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개가 빠르다는 건 정말 칭찬일까?
사이다와 2배속만 남은 자리에는
“대체 사이다는 언제 나와?” 흔히 이야기에서 갈등 구간은 ‘고구마’, 문제를 해결하고 악인을 응징하는 결과는 ‘사이다’로 불린다. 고구마 이후에 사이다가 곧바로 뒤따르는 빠른 전개는 언제부턴가 모든 콘텐츠의 미덕이 됐다. 하지만 빠른 속도 중심의 사이다 서사만이 정말 좋은 이야기일까? 전개가 빠르다는 게 의심 없이 호평으로 받아들여지는 세계는 이대로 괜찮을까?
시청자는 더 이상 기다리지 않는다

유튜브 ‘채널십오야’에서 나영석 PD와 김태호 PD는 초창기 6개월 이상 부진했지만 결국 대표 예능 프로그램이 된 <무한도전>에 대해 ‘지금이라면 그러지 못할 것’이라고 입을 모아 말했다. 예능 한 시즌 당 6~12편으로 짧아지면서 이제는 플랫폼과 시청자 모두 성장에 걸리는 시간을 기다려주지 않기 때문이다.
이 현상은 드라마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연재를 기다릴 필요 없는 빈지 와칭(Binge-watching)의 대명사 '넷플릭스'가 2016년 국내에 진출하며 콘텐츠 소비 방식이 변화하기 시작했고, 코로나-19 팬데믹을 기점으로는 OTT가 일상화됐다. 방송사에서 OTT 위주로 바뀐 유통 환경, 제작비 절감 등의 이유와 맞물리면서 2020년 초반만 해도 20~24부로 제작되던 드라마는 16부, 14부를 거쳐 현재 12부까지 줄어들었다. 24부에 걸쳐 전개하던 이야기를 덜어내고 압축해 12부로 만들었으니 말하자면 2배속을 한 셈이다.
1) 빈지 와칭: 에피소드를 한꺼번에 오픈해서 몰아보도록 유도하는 방식
‘늘어져서 하차합니다’ 해결에 매몰된 감상법

그런데 시청자들은 이렇게 2배속 한 드라마를 또 2배속으로 감상한다. 틱톡, 쇼츠, 릴스 등 짧은 영상을 무한히 감상하는 시청 습관이 자리 잡은 영향도 있다. 짧은 이야기, 결과 중심의 빠른 전개에 적응해 가속도가 붙은 시청자들은 인내심을 요구하는 긴 이야기에 이전보다 더 불편함을 느끼는 것이다. 그래서 갈등 구간이 나오면 빠르게 감거나, 아예 그 장면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건너뛰어서 자체적으로 결론으로 향하고 만다.
전개되는 서사를 차근차근 따라가기보다 즉각적인 해결 중심의 감상법은 또 다른 시리즈 콘텐츠인 웹툰과 웹소설에서도 극명하게 나타난다. 편수가 정해진 드라마와 달리, 웹툰과 웹소설은 보통 실시간에 가깝게 연재를 진행하기 때문에 처음부터 완결 시점을 명확히 알리지 않는다. 문제는 연재를 보는 독자들의 반응이다. 완결 시점이 100화인지 200화인지도 모르면서 이야기가 조금만 길어진다 싶으면 ‘40화까지 봤는데 진전이 없어서 하차합니다’, ‘70화까지 읽었는데 늘어지네요’ 같은 리뷰가 흔히 달린다.

독자가 작품의 별점을 회차별로 매기는 네이버웹툰에서는 이런 반응이 더 노골적이다. 연재 중 주인공이 고난을 겪는 구간이 나오면, 이야기 전개상 반드시 필요한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회차보다 별점이 확연히 낮아지는 현상을 쉽게 볼 수 있다. 작품 전체의 완결성이 아닌, 당장 오늘 연재된 이 한 편이 ‘답답한 고구마 없이 얼마나 빠르게 전개되는지’에 더 집중하고 그것으로 작품을 평가해 버리는 것이다.
그렇게 사이다와 2배속만이 남은 자리에는

빠른 전개, 빠른 해결, 빠른 결론. 이것이 정말 이 시대의 콘텐츠가 가져야 할 덕목이고, 이것만이 전부일까? 16부 드라마를 12부로 줄인다고 가정해 보자. 한 회차의 길이는 1시간 내외로 동일한데 전체적인 편수가 줄어든다면 결국 16시간짜리가 아닌 12시간짜리 이야기를 해야 한다. 그러면 등장인물은 주연 위주로만 제한되고, 사건의 수는 줄어들며, 감정의 깊이는 얕아진다. 그러다 보면 엔딩은 찍어낸 듯 비슷한 결론으로 향한다.
웹소설과 웹툰도 마찬가지다. 한 편의 분량은 대체로 비슷한데 더 짧은 길이와 더 빠른 전개만을 바란다면, 결국 우리는 하나의 이야기가 가질 수 있는 물리적인 공간을 잃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짧고 빈약해진 이야기는 쉽게 휘발된다. 우리가 이야기를 통해 가질 수 있는 공감의 기회, 상상의 기회, 사유의 기회는 그만큼 줄어든다. 모든 이야기가 2배속 한 사이다 서사로만 전개된다면 결국 그 자리에는 여운도, 메시지도 남지 않을 것이다.
물론 모든 콘텐츠가 꼭 사유의 장이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일상의 스트레스를 잊고 가볍게 볼 수 있는 ‘대리만족’ 유형의 콘텐츠도 분명히 존재한다. 하지만 문제는 기획 의도가 그렇지 않은 콘텐츠에마저 동일한 기준을 적용하려 한다는 점이다. 모든 이야기가 길고 느릴 순 없지만, 모든 이야기가 반드시 짧고 빠를 필요도 없다. 깊게 파고들 만한 여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짧고 빨라야 한다는 강박에 시청자도 제작자도 조급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휘발되지 않는 이야기에는 갈등이 있다

드라마 <태풍상사(2025)>는 최근 드물게 16부작으로 방영됐다. 주인공 ‘강태풍’과 악역 ‘표현준’ 사이의 갈등이 반복되며 16부작이 지나치게 길다는 반응도 있었지만, 필자는 16부작인 덕분에 이 작품의 강점을 살렸다고 생각한다.
문제 해결의 관점, 즉 주인공의 복수가 언제 이뤄지는지에만 집중해 작품을 본다면 갈등이 빠르게 해소되지 않는 것에 피로감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태풍상사>의 지향점은 주인공의 성공기에만 있지 않다. 1997년 IMF 한복판을 지나던 평범한 사람들의 희로애락을 재현하고, 이를 통해 위로와 용기의 메시지를 주는 것이 애초의 기획의도이기 때문이다.
'이 드라마는 그 험난했던 파도를 먼저 넘었던 이웃들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많은 매체에서 IMF를 다루었지만, 대부분 정치나 경제 등 큰 부분에서의 관점 혹은 실패와 아픔 등을 말했다면 여기서는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그 시절의 소시민들, 보통의 사람들은 어떻게 그 위기를 버텨냈는지, 그리고 그 실패와 아픔을 딛고 일어서는 과정을 통해 희망의 메시지를 말하겠습니다.'
_tvN 드라마 <태풍상사> 기획의도
즉, 이 작품의 초점은 주인공이 통쾌하게 고난을 돌파하는 것보다 인물 한 명 한 명이 좌절하고 다시 일어나는 과정을 진득하게 보여주는 것에 맞춰져 있다. 그렇기 때문에 주인공뿐 아니라 주인공의 가족, 친구, 동료 등 태풍상사를 이루는 모든 인물의 면면을 넓고 세밀하게 다룬다. 그러기 위해 의도적으로 16부작을 선택한 것이다.
어떤 메시지는 결론에 이르기까지 충분한 고난, 갈등, 시간이 필요하다. 휘발되지 않고 오래 남을 이야기일수록 그렇다. 그 메시지를 발견할 기회를 지금의 우리는 스스로 저버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 모두에게 사이다가 필요한 건 아니니까

전개가 빠르다는 건 모든 작품에 대한 칭찬이 될 수 없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각 콘텐츠의 고유성에 알맞은 형태를 갖는 것이다.
예를 들어, 토크 및 인터뷰 포맷이 주를 이루는 유튜브 채널 ‘뜬뜬 DdeunDdeun’, ‘요정재형’은 주로 50분에서 1시간 분량의 영상을 게재한다. 편집을 최소화해서 시각적 자극을 줄이고 대화의 흐름을 온전히 담아내는 것이 특징인데, 그 덕분에 '밥 먹거나 일할 때 라디오처럼 편하게 틀어놓는다’는 시청자 댓글을 쉽게 볼 수 있다. 이전에는 '유튜브 영상은 20분을 넘기면 안 된다' 같은 불문율이 있었지만, 이 채널들은 그런 공식보다는 콘텐츠의 성격을 살리는 방향을 과감히 선택하고 호평을 이끌어냈다.
또한 드라마 <무빙(2023)>의 작가 강풀은 OTT 플랫폼으로 '디즈니 플러스'를 선택한 이유 중 하나가 다른 플랫폼과 달리 배속 기능이 없어 창작자의 의도대로 감상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밝힌 적 있다. 이처럼 시청자도 해결 위주의 빠른 전개만 좇기보다는 작품의 고유한 메시지를 존중하고, 의도한 호흡을 차분히 따라가는 감상 습관이 필요하다.
이 시대가 더 가볍고 빠르고 짧은 것을 갈구하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하지만 오랜만의 16부작 드라마 방영 소식을 들었을 때, 유튜브 피드에서 1시간짜리 긴 영상을 발견했을 때 묘한 안도감과 반가움을 느끼는 시청자도 한편에 여전히 존재한다.
변화를 피할 수 없다면 적어도 스스로 가속하고 있지는 않은지 경계하길 바란다. 사이다 서사에 매몰되어 모든 이야기가 지나치게 납작해지고 있지 않은지, 결코 세 줄로 요약될 수 없는 이야기에마저 ‘세 줄 요약’을 바라고 있지 않은지 돌아볼 때 비로소 우리의 콘텐츠 생태계에도 더 많은 선택지와 다양성이 존재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