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생태계에 다양성을 불어넣는 아카이브 공간 3곳
영화가 공간을 만들면 공간도 영화를 만든다
대학교 1학년 시절, 시간표 속 텅 비어 있는 ‘우주 공강’ 시간에 뭘 해야 할지 몰라 학교를 헤매던 중 도서관 한쪽의 DVD실을 발견했습니다. 사람이 많지 않아 조용했던 DVD실의 책장에는 영화 DVD가 한가득 꽂혀있었고, 집이나 영화관에서만 영화를 보던 저에게 그곳은 색다른 뷔페처럼 느껴졌습니다. 책장 사이를 돌며 재밌어 보이는 영화를 한 편 골라 헤드폰을 쓰고 DVD실 구석에 앉아 영화를 봤던 그 날은 소소하지만 꽤 즐거운 추억으로 남았습니다.
학교를 떠나며 DVD실은 추억의 공간으로 남았지만, 지금의 저는 여전히 영화 DVD와 블루레이가 가득한 ‘영화 아카이브 공간’들을 찾아 열심히 드나드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아카이브 공간은 영화 자료 저장과 상영 제공이라는 본질적 기능을 넘어 고전·독립·예술 영화를 정기적으로 큐레이팅합니다. 또 영화 및 영상 자료 관련 전시와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기도 하며 영화와 관객이 만나는 방식의 다양성을 꾀하는 문화 공간으로 자리하고 있기도 합니다.
영화로 향하는 관객들의 발길과 마음이 영화관 바깥에서도 오래 이어질 수 있도록, 아카이브 공간은 영화의 생태계를 다채로이 채우고 성장시키고자 합니다. 이런 노력이 더 많은 이들에게 가닿을 수 있도록, 기꺼이 방문을 권하고 싶은 온·오프라인의 영화 아카이브 공간 3곳을 소개합니다.
영화가 시간에 바래지 않을 수 있도록, 한국영상자료원

이름부터 공공기관의 느낌이 물씬 풍기는 ‘한국영상자료원’은 한국 영화 및 영상 자료를 수집·복원·보존하기 위해 설립된 공공기관입니다. 영화 좀 본다는 사람들에겐 ‘영자원’이라는 줄임말로 더 익숙한 공간일 텐데요. 국가 기관인 만큼 영화 자료를 보관하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오래된 필름을 복원하거나 비필름(비디오, 포스터, 전단지 등)을 보존하는 등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공간입니다.
한국영상자료원 내부의 특징적인 공간으로 한 곳을 꼽자면, 바로 자체 운영하고 있는 한국영화박물관일겁니다. 한국영화박물관에서는 100년이 넘는 한국 영화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도록 상설전시와 기획전시를 진행하는데요. 특히 기획전시는 영화 음악, 대사, 소품 등 영화와 관련된 무궁무진한 소재를 테마로 꾸준히 진행되고 있어서 항상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습니다. 전시뿐만 아니라 교육 프로그램도 제공하며 영화와 관련된 생산적인 활동을 직접 체험하고 싶은 이들에게 다양한 기회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상암에 위치한 한국영상자료원 본원을 방문하면 ‘영상도서관’을 이용할 수 있는데요. 1인석부터 다인실까지 좌석도 다양하게 사용할 수 있어서 ‘혼영’은 물론, 친구와 방문하기에도 좋은 공간입니다. 영상뿐만 아니라 영화 관련 서적이나 각종 인쇄물까지 열람할 수 있답니다. 온라인으로는 영화 전문 웹사이트인 ‘KMDB’를 운영하고 있어서 한국 영화와 관련된 방대한 자료들을 손쉽게 조회할 수 있고, 한국 고전 영화 VOD까지 감상할 수 있다고 하니 새삼 정말 알찬 공간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사실 씨네필들이 한국영상자료원을 찾는 대부분의 이유는 각종 기획/특별 상영 때문일 겁니다. 한국영상자료원은 그 자체로 ‘시네마테크’(영화를 수집, 보관하고 상영하는 기관)이기 때문에 ‘시네마테크KOFA’라는 이름으로 쉽게 접하기 어려운 고전·독립·예술 영화를 상영하고 있습니다. 프로그래머가 달마다 선정한 영화들을 ‘상설전’으로 만날 수 있고, 독립 영화관에서도 접하기 어려운 다양한 주제들을 바탕으로 한 ‘기획전’과 소규모 ‘영화제’를 즐길 수 있죠. 멕시코 영화, 브라질 영화 등 큐레이션으로 선보이는 영화들의 국적 또한 매우 다양하니 영화 식견을 넓히기에 이만한 공간이 없는 것 같습니다. 저도 지난 9월의 상설전을 통해 아쉽게 관람을 놓쳤던 알리체 로르바케르 감독의 영화 '키메라'를 드디어 스크린에서 만날 수 있었는데요. 영화가 좋았던 만큼이나 한국영상자료원의 상영 프로그램이 더욱 소중하게 느껴졌습니다.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영화를 지속적으로 소환하는 공간 ‘한국영상자료원’에서 낯선 영화들에 적극적으로 손을 건네 보세요. 영화들이 가진 저마다의 빛깔을 채집하며 점점 넓어지는 내 안의 취향 스펙트럼을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한국 독립·예술 영화의 든든한 터전을 꿈꾸며, 인디그라운드

모든 영화가 그렇지만, 특히 독립·예술 영화는 관객들과 만날 수 있게 해주는 유통 배급의 환경이 정말 중요합니다. 인지도가 높지 않다 보니 상업 영화에 비해 상영관을 많이 배정받기 어렵고, 더불어 홍보가 제대로 되지 않으면 어렵게 제작한 영화도 빛을 보기 전에 금세 잊히기 쉽거든요. 관객의 확보는 당장 제작된 영화에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독립·예술 영화가 만들어질 수 있는 기반 마련에도 큰 역할을 하므로 영화의 유통 환경을 꾸준히 개선하고 배급을 확대하려는 노력은 영화 생태계 유지에 필수적입니다.
지금 소개하는 ‘인디 그라운드(indie ground)’는 이러한 필요성을 바탕에 두고 만들어진 독립·예술영화 유통배급지원센터입니다. 한국 독립·예술영화의 배급/유통사, 창작자, 독립 영화관 관계자 등 독립·예술 영화계 구성원들의 조력자 역할을 하며 독립·예술영화의 가치가 더 널리 전달될 수 있도록 여러 사업을 진행하는 곳이죠. 사실 처음 인디 그라운드를 알게 되었을 때, 깊은 관심을 두지는 않았습니다. 영화 산업을 지원하는 센터라고 하니 일개 관객인 제가 가까이 할 수 있는 콘텐츠를 제공하는 곳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조금 더 들여다보니 한국 독립영화 애호가들에게는 보물창고 같은 공간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인디 그라운드는 한국의 독립·예술 영화와 영화 관련 자료들을 자체적인 온라인 플랫폼을 통해 제공하고 있습니다. 언제 어디서든 방문이 가능한 한국 독립영화 아카이브 공간인데요. 일단 홈페이지를 방문하면 ‘독립예술영화 DB’ 카테고리를 통해 한국의 독립·예술 영화 리스트는 물론, 신작 개봉 소식까지 파악할 수 있습니다. 검색하면 한눈에 영화 정보가 뜨는 상업 영화에 비해 인지도가 낮은 독립·예술 영화는 정보가 흩어져 있다고 느끼게 되는데요. 이때 인디 그라운드를 통하면 영화의 시놉시스부터 수상 내역까지 관련 정보를 한눈에 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가장 유용하게 이용하는 인디그라운드 콘텐츠로는 ‘독립영화 라이브러리’와 ‘온라인 상영관’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인디 그라운드에서는 독립영화 감상 기회의 확대를 위해 매년 독립영화 라이브러리를 구축하고 있습니다. 매년 공모를 통해 접수된 독립·예술 영화 작품 중, 심사를 통해 선정된 작품은 독립영화 라이브러리에 기록되며 온라인 상영관에서 정기적인 큐레이션을 통해 관객들에게 스트리밍됩니다. 오늘날의 주목할 만한 한국 독립 영화들을 한자리에서 꾸준히 만날 수 있는 기회이니, 한국 독립영화를 사랑하는 이들이라면 꼭 눈여겨보시길 바랍니다. 상영이 끝난 큐레이션이어도 ‘추천 큐레이션’ 리스트를 통해 기록을 확인해 볼 수 있으니 흥미로운 주제를 바탕으로 한 새로운 한국 독립·예술 영화들을 둘러보고 싶을 때 접속해 보길 추천합니다.
매년 영화제에 갈 때마다 흥미로운 한국 독립 영화를 모두 관람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시간과 체력의 한계로 만나지 못하는 작품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항상 이런 아쉬움을 달래주는 곳이 '인디그라운드'인데요. 만약 저처럼 영화제에서 보고 싶었지만 관람 기회를 놓친 한국 독립 영화가 있다면 ‘온라인 상영관’을 주목해보세요. 큐레이션을 통해 아쉽게 떠나보내야 했던 영화와 다시 만나게 될 수도 있으니까요!
영화에 대한 접근성이 확대되는 곳, 지역 미디어센터

서울이 아닌 지역에 거주하는 영화 애호가들이라면 대부분 공감할 텐데요. 독립·예술 영화를 사랑하지만, 이 영화들을 만나러 가는 길은 여전히 길고 험난합니다. 그나마 수도권에 거주하고 있는 저도 가장 가까운 독립 영화관이 왕복 4시간 거리의 서울에 있다보니 독립·예술 영화를 자주 보러 가기가 쉽지만은 않습니다.
가까운 독립·예술 영화 상영관에 대한 갈증을 해소해 보고자 거주지에서 비교적 멀지 않은 상영관을 찾아보던 중 ‘수원시미디어센터’라는 공간을 알게 되었는데요. 수원시 팔달구에 위치한 수원시미디어센터는 시민들의 다양한 미디어 활동을 지원하는 미디어 거점 공간으로 지금의 저에게 오아시스 같은 공간이 되었습니다. 가장 자주 이용하는 영화 공간인 만큼, 이번 아티클에서는 수원시미디어센터를 중심으로 지역 미디어 센터를 소개해 보고자 합니다. 이런 지역 미디어 센터는 수원뿐만 아니라 전국 여러 지역에 설립되어 있다고 하니, 독자분들도 혹시 집 주변에 가까운 미디어 센터가 있지는 않은지 꼭 확인해 보시길 바랍니다.

위에서 간략히 언급했듯 미디어 센터는 시민들의 미디어 접근성을 개선하고, 교육 및 체험을 통해 지역 공동체의 미디어 활동 전반을 활성화하고자 설립된 공간입니다. 미디어 리터러시(media literacy)부터 미디어 편집 도구 활용법까지 다양한 교육이 매달 진행되고, 직접 미디어 생산 및 창작 활동을 할 수 있도록 장비와 시설 대여사업도 진행하고 있습니다. 미디어 접근 자체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부터 미디어 콘텐츠 제작에 관심이 있지만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막막했던 사람들까지 모두 도움받을 수 있는 유익한 공간이죠.
수원미디어센터를 소개하고 싶었던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수원시네마테크’ 운영에 있습니다. 위에서 한국영상자료원을 소개하며 시네마테크에 관해 설명했었는데요. 수원시미디어센터에서도 영화 자료를 수집·보관하고 상영하는 시네마테크 사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센터 내부에 4K 디지털 영사기를 갖춘 영화 상영관을 보유하고 있고, 매달 새로운 주제를 바탕으로 국내외의 다양한 독립·예술 영화는 물론 상업 영화까지 장르를 가리지 않고 정기 상영합니다. 매주 3번씩 무료로 고전 영화부터 유명한 독립·예술 영화까지 다채롭게 관람할 수 있어서 저는 월말을 다음 달의 수원시미디어센터 정기 상영작 예약과 함께 마무리하고 있는데요. 12월이 끝나가는 지금, 다가오는 1월에 어떤 영화들을 상영해 줄지 벌써부터 기대됩니다.

1층 로비에서는 '미디어 도서관'을 운영하며 영화 DVD/블루레이를 진열해 두고 있습니다. 영상자료들을 센터 내에서 열람할 수 있도록 별도의 시청 공간도 함께 마련해 두었습니다. 저의 경우, 상영관에서 충분히 많은 영화를 감상하고 있어서 DVD를 자주 열람하지는 않지만 도서관 내의 영화 잡지나 서적을 유용하게 이용하는 편입니다. 지난 5월, 미디어 센터에서 상영한 영화 '패왕별희'에 영혼을 빼앗기고 나온 저의 눈앞에 마침 '패왕별희'를 다룬 영화 잡지가 띄어 곧바로 집어 읽고 나왔는데요. 미디어 도서관 덕분에 영화의 여운을 오래 가져갈 수 있었던 즐거운 기억이 떠오릅니다.
지역 미디어 센터가 아주 큰 공간은 아니지만 제공하는 영화 프로그램들은 여느 영화 아카이브 공간들과 견주어 봐도 부족하지 않다고 느낍니다. 기획전은 물론이고, 시민 기획단이 직접 기획하고 상영하는 ‘시민 영화제’도 개최되니 더 이상 서울에 거주하는 씨네필들을 부러워하고만 있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OTT 플랫폼을 통해 그 어느 때보다 다양한 영화를 쉽게 접하고 감상할 수 있는 시대입니다. 많지는 않지만 아트하우스 영화관들도 꾸준히 다양성 영화를 선보이고 있고요. ‘굳이 아카이브 공간까지 찾아갈 필요가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방문을 권하는 것은 영화 ‘관람’을 넘어 ‘경험’을 얻을 수 있는 공간들이기 때문입니다.
영화에 대한 기록으로 가득 찬 공간 안에서 영화에 대한 애정을 새삼스럽게 다시 느끼고 폭넓고 풍부한 큐레이션을 통해 낯선 영화 세계를 탐구해 보는 경험은 저에게도 그랬듯, 독자분들에게도 자신의 취향을 새롭게 덧붙여 나가는 기회를 가져다줄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