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워지지 않는 관계의 흔적

복원되는 기억과 사라지는 기억이 증명하는 것

지워지지 않는 관계의 흔적

살면서 꼭 한 번쯤은 ‘있을 때 잘할걸’이라는 말을 되뇌는 순간이 찾아옵니다. 관계는 끝났는데 마음은 끝나지 못한 채 오래 남습니다. 그때 우리가 붙드는 것은 상대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다는 후회이기도 하고, 끝내 전해지지 못한 마음이기도 합니다.

이런 감정은, 상대에 대한 이해에 다다르지 못해 생겨나는 잔여물이 아닐까요. 상대가 되어보지 않는 한 완전한 이해란 불가능하고, 두 존재가 충돌하는 모든 관계에는 필연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몫이 남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어쩌면 그 잔여물을 없애는 일이 아니라 그것이 남은 이후에도 ‘삶의 동력으로 보존하는 방식’일 것입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원더풀 라이프>와 미셸 공드리의 <이터널 선샤인>은 바로 이 지점에서 만납니다. 두 영화는 기억을 다루지만 실은 기억보다 더 먼저 있었던 관계의 흔적을 응시합니다. 하나는 복원을 통해, 다른 하나는 삭제를 통해.

<원더풀 라이프>, 1998

복원되는 것은 기억이 아니라 관계다

사진 출처: IMDb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추억을 하나 고르세요.’

천국에 당도하기 전 죽은 이들은 중립지대 림보에 머물며 자신이 간직할 단 하나의 기억을 선택합니다. 주어진 시간은 7일. 그 기억은 림보 직원들의 도움을 받아 촬영되고, 상영되고, 그렇게 한 사람의 마지막 소지품이 되어 천국으로 옮겨집니다.

설정만 놓고 보면 판타지처럼 보이지만 톤은 오히려 현실적입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이 작품을 두고, “다큐멘터리처럼 바로 지금 생성되는 것을 찍어 나가기”를 바랐다고 말했습니다. 죽은 이들이 어떤 기억을 고를지 미리 설정해두기보다는 실제 일반인들에게 질문을 던지고 고민의 시간을 영화 안으로 끌고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영화는 허구 속에서도 실제 삶의 우연과 머뭇거림, 설명되지 않는 감정을 고스란히 남깁니다.

사진출처: IMDb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행복한 기억을 고른다는 사실 자체가 아닙니다. 기억의 대부분이 혼자 완성된 장면이 아니라는 점이 눈에 띕니다. 누군가와 함께 걸었던 길, 누군가와 웃음을 나눴던 시간, 자신이 누군가에게 다정했던 혹은 다정함을 받았던 순간들. 우리가 마지막까지 붙드는 것은 결국 관계의 장면입니다. 삶이란 혼자 산 것 같아도 기억은 늘 타인의 체온을 경유해 선명해집니다.

특히 모치즈키의 결말은 <원더풀 라이프>가 관계를 어떻게 바라보는지 가장 잘 보여줍니다. 그는 오랫동안 타인의 기억을 복원하면서도 정작 자신의 기억은 선택하지 못한 채 경계에 머물러 있던 인물입니다. 그런 그가 마침내 떠날 수 있게 되는 계기는, 자신이 누군가를 사랑했다는 사실보다도 자신 역시 누군가의 행복이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관계는 이렇게 뒤늦게 흔적을 남깁니다. 살아 있을 때는 미처 몰랐던 의미로.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시점에.

그러므로 기억의 복원은 단순히 과거를 되살리는 일이 아니라, 자신이 누군가와 어떤 방식으로 연결되어 있었는지를 비로소 받아들이는 과정입니다.

<이터널 선샤인>, 2004

지워진 자리에서 더 선명해지는 것

사진출처: IMDb

반면 <이터널 선샤인>은 기억을 복원하는 대신 삭제하려 합니다. 클레멘타인과 조엘은 서로를 사랑했지만 사랑만으로는 지속되지 않는 관계의 피로와 상처 앞에서 끝내 서로의 기억을 지워버리기로 합니다. 새 출발을 위해서입니다. 관계가 남긴 고통을 없애기 위해서입니다.

하지만 영화는 이 선택을 따라가며, 기억이란 그렇게 간단히 잘라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삭제되는 것은 단지 부정적인 사건이나 지긋지긋한 감정만이 아닙니다. 상처를 지우니 기쁨도 함께 사라집니다. 고통을 덜어내려 했을 뿐인데 자신의 일부가 통째로 무너져 내립니다. 비극은 여기에 있죠. 관계는 좋은 기억과 나쁜 기억으로 분리되지 않고, 사랑과 모멸, 설렘과 피로, 환희와 수치가 한 덩어리로 뭉쳐 있다는 사실 말입니다.

사진출처: IMDb

미셸 공드리 감독은 복잡한 감정의 덩어리를 초현실적인 이미지로 가시화합니다. 기억 속 인물의 얼굴이 지워지고, 장소의 구조가 무너지고, 시점은 뒤섞이는 등 많은 장면들이 무의식의 문법을 따릅니다. 이는 단순한 스타일이 아니라 관계의 본질을 드러내는 형식입니다. 질서정연하지 않을 뿐더러 결핍이나 충동, 불안이 뒤엉킨 채 작동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터널 선샤인>에서 관계는 결코 ‘정리’되지 않습니다. 지우려 할수록 더 강하게 되살아나고, 잊으려 할수록 더 깊은 층위에서 모습을 드러냅니다. 조엘이 붙들고 싶었던 것은 완벽했던 사랑의 모양이 아닙니다. 오히려 둘 사이가 얼마나 엉망이었는지를 포함한 채, 그럼에도 분명 존재했던 어떤 진실입니다. 클레멘타인과 함께 있을 때 자신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자신이 누구에게 다정할 수 있었는지, 또 누구에 의해 흔들렸는지를 놓치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조엘이 신기루처럼 사라지는 기억과 의식을 어쩌지 못하겠다고 말하는 순간에 꿈 속 클레멘타인은 ‘그저 즐기자’고 합니다. 관계는 잠시 머물다 사라지는 빛처럼 보입니다. 영원히 가질 수 없음을 알면서도 한 시절을 같이 살아냈다는 사실이 가치를 만듭니다. 지워졌는데도 남는 것. 끝났는데도 끝나지 않는 것.

그럼에도 두 영화는 같은 곳을 향한다

사진출처: IMDb

겉으로 보면 <원더풀 라이프>와 <이터널 선샤인>은 정반대로 향하는 듯합니다. 하나는 추억을 복원하고, 다른 하나는 추억을 삭제합니다. 하나는 기억을 고르고 붙든다면, 다른 하나는 기억을 지우며 무너져 내립니다.

하지만 두 영화는 한 방향으로 묻습니다.

“당신은 마지막에 어떤 관계의 장면을 들고 갈 것인가.”

“설령 지우려 해도 지워지지 않는 사람은 누구인가.”

질문은, 삶이 관계를 통해 비로소 밀도를 얻는다고 말합니다. 기쁨도, 상처도, 후회도, 미련도 모두 타인과의 인력 속에서 자라난다고. 물론 우리 사이에 소중한 관계가 존재했다는 깨달음은 늘 조금은 늦고, 조금은 모자라고, 조금은 어긋난 채로만 도착하는 것이겠죠.


그러니 어떤 관계의 단절 이후 찾아오는 여진, 감정의 찌꺼기, 잔여물은 당연한 것입니다. 살면서 경험하게 될 여러 이별 앞에 무력해지지 않기 위해서는 받아들여야 합니다. 사람 사이의 일은 서로를 완전히 이해하는 일 너머, 누군가를 사랑했고 또 사랑받았다는 사실 하나로 충분히 우리를 살게 한다고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