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이의 거리를 좁히는 영화들
타고난 취약함을 기억하며
오늘날 우리는 참 편리하게 거리를 둡니다. 경제적인 수준, 사회적인 위치, 고질적인 편견, 이기적인 필요로 남과 나를 구분하고, 마치 극복할 수 없는 벽이 있는 것처럼 배타적으로 굴기도 하죠. 일부에게 꾸준히 도사리는 고립과 소외 그리고 차별 문제는 대부분 이렇게 '내 이야기'가 아니라는 이유로 방치하며 시작됩니다. 사실상 구조나 인식의 문제인데도 개인의 자격과 능력을 운운하면서요.
이런 오만한 사고방식을 잠자코 뒤흔드는 영화들이 있습니다. 바로 션 베이커의 〈플로리다 프로젝트〉, 하야카와 치에의 〈플랜 75〉, 켄 로치의 〈나의 올드 오크〉인데요. 이들은 현실 기반의 픽션으로 자주적인 독립의 신화를 깨트리고, 타자 없이 살 수 없는 인간의 타고난 취약함과 불가피한 의존을 재고하게 합니다. '네 이야기'를 우리의 것으로 만들어가면서요. 지금부터 그 과정을 함께 따라가 볼까요?
아무도 울지 않을 그날을 꿈꾸며, 플로리다 프로젝트

"내가 왜 이 나무를 제일 좋아하는지 알아? 쓰러졌는데도 계속 자라서."
알록달록한 색감의 배경과 천진난만한 웃음소리. 아이들의 눈높이를 따라가는 카메라 속, 디즈니월드 옆 '매직 캐슬' 모텔에 사는 6살 '무니'가 보입니다. '무니'는 오늘도 친구들과 신나는 하루를 보내고 있죠. 못 보던 차에 침 뱉기, 제어실 들어가서 전기 차단하기, 수영을 즐기는 투숙객 모욕하기, 구걸한 돈으로 아이스크림 사서 나눠 먹기, 폐가 가서 불 지르기 등, 다소 짓궂고 괴팍한 놀이가 그의 세상을 이룹니다.
그런 '무니'만큼이나 범상치 않아 보이는 엄마가 바로 '핼리'입니다. '핼리'는 주 30시간 동안 근무할 곳을 찾지 못해 국가 보조금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애슐리'가 일하는 가게에서 포장해 온 와플로 끼니를 때우고, 일주일마다 돌아오는 방세를 내기 위해 딸과 함께 호객 행위에 나가곤 하죠. 이조차도 친구의 외면과 현실의 제재로 불가능해지자, 결국 '무니'의 목욕 시간 동안 성 노동에 임하기를 선택합니다.

아직은 어린 개구쟁이에 불과해 보이던 '무니'가 엄마의 눈치를 보거나 어른이 울기 직전의 순간을 잘 안다고 얘기했기에. 영 무모해 보이던 '핼리'가 여전히 딸에게만은 즐거운 시간을 남겨주기 위해 끝까지 노력했기에. 빈곤층의 비혼모가 아동국에게 아이를 뺏기기 직전의 순간은 사뭇 잔인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보살핌의 부재와 불안함의 반복 속에 '아무렇지 않기 위해' 이들은 얼마나 더 노력해야 했을까요?
'무니'와 '젠시'의 환상적인 도피가 끝난 후 검어진 화면 위에, 은근한 조력자였지만 결국에는 방관자였던 모텔 매니저 '바비'를 포함해, 현실의 핑계 앞에 안일하고 이기적으로 굴던 얼굴들이 떠오릅니다. 수많은 형태의 가족들이 '쓰러지더라도' 계속해서 일어날 수 있도록 없어져야 할 사회적 병폐, 그 묵은 허점들도요.
끝까지 지켜줘야 할 존엄에 대하여, 플랜 75

"넘쳐나는 노인이 나라 재정을 압박하고 그 피해는 전부 청년이 받는다.
노인들도 더는 사회에 폐 끼치기 싫을 것이다."
초고령화 사회에 진입한 근미래의 일본. 정부는 곳곳에서 벌어지는 노인 혐오 범죄와 청년층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플랜 75'를 제시합니다. 이는 75세 이상의 국민이 죽음을 선택할 권리를 지원하는 제도로 '전례 없는 시도'로서 '묘수'라 평가받죠. 이를 뒷받침하듯, 신청한 사람들에게는 10만 엔의 보조금이 사례금처럼 주어지고, 적극적인 홍보가 진행되며, 친절하고 꼼꼼하게 책임을 다하는 직원들이 등장합니다.
하지만 그들의 삶에 조금씩 다가갈수록 그 민낯이 드러납니다. '미치'는 평범한 78세 여성이었습니다. 보살펴 줄 가족은 없었지만 친구들과 소박하고 소소한 일상을 이어갔죠. 그러나 '노인 학대'를 이유로 일자리를 박탈당하고, 홀로 살던 '이네코'의 외로운 죽음을 목격하더니, 기초생활수급자로 사는 삶은 일찍이 포기하려 합니다. 앞으로 계속해서 의존하며 살아야 한다는 부담감과 절망감이 한꺼번에 밀려온 걸까요.

성실한 공무원 '히로무'는 20년 만에 만난 이모부가 이 안락사를 택했고, 그 화장터가 '산업 폐기물' 처리 서비스임이 밝혀지자 처음으로 원칙에서 이탈합니다. 주어진 프로토콜을 따르던 콜센터 직원 '요코'는 '미치'를 조우한 뒤, 힘겹게 멘트를 소화하며 멍하니 회의를 느끼죠. 딸의 수술비를 위해 신앙과 배척되는 환경 속 유품 정리사로 분하던 '마리아'는 마침내 용기를 내서, 고인의 마지막을 제대로 배웅합니다.
이 모든 과정을 카메라는 그저 담담히 직시합니다. 생사에 관여하는 사회 제도 속 당사자, 관계자, 노동자들의 답답한 합리화와 안쓰러운 수용을 포착하면서요. 그 이물감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죽음에 내몰리며 실루엣만 잡히던 한 노인에게서, 다시 한번 살아보려는 '미치'로 초점이 맞춰질 때, 비로소 참된 권리가 무엇인지 분명해지니까요.
함께 한다는 것의 가치를 믿으며, 나의 올드 오크

"'마라'는 광부들이 쓰던 단어야.
(...)친구이고 나 자신이고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고 지켜주는 관계를 말해."
영국 북동부의 한 폐광촌. 낯선 버스를 타고 온 사람들을 향해 무례하게 내던지는 언행이 포착됩니다. 이에 물러서지 않겠다는 듯 연신 눌러대는 셔터 소리 역시 들리죠. 오래된 펍인 '올드 오크'를 운영하는 'TJ'와 사진작가 지망생인 '야라'는 그 작은 소동 속에 처음 마주합니다. 정부에게 외면받고 있는 주민들과 전쟁을 피해 잠시 정착하게 된 시리아 난민들의 쉽지 않은 동고동락은 그렇게 시작되죠.
이미 한 동네의 익숙함에 젖어 있던 내지인들은 불쑥 찾아온 이방인들을 영 내켜 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처지에 대한 비관과 사회에 대한 불만은 잘 알지 못하는 약자를 향한 비난과 조롱으로 변질되죠. 걸핏하면 폭력으로까지 번지는 아슬아슬한 분위기가 계속되지만, 'TJ'와 '야라'는 따뜻하게 주고받는 도움과 상실에 대한 진심 어린 관심 속에 애틋한 우정을 쌓아갑니다. 그리고 이는 곧 선한 영향력으로 발전하죠.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공청회를 열자는 오랜 동지들의 제안을 거절하고, 마을의 무료 급식 봉사를 시작하자는 '야라'의 요청에 'TJ'는 그간 닫아두었던 '올드 오크'의 안쪽 방을 개방합니다. 그 뜻에 동의하는 모두가 힘써 준비한 끝에 소외되었던 이웃들이 한데 모여 어울릴 수 있게 되는데요. 열악한 상황과 치사한 방해 공작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화합은 마음이 힘들 때 기댈 수 있는 새로운 친구들을 만들어줍니다.
용기, 저항, 연대. 거대 권력에 맞서 외쳤던 광부들의 구호는 이제 근거 없는 혐오와 무기력한 묵인을 타파하는 움직임으로 거듭납니다. 함께 할 때의 단단함이 서서히 구현될 때, 개인을 붙잡아 주는 공동체의 힘을 곱씹어 보게 되죠. 다소 설교적이어도 이 이야기가 여전히 유효한 건, 그 나지막한 울림 속에 박애의 희망이 아직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세 작품은 아이, 노인, 이방인의 시선으로 그 주변인들의 딜레마를 경유하며 '역지사지'의 태도를 심어줍니다. 언제든지 취약할 수 있는 각자의 입지를 떠올리게 하고, 그들을 향한 무자비한 속단을 중단시키죠. 덕분에 의지할 수 없을 때의 삭막함에 대해, 사회로부터 철저히 분리됐을 때의 막막함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됩니다.
어쩌면 불확실한 상황 속에서 완벽한 '독립'은 허상일 뿐, 서로 '의존'하며 사는 것이 당연할지 모릅니다. 그래서 몇몇 작품들이 이토록 도돌이표처럼 반복되는 것 아닐까요. 비록 우리는 자주 잊어버리지만, 결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을, 그 진실 하나를 끝까지 붙잡으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