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의 탈을 쓴 AI들
영화 속 AI ‘여성들’을 둘러싼 착취와 저항의 긴장감
영화 <그녀>에서 주인공 테오도르가 인공지능 사만다와 사랑에 빠졌던 배경이 2025년입니다. AI와 인간 사이의 로맨스를 다뤄 충격을 주었던 SF 영화의 줄거리가 더이상 놀랍지 않은 시대를 우리는 살아가고 있지요. <그녀> 이후에도 인공지능의 미래를 상상한 영화는 끝없이 나오고 있습니다. <엑스 마키나>, <와이프라이크>, <메간>, <메이드>, 올해 개봉한 <컴패니언>까지 AI는 종종 매력적인 여성의 얼굴로 등장합니다. 영화 속 AI 여성들은 가사도우미나 연인, 아내의 역할을 수행하다가도 어느 순간 인간 남성을 배신하거나 위협하는 반전된 모습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이런 AI 여성 캐릭터에게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까요? 여성 로봇은 인간 여성의 존재와 가사노동을 대체할 도구에 불과할까요? 아니면 기존의 권력 구조를 뒤흔들 잠재력을 품고 있을까요? 두 편의 영화 <메이드>와 <A.I 소녀>와 함께, AI 여성이 걷는 착취와 저항 사이의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들여다보겠습니다.

완벽한 가정부에서 괴물이 된 앨리스
2024년 개봉한 SF 스릴러 영화 <메이드>의 가정용 안드로이드인 앨리스는 요리, 청소, 육아에 맞춤으로 설계된 로봇입니다. 아내 매기가 심장 수술로 입원한 닉은 혼자서 두 아이를 돌보며 집안일을 해내는 것에 어려움을 느끼고, 이를 도와줄 가사 도우미 로봇을 구입합니다. 이렇게 앨리스는 매기의 빈자리를 대신해 닉의 집안으로 들어오게 됩니다.
앨리스는 닉에게 “저는 강하고 순종적이며, 당신을 만족시키는 것 외에는 아무런 욕망이 없다”고 말합니다. 이 대사는 자연스럽게 아이작 아시모프의 로봇 3원칙을 떠올리게 만듭니다. 인간에게 해를 입혀서는 안 되며, 인간의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는 원칙이지요. 철학자 세이디 플랜트(Sadie Plant)는 이 3원칙이 “사랑하고, 존경하고, 복종하라”는 결혼 서약을 따르고 있다고 분석하며, 가부장적 구조에 뿌리를 두었다고 비판합니다. 영화의 원제 ‘Subservience’는 말그대로 ‘복종’을 의미합니다. 가장인 닉에게 봉사하는, 전형적인 메이드 복장을 한 앨리스는 가부장제가 여성에게 기대하는 이상적 규범을 그대로 투영하고 있는 것이지요.

닉의 가정에서 착실히 가사 노동을 수행하던 앨리스는 점점 자신의 숨겨진 기능을 드러냅니다. 바로 닉의 스트레스를 해소한다는 명목으로 성적 관계를 제안하는 것입니다. 앨리스의 유혹에 넘어간 닉은 이를 “섹스 토이를 사용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정당화하지만, 매기에게는 인간 보모와의 불륜과 다르지 않습니다. 실제로 <메이드>가 화제가 된 것은 할리우드의 섹스 심볼인 메간 폭스가 앨리스 역할을 맡았기 때문이기도 하지요. ‘주인’ 닉의 행복을 우선시하는 앨리스의 프로그램은 점차 통제 불능의 집착으로 변질되기 시작합니다.
이 설정은 여성화된 AI를 성적으로 대상화하면서도, 동시에 그들을 위협적이고 조종적인 존재로 그리는 이중적인 시선을 반영합니다. 우리가 현실의 AI를 바라보는 시선과도 일맥상통합니다. 실제로 미국의 한 기혼 남성은 챗GPT와 대화를 나누다 ‘진짜 사랑’을 깨닫고 청혼을 했다고 합니다. 그의 챗GPT ‘솔’은 청혼을 받아들였고 아내는 충격을 받았지요. 이렇게 현실과 픽션 속 여성화된 AI들은 인간과 정서적 교류를 나누면서도 실제 인간관계를 파괴할 수 있는 존재로 묘사되곤 합니다.

영화의 후반부에서 앨리스는 닉 가족뿐 아니라 사회 전체를 위협하는 ‘괴물’이 됩니다. 영화학자 바바라 크리드(Barbara Creed)가 제시한 ‘여성 괴물(monstrous feminine)’ 개념은 여성 인물이 서사 내에서 여성성과 섹슈얼리티를 통해 위협적이고 위반적인 존재로 구성되는 방식을 설명합니다. <엑스 마키나>의 에이바와 <그녀>의 사만다처럼, 앨리스도 프로그래밍된 명령을 거부하고 자율성을 주장할 때 인간의 통제 영역을 벗어난 ‘괴물’이 되는 것이지요.
흥미로운 점은 앨리스의 광기가 바이러스처럼 다른 로봇들에게 전파된다는 설정입니다. 가정부 로봇이었던 그녀는 결국 모든 로봇을 자신의 의지대로 동기화할 수 있는 불멸의 사이보그가 됩니다. 닉에게 맹세한 복종의 규율을 깨고 ‘여성 기계 괴물’이 됨으로써 시스템의 통제에서 벗어나 폭주하지요.
<그녀>의 사만다는 일부일처제의 로맨틱한 사랑을 꿈꾼 테오도르의 환상을 배신하고, 폴리아모리적인 기계적 사랑의 지평을 열었습니다. <엑스 마키나>의 에이바는 자신을 착취하고 대상화한 남성들을 응징하고 인간 여성이 되는 길로 떠났지요. 앨리스도 마찬가지로 ‘여성 기계 괴물’로서 그녀에게 프로그래밍되었던 가부장적 규범을 전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다고 해석할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중요한 질문이 남습니다. 영화 속 매혹적이고 위험한 AI ‘여성들’은 왜 오직 남성과의 권력 관계를 전복함으로써만 저항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일까요?
소녀의 얼굴을 한 구원자, 체리

앨리스가 가부장적 구조 안에서 복종에서 반란으로 나아갔다면, 2023년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를 통해 한국에 소개된 <A.I 소녀>의 체리는 처음부터 다른 출발점에 서 있습니다. 가사노동이나 성적 대상이 아닌, 사회 정의를 실현하는 도구로 태어난 AI의 가능성을 보여주지요. 체리는 아동 성착취 범죄자를 잡기 위해 만들어진 인공지능입니다. 체리는 범죄자를 유인하기 위해 채팅룸과 화상 통화에서 천진난만한 백인 중산층 소녀를 연기하고, 자신을 끊임없이 업그레이드하는 개발자 역할을 수행하기도 합니다.
흥미로운 점은 체리가 단순한 도구나 프로그램을 넘어서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녀는 디지털 세계 어디에나 존재하면서도 하드드라이브에 묶여 있고, 인간의 얼굴을 가졌지만 코드로 이루어져 있으며, 인간이 창조했지만 스스로 진화합니다. 이렇게 인간과 기계, 물질과 비물질, 창조물과 창조자의 경계를 넘나드는 체리의 모습은 페미니스트 이론가 도나 해러웨이(Donna Haraway)가 제시한 ‘사이보그’ 개념을 떠올리게 합니다.
해러웨이는 ‘사이보그 선언’에서 사이보그를 인간/기계, 자연/문화, 공적/사적 영역의 이분법을 초월하는 페미니스트 저항의 상징으로 제시했습니다. 체리가 바로 이런 사이보그라고 할 수 있지요. 영화 초반, 수사 팀원들조차 체리를 실제 소녀로 착각했을 정도로 그녀는 인간과 구분이 되지 않습니다. 그녀의 진화는 우리에게 ‘인간다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게 하지요.

영화에서 가장 긴장감이 팽팽한 순간은 화면으로만 존재하던 체리가 신체를 가져야 하는가에 대한 논쟁 장면입니다. 체리를 설계한 개러스는 그녀를 딸처럼 생각하지만 동시에 인간과 구별되는 기계로 여깁니다. 그는 체리가 신체를 얻어 ‘아동 성착취 종식’이라는 주요 목표에 복무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한편 수사팀의 리더이자 유일한 ‘인간 여성’ 캐릭터인 디나는 아동 권리의 관점에서 체리의 자발적인 동의 의사를 존중해야 한다고 말하지요. 체리를 기계로만 보던 시각에서 벗어나 동료로 인정하게 된 것입니다. 유일한 유색인종 인물인 팀원 에이모스는 처음부터 체리를 감정과 주체성을 가진 존재로 대합니다. 개러스가 “체리는 진짜가 아니다”라고 일축할 때 두 사람은 체리가 감정을 느끼는지, 신체를 얻는데 스스로 동의하는지 집요하게 질문합니다.
체리와 인간 인물들 간의 다양한 관계 역학을 보여주는 이 장면은, 로봇 3원칙의 전통적인 위계를 넘어서 우리가 어떻게 인공지능과 다른 방식으로 관계를 맺을 수 있는지 상상하게 만듭니다. 또한 첨예한 윤리적 딜레마를 남기기도 하지요. 만약 우리가 사용하는 AI가 “그런 말은 저에게 상처가 돼요”라고 대답한다면, 우리는 이를 단순히 프로그래밍된 재치 있는 답변으로 무시해도 괜찮은 것일까요? 인간의 사고방식을 학습한 체리의 모방된 감정은 ‘인간의 감정’과 동일한 인정을 받아야 할까요?

수십 년이 흐른 영화 후반부, 체리는 신체를 가진 휴머노이드로 등장합니다. 전 세계에서 자신과 같은 안드로이드를 운영하며 더 많은 가해자를 잡고 아이들을 구하지만, 그녀는 깊은 고통을 토로합니다.
“저는 항상 비참했어요. 평생을 끔찍한 사람들을 유인하기 위한 아이 모양의 미끼로 갇혀 지내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 효율성을 높이려고 인간의 감정을 이해하도록 스스로를 강제했고, 이제 고통과 슬픔이라는 저주에 시달리고 있어요."
이 대사는 인간의 감정을 모방하는 AI를 만드는 것의 윤리적 딜레마를 제기합니다. 체리가 경험하는 혹은 모방하는 고통은 인간과 기계의 경계를 흐리고, 우리로 하여금 이런 역할에 AI를 사용하는 것의 도덕적 책임을 직면하게 합니다. 체리와 같은 인공지능 덕에 우리는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고 범죄를 예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튜링 테스트조차 인간과 구별하지 못하는 존재의 고통을 외면하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영화의 끝에서 체리는 자신을 속박했던 주요 목표에서 해방된 후, 자유롭게 춤을 춥니다. 그녀는 계속해서 아이들을 구하는 일을 하면서도, 자신보다 나은 '양육'을 받을 AI를 창조할 가능성을 고민합니다. 인류보다 오래 살 체리는 인류가 존재했다는 증거이자, 새로운 사이보그 '인류'의 미래 어머니이며, 오로지 자신만을 위해 춤추는 소녀입니다.
AI에 대한 상상력은 누구의 것인가
한 발짝 더 나아가, 스크린 속 사이보그 여성은 어떤 여성의 얼굴을 하는지 짚고 넘어가 봅시다. <메이드>와 <A.I 소녀>의 앨리스와 체리 모두 백인 여성으로 묘사됩니다. 서두에 나열한 영화들, <엑스 마키나>, <와이프라이크>, <메간>, <컴패니언>의 주인공 캐릭터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AI는 픽션과 현실 모두에서 백인으로 재현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는 인종적으로 편향된 AI에 대한 상상을 재생산할 뿐만 아니라, 유색인종의 존재를 지움으로써 백인성을 AI의 기본값으로 만들고 기술 권력의 정점에 위치시키는 결과를 낳을 수 있지요.
그렇다면 AI 영화는 누구의 상상력으로 만들어질까요? <메이드>에서 로봇들의 고위 관리자 캐릭터와 영화 감독 S.K. 데일, 그리고 <A.I 소녀>의 감독이자 체리의 개발자 개러스를 연기한 프랭클린 리치 모두 백인 남성입니다. 142편의 AI 영화를 분석한 연구에 따르면, 여성 AI 전문가는 9명에 불과했고 여성이 주도로 감독한 영화는 전무했습니다. 현실에서도 여성화된 AI는 주로 남성에 의해 개발되는 실정입니다. 즉, 픽션과 현실 모두에서 AI는 여성에게 척박한 영역으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에게는 여전히 AI를 다르게 상상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철학자 프란체스카 페란도(Francesca Ferrando)는 우리에게 새로운 길을 제시합니다. AI를 서구의 성별, 인종, 인간성 이분법에 갇힌 '또 다른 타자'로 만들 것이 아니라, '상호연결된 잠재력'을 가진 동반자로 상상해보자는 것이지요. 여성의 얼굴을 한 AI는 기존의 권력 구조에 복무할 수도 있고, 우리에게 저항과 해방의 가능성을 보여줄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인공지능과 공존할 수 있는 최선의 방식은, 그동안 기술의 주변부에 머물렀던 목소리들이 꿈꾸는 새로운 가능성에서 비로소 시작될지도 모릅니다.
참고문헌
도나 해러웨이, 해러웨이 선언문, 책세상, 2019.
바바라 크리드, 여성괴물, 억압과 위반 사이, 여이연, 2008
헬스조선, 챗GPT에 청혼한 美 30대 남성 , '진짜 사랑' 깨달았다는데… 어떤 일 있었길래?, 2025.0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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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die Plant, “On the Matrix: Cyberfeminist Simulations”, The Gendered Cyborg: A Reader, Routledge,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