가오고 프란시스는 당연히 소피와 계약을 연장할 계획이었다. 프란시스의 남자친구 ‘댄’은 동거를 요청하지만, 프란시스는 우정을 택한다. 동거를 거절했다는 작은 트러블에서 시작된 다툼으로 댄과 헤어진 프란시스에게 믿을 건 소피뿐이었다. 하지만 연이어 들려온 소피의 독립 선언. 함께 욕하곤 했던 리사와 아파트를 얻어 나가겠다는 소피. 프란시스는 배신감을 느낄 만도 한 상황이지만 소피에게 화 한번 내지 않는다.
얼핏보면 연인도 아니고 가족도 아닌 우정은 가장 자유롭고 가장 부담 없을 것 같다. 영화는 바로 그 믿음을 조용히 흔든다. 가까운 두 사람 사이에도 감정의 무게는 늘 같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주면서. 친구 관계에서의 의존은 잘 드러나지 않는다. 공식적인 책임도 없고, 명확한 역할 분담도 없다. 대신 암묵적인 기대가 쌓인다. 누군가는 더 자주 연락하고, 더 많이 기다리고, 더 쉽게 이해한다. 이 불균형은 처음에는 친밀함처럼 느껴진다. “우린 특별한 사이니까”라는 말로 설명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 특별함은 피로로 바뀐다. 항상 괜찮다고 말하는 사람 늘 한 발 물러서는 사람의 자리는 점점 고정된다. 필리아의 의존은 사랑이 아니라는 이유로 쉽게 문제 삼아지지 않는다. 그래서 가장 늦게 인식되고 가장 조용히 상처를 남긴다. 우정이 무너질 때 우리는 종종 말한다. “그냥 친구였을 뿐이야.” 하지만 정말 그랬을까. 필리아의 의존은 이름이 없어서 더 오래 지속된다. 책임이 없다는 자유는 조율할 장치가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관계의 불균형은 조용히 축적되어 가다 한 순간에 스러져버린다.
아가페 : 사일런스(2016)
침묵하는 신도 사랑이라 할 수 있을까

<사일런스>는 17세기 일본을 배경으로, 박해받는 신자들을 찾아 나선 예수회 신부 로드리게스의 여정을 따라간다. 그는 일본에서 배교했다는 소문이 도는 스승 페레이라의 진실을 확인하기 위해 위험한 땅에 발을 들인다. 신부는 신앙을 지키다 고문당하는 신자들을 목격하고, 그들의 고통 앞에서 끊임없이 신에게 응답을 구한다. 그러나 신은 끝내 침묵한다. 기적도, 구원도, 명확한 신호도 없다. 선택의 순간마다 로드리게스는 신의 침묵 속에서 홀로 결정을 내려야 한다.
아가페는 흔히 가장 완전한 사랑으로 이해된다. 조건 없이 주어지고, 보상이나 대가를 요구하지 않는 사랑. 그래서 우리는 아가페를 위로와 보호의 언어로 상상한다. 하지만 〈사일런스〉는 이 사랑을 의존의 구조 안으로 끌어들인다. 이 영화에서 신의 사랑은 인간에게 기대를 허락하지만, 응답을 보장하지 않는다. 인간은 신을 믿고 의지하지만, 그 의존은 어떤 형태의 보호로도 되돌아오지 않는다.
로드리게스가 마주하는 신의 침묵은 단순한 부재가 아니다. 그것은 의존이 작동하지 않는 상태다. 그는 신을 향해 질문하고 기도하고 고통 속에서 답을 요구하지만, 그 어떤 반응도 얻지 못한다. 그럼에도 그는 신을 포기하지 못한다. 이 지점에서 사랑은 신뢰를 넘어 의존으로 기울어진다. 침묵하는 존재에게서 의미를 계속 끌어내려는 시도, 그것이 이 영화에서의 아가페다.
가장 잔인한 지점은 사랑의 방향이 뒤집히는 순간이다. 신을 위해 인간이 고통받는 구조가 아니라, 인간의 고통을 멈추기 위해 신을 부정해야 하는 선택 앞에 서는 순간. 로드리게스의 배교는 신을 버리는 행위처럼 보이지만, 동시에 신에게 매달린 의존을 끊어내는 결정이기도 하다. 그는 더 이상 신의 응답을 기다리지 않는다. 침묵 속에서도 의미를 찾아야 했던 의존의 구조를 스스로 종료시킨다.
<사일런스>가 던지는 질문은 그래서 사랑에 대한 것이기 이전에 의존에 대한 질문이다. 침묵하는 신에게 끝까지 기대는 것이 믿음인가, 아니면 그 기대를 멈추는 것이 더 성숙한 신앙인가. 아가페는 여기서 가장 숭고한 사랑이자 가장 위험한 의존의 얼굴을 드러낸다. 설명되지 않아도 믿어야 하고 응답이 없어도 기다려야 하는 관계. 이 영화는 그 관계를 끝까지 사랑이라 부를 수 있는지 관객에게 묻는다.
사랑에서 의존을 제거할 수는 없다. 오히려 의존이 전혀 없는 관계는 사랑이라 부르기 어렵다. 문제는 의존이 어떤 방식으로 허용되고 언제 점검되는가다. 그렇기에 "이것을 사랑이라 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은 관계를 부정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용인되어온 의존의 얼굴을 하나씩 드러내기 위한 질문이다. 의존을 없애자는 제안이 아니라, 의존을 말할 수 있는 관계를 만들자는 제안에 가깝다.
사랑은 완벽하지 않아도 된다. 다만 점검 가능해야 한다. 의존이 보이지 않는 폭력이 되기 전에, 질문이 먼저 도착할 수 있도록. 이 글이 남기고 싶은 건 결론이 아니라 이 질문을 다시 꺼내는 용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