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마을 이름이 뮤지엄 선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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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마을 이름이 뮤지엄 선흘?

제주 조천읍 선흘 1리. 평범해 보이는 이 작은 마을에 2023년부터 '뮤지엄 마을'이라는 독특한 명칭이 따라붙었습니다. 보통 한 건물 내에서 이루어지는 전시 공간을 '뮤지엄'이라 칭하기에, 마을 전체가 뮤지엄이라는 것이 어딘가 낯설게만 느껴지기도 합니다. 필자도 직접 가보기 전까지는 그 풍경을 쉽게 상상하기 어려웠는데요. 예술가 동네처럼 같은 목적과 꿈을 지닌 예술가들이 모여 형성한 아트 빌리지와는 확연히 달랐습니다.

뮤지엄 선흘은 외부 목적 아래 만들어진 공동체가 아닌, 그야말로 태어날 때부터 그곳에 살던 토박이 주민들이 삶의 터전에서 스스로 일구어낸 마을 공동체 커뮤니티이기 때문입니다.


너무 넓은 뮤지엄 한바퀴

선흘 뮤지엄을 찾아가려면 어디를 도착지로 설정해야 할까. 첫 방문을 앞둔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장 어려워하는 부분입니다. 마을 곳곳에 전시장이 펼쳐져 있으니 행선지가 한두 군데가 아님은 당연한 일. 뾰족한 도착지를 정하기보다는 마을을 투어한다는 마음가짐으로 시작하는 것이 현명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궁금하다면 뮤지엄의 시작점은 선흘 체육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류장에 내리자마자 동사무소를 등지고 고개를 들면 작은 슈퍼가 보입니다. 선흘1리 마을 주민들이 가장 애용하는 구멍가게, 그곳을 왼쪽에 끼고 골목길을 따라 쭉 올라가면 선흘체육관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곳은 마을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뮤지엄이기에 방심은 금물! 체육관을 앞두고도 많은 골목길이 보일테지만, 그래도 발길이 향하는대로 걷다보면 길가 곳곳에서 미술관 표지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혹시 너무나 개인적인 공간 같아 들어가기 망설여지나요? 맞습니다. 이곳의 전시장들은 할머니들이 실제로 살고 계신 집, 마당, 때로는 제사를 지내는 방 혹은 농기구를 보관하던 낡은 창고이기도 합니다.

평생을 살아온 삶의 공간 자체가 예술 현장이 되었습니다. 할망들은 뒤늦게 시작한 그림에 매료되어 붓을 들면 시간 가는 줄 모를 정도로 열정적이죠.


체육관에서 피어난
예술 공동체 커뮤니티

선흘 마을에 그림 열풍이 불기 시작한 건 다름 아닌 어린 아이들을 대상으로 진행했던 미술 수업부터였습니다. 아이들이 창고에 얽힌 할머니들의 삶의 이야기들을 들으며 낡은 창고를 그려내던 중, 그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홍태옥 할머니께서 문득 "나도 한번 그려보겠다"며 목탄을 집어들었다고 해요. 그 때 최소연 감독님(미술 선생님)도 손뼉을 쳤습니다. 며칠 후 간단한 미술용품과 함께 할머니를 찾아가자 자연스레 주변 주민들도 모이기 시작해, 현재는 예술공동체인 소셜뮤지엄 아래 11명의 할망 화가들이 모였다고 합니다.

할망들은 이제 틈만 나면 마을 체육관에 모여 그림을 그립니다. 모두 모이면 최소연 미술 선생님의 특별한 수업이 시작됩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전문적인 화실 수업과는 사뭇 다른 건, 할머니들이 받는 수업은 전문적인 그림 스킬을 연마하기 위한 목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도움을 요청하더라도 선생님은 말로만 방향을 제시할 뿐 직접 붓을 들어주지는 않습니다. 그럴 때마다 할머니들은 장난스레 "우리 선생님은 도와주지 않는다"며 서운해하시기도 하지만, 최소연 선생님은 그런 할머니들을 보며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은 정말 작가이기 때문이에요. 방향은 알려줄 수 있어도, 방법은 스스로 찾아야 합니다."

우리는 흔히 미술을 배우며 어떻게 하면 '잘 그린 그림'을 그릴 수 있을 지 끊임없이 연구하고 배우고 노력합니다. 선흘 할망 화가들 작품에서 정교한 묘기나 완벽한 기법을 찾을 수는 없지만, 누군가의 삶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공간 속에서 감히 다른 사람은 흉내 낼 수 없는 진정성 있는 그림과 이야기들을 볼 수 있습니다.


제주 여성들의
해방이 된 ‘그리기'

일제강점기, 그리고 제주 4.3 사건이라는 격동의 시기를 온몸으로 겪어내신 할머니들은 당시 남편을 잃거나 어린 자식을 떠나보내기도 했으며, 한순간에 어린 동생들을 보살펴야 하는 가장이 되기도 했습니다. 평생을 농사일과 고된 집안일에 매달려 자신을 위해 살아본 적이 없는 전형적인 제주 여성들입니다.

특히, 제주 4.3 사건은 1948년 4월 3일을 기점으로 제주에서 발생한 무력 충돌과 진압 과정에서 수많은 주민들이 희생된 비극적인 역사입니다. 이념의 대립 속에서 무고한 제주 도민들이 폭력과 학살에 시달려야 했으며, 이로 인해 공동체 전체에 깊은 상흔이 남았습니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평생 고된 밭일을 해야만 하는 운명으로, 또는 4·3 사건으로 학교가 불에 타 글을 배울 기회마저 박탈당했던 당신들이기에, 가슴 깊숙이 박혀있는 아픔들을 밖으로 꺼내지 못하고 세월을 흘려보낼 수밖에 없었는데요. 하지만 그림이라는 새로운 언어를 만나면서부터 할머니들이 꽁꽁 숨겨왔던 이야기들을 세상에 내보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대부분 평생 그림과는 인연이 없었지만, 마을 주민들과 문화 기획자들의 노력으로 배움과 창작의 기쁨을 발견한 것입니다.

할머니들의 그림 옆에는 직접 손글씨로 쓴 짧은 글들이 더해져 깊은 인상을 남깁니다. 정식 학교 교육을 받지 못했기에 맞춤법이 틀렸어도 꾸밈없는 순수함과 진정성으로 독자들의 마음을 움직이며 강렬한 메시지를 전합니다. 대표 작품 보기

할머니들의 그림 소재는 매일 베고 자는 베개부터 정성껏 농사짓는 밭 풍경, 가족처럼 여기는 소까지 지극히 일상적이며 다양합니다. 특히, 가장 무뚝뚝해보였던 오가자 할머니의 그림에서 흡사 인상주의 화풍을 연상시키는 느낌을 받고 큰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납니다. 귀가 잘 들리시지 않아 소통이 원활하게 이루어지지는 않으나, 그릴 때만큼은 선흘 할머니들 중 최고의 몰입도를 보여 '그림의 신'이라고 불린다고도 합니다.

또한, 최고령자인 1930년생 조수용 할머니는 '으라차차 할망'이라는 별명처럼 작고 민첩한 체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비범한 총명함을 지니고 있습니다. 할머니의 그림과 글에는 평생을 품고 있던 가슴 아픈 이야기들이 담겨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림과 글에서 배어 나오는 긍정의 에너지는 강인한 제주 할머니들의 삶을 대표하기도 합니다. 그림 속 할망이 집 한 채를 번쩍 들어 올리듯, 실제로 만나 뵀을 때도 할머니는 왜소한 체구로 힘차게 걸으며 귤 한 바구니를 거뜬히 옮기셨습니다. 그 강인함 속에서도 소처럼 맑고 고운 눈빛으로 저를 보시던 모습이 오래도록 잊히지 않습니다.


진정한 지역문화예술
커뮤니티란 무엇일까

소셜뮤지엄은 제주라는 독특한 지역성과 깊은 역사의 맥락 속에서, 할머니들의 삶과 예술이 만나 깊은 치유와 새로운 희망을 꽃피운 지역문화예술 공동체입니다. 평생을 고단한 노동으로 살아온 할머니들은 그림을 통해 억눌렸던 상처를 보듬고 자아를 찾아가는 과정을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그림을 그린다는 행위 자체가 삶에서 해방이 되었다는 할망들과

선흘 뮤지엄은 지속 가능한 지역 발전의 소중한 동력이기도 합니다. 주민들이 직접 참여해 만든 문화예술 콘텐츠는 지역 고유의 가치를 높이고 깊이 있는 문화 교류를 이끌며 지역 경제 활성화에 기여합니다. 최근에는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를 주제로 한 그림들을 선보여 더 많은 사람들이 선흘을 찾고 있는데요. 특히 마을 곳곳을 그대로 전시장 삼아 예술의 문턱을 낮췄다는 점도 차별화된 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매번 지역문화예술의 성공적인 사례를 떠올릴 때마다 가장 먼저 생각나는 선흘 마을을 소개할 수 있어 감회가 새롭습니다. 마을 공동체 개념이 희미해져가는 세상에서 '마을이 만든 예술 커뮤니티'라니. 선흘에 뮤지엄이라는 단어가 붙음으로써 '공동체로서의 마을’이란 의미를 다시 생각해보도록 만드는 것 같습니다.

다니기 쉽게 곧게 뻗은 정비된 도로, 낡은 간판을 없애고 새롭게 만들기, 쉼터로서의 공원 만들기처럼 현대사회에서 만연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마을 재정비 사업도 뒤따라 떠오릅니다. 물리적 환경 개선에 그치는 것이 아닌, 마을의 분위기를 간직한 채 주민들이 모여 자발적으로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삶의 터전 곳곳을 예술 공간으로 만들어가는 것. 그런 게 진짜 지역 재생이자 상생이며 진짜 마을 만들기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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