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대 회화는 어떻게 경험되는가
디지털 이미지 시대의 회화들

스마트폰 화면이, 노트북 화면이, 전광판이. 빛을 발했다가 다시 검게 물든다. 빛과 함께 이미지가 등장하고 손짓 한 번에 사라진다. 스와이프 한 번에 픽셀들의 조합도, 그 조합이 만들어내는 서사도 우리는 알 수 없는 뒤편으로 사라진다. 우리는 이제 어쩌면 물리적인 세계에 물질로 존재하는 이미지보다, 마치 도깨비불처럼 빛났다가 사라지는 이미지를 더 많이 접하고 있을지 모른다. 우리가 매일 거리에서 마주치는 간판과 포스터도 전부 웹 위로 업로드된다. 물리적인 간판과 포스터는 이제 이미지의 원본이라기보다 기시감의 원천이다. “이 간판 인스타그램에서 본 적이 있는데?”

이렇게 가볍게 변화하는, 빛을 발했다가 사라지는 이미지의 시대에서 회화는 어떻게 우리에게 나타나고 있을까? 수 세기 동안 시각예술에서 특권적인 위치를 점하던 회화는 우리 시대의 시각적 조건 자체가 변화함에 따라 자신의 매체적 특성이 도전받고 있음을 느끼고 있다. 동시대 ‘시각성’ 자체를 대변한다고 여겨지던 회화의 특권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게 된 것이다.
디지털 이미지에 대한 동시대 회화의 파라고네
르네상스에는 세계의 재현을 두고, 회화가 조각과 ‘파라고네’를 벌였다. 이탈리아어로 경쟁이란 뜻을 지닌 파라고네는 예술 장르 간의 라이벌 관계를 설명하는 용어다. 마치 한 부모에게서 태어난 자매나 형제가 경쟁을 통해 발전해 나가는 것처럼, 평면에 무한한 이미지를 펼쳐내는 회화와 세계를 3차원으로 재현해 내는 조각은 서로 간의 경쟁을 통해 르네상스기 인간의 시각 환경을 풍요롭게 만들어 왔다. 그뿐만 아니라, 파라고네는 각 장르에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곱씹게 했다. 경쟁은 상대와 자신을 나누는 결정적인 조건을 요구하기 마련이고, 회화와 조각은 서로의 특징을 흡수하면서도 동시에 회화란 무엇인지, 조각은 무엇인지를 명확히 설명하기 위해 끊임없는 검토의 과정을 거쳐왔다.
인간의 시각적 조건이 다양한 기술의 등장으로 변화할 때마다, 회화는 조각뿐 아니라 새롭게 등장한 시각 매체와도 파라고네를 벌였다. 사진이 발명되었을 때도 회화는 사진과의 파라고네를 통해 사진처럼 인간이 보는 세계의 사실적인 모습을 평면에 옮기는 것만이 회화의 특성이 아님을 발견해 냈다. 동시에 회화는 사진이 제공하는 새로운 시각성, 즉 인간의 맨눈으로 볼 수 있는 것들을 넘어서 기계로 확장된 시각성 역시 흡수해 자신의 장을 넓혀나갔다.
디지털 이미지가 범람하는 지금 시대에도 마찬가지다. 회화는 디지털 이미지가 제공하는 새로운 시각성을 내부로 받아들이며, 동시에 디지털 이미지와는 다른 방식으로 이미지를 창조하는 방법을 찾아가고 있다.

35~45세 사이의 회화 작가들의 작업 세계를 조망하는 9번째 미메시스 아트 프로젝트에 참가하는 신준민, 이세준, 정유미 작가는 모두 80년대생으로 아날로그 이미지가 주류였던 2000년대 이전과 디지털 이미지가 주류가 된 2000년대 이후를 모두 폭넓게 경험한, 디지털 이주 경험 세대다. 아날로그 이미지 세계에서 디지털 이미지 세계로의 이주라는 공통적 경험은 세 작가에게 두 가지 양상의 이미지를 다루는 각자만의 방식을 제공했다. 이들의 작품을 꼼꼼히 살펴보다 보면, 회화가 디지털 이미지를 만나 어떤 방식으로 또 자신의 정의하고, 자신의 장을 확장해 나갔는지를 엿볼 수 있다.
어둠 속 밝은 빛을 포착하는 신준민의 회화


신준민의 회화에는 어둠 사이로 밝게 튀어 오르는 빛이 등장한다. 그 빛이 야구장의 조명에서 발하는지, 유원지의 일루미네이션에서 발생하는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게 느껴진다. 어둠 사이에서 강렬한 인공 빛을 마주했을 때 우리가 느끼는 시각적 경험과 그 경험이 만들어내는 감상, 이렇게 밝은 조명이 밤에 도래하기 전에는 경험할 수 없었던 눈부심이 신준민의 작업을 관통하는 하나의 주제가 된다. 신준민의 회화는 일정한 강도로 느긋하게 우리를 비추는 것이 아니라 순간적으로 폭발하며 이내 사라질 인공 빛을 우리 앞으로 가져다 놓는다. 그의 회화가 가장 밝고 강렬한 순간을 포착하고 있음에도 뜻 모를 애석함을 남기는 이유가 거기에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이제 금방 휘발되고 마는 빛무리에 너무나도 익숙하다. 어둑어둑한 거리 위 전광판에 등장하는 아름다운 상품들의 모습도, 크리스마스 백화점 벽 위 미디어 월의 환상적인 이미지도 순간적으로 우리 눈을 사로잡을 뿐 순식간에 그들은 사라진다. 스마트폰 화면 위로 밝게 빛나는 이미지가 작은 버튼 하나를 누르는 순간 검게 변해버리는 것을 매일매일 경험하는 우리는 빛의 이미지가 얼마나 쉽게 사라지는지를 잘 알고 있다. 신준민의 회화는 그 틈을 노린다. 우리가 이 빛이 곧 사라지리라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깨닫고 애수를 느끼는 순간을 파고든다. 그가 포착하는 이미지는 분명 우리 손 위의 스마트폰 이미지를 닮은 인공의 빛이지만, 그는 그것을 회화로 포착하기에 우리의 예상을 뒤엎고 꺼지지 않는다. 스마트폰 위 디지털 이미지가 남긴 상실은 다시 손짓 한 번에 다른 이미지로 대체되고 그 애수마저 금방 다른 것으로 대체되고 말지만, 신준민의 강렬한 빛은 어떻게 해도 꺼지지 않는 채로 꺼지고 말 순간을 영원한 예측의 상태로 밀어 넣는다.
합성되고 조합되는 이세준의 회화 속 세계


신준민의 회화가 발광하는 이미지에 대한 동시대적 경험을 회화로 옮겨 이를 회화만의 방식으로 변형한다면, 이세준의 회화는 새롭게 합성되고 조합될 수 있는 디지털 이미지의 특성을 회화 속으로 가져온다. 마치 포토샵을 통해 붙여지고 기워지는 디지털 이미지처럼, 이세준의 화면 안을 채운 다양한 이미지들은 기묘한 방식으로 서로와 영역을 공유하고 있다. 회화를 채우고 있는 이미지의 출처와 시점이 너무나 다양하기 때문에 이들 사이의 단일한 서사를 찾아내려는 시도는 결국 좌절된다. 마치 디지털 이미지가 무수히 많은 사람들에게 공유되며 새로운 서사로 덧씌워지는 것처럼, 밈이 퍼지면서 점차 다른 이미지와 서사가 덧붙는 것처럼. 특히 「스페이스 아케이드」(2018~2023)는 다양한 시간대에 그려진 여러 작품 사이로 작가가 이들을 잇는 회화를 또 그려 연결한 것으로 논리적인 구성을 거부하는 디지털 이미지의 세계를 떠올리게 한다. 복사 붙여넣기가 자유롭게 이루어지는 디지털상에서 이미지의 출처와 기원은 더 이상 중요한 것이 아니게 되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이미지들은 이제 원본에서 풀려나 0과 1로 처리되며 지속적으로 변형되고, 풍화되고, 덧붙으며 또 다른 서사를 구축한다. 이세준의 회화 역시 이들과 마찬가지로 시간에 따라 새로운 이미지가 덧붙으며 원본이 사라진 세계를 만들어 낸다. 그러나 그의 회화가 결정적으로 디지털 이미지와 궤를 달리하는 지점은 이들이 관람자들에게 공유되는 방식에 있다. 디지털 이미지는 대체로 우리를 움직이게 하지 않는다. 이들은 신체가 움직이는 시간을 최소화한다. 이미지 자체는 이전에 없던 방식과 속도로 빠르게 이동하며 확산하지만, 이미지를 소비하는 우리가 이들을 따라 움직이는 일은 거의 없다. 그저 내 눈앞에 있는 화면에서 네 눈앞의 화면으로 전송될 뿐이다. 그러나 넓은 벽면을 거대하게 차지하는 이세준의 회화는 가변적으로 변화하고 덧붙는 이미지의 흐름을 따라 우리를 움직이게 한다. 이미지와 함께 움직이는 몸과 그에 따른 실제 시간에 대한 경험이 그의 ‘회화’를 디지털 이미지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으로 만든다.
앰비언트 이미지: 정유미의 회화


디지털 환경이 우리 삶을 뒤덮은 이후 앰비언트라는 단어는 꽤 친숙한 것이 되었다. ‘주위의’, ‘주변의’라는 뜻을 가진 이 단어는 특정한 분위기를 조성하는 조명이나 음악, 영상 등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고 있다. 물리적 제약을 넘어서 언제 어디서나 나를 원하는 시공간으로 이동한 듯한 경험을 주는 앰비언트 음향과 영상은 어찌 보면 디지털 시대의 궁극적인 꿈일지 모른다. 정유미의 회화 역시 우리를 물리적 시공간 너머의 자유로운 공간으로 데려간다. 아이슬란드와 노르웨이의 드넓은 자연환경을 마주하고 느꼈던 감각을 표현하는 그의 회화는 마치 구름처럼 가벼운 형상과 환상적인 색채를 통해 무한의 이미지를 우리에게 전달한다. 피부를 스치는 바람과 드넓은 초원의 향기, 끝나지 않을 것처럼 율동하는 능선들까지. 우리가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면 또 다른 건물만을 볼 수 있는 현실을 피해, 디지털 기기의 화면 위 목가적인 브이로그 안으로 시선을 옮기는 것처럼 우리는 갈급하게 정유미의 회화 속 우리가 평소 보지 못했던 드넓은 공간으로 시선을 옮긴다. 그러나 디지털 앰비언트 영상이 외부 세계를 최대한 차단함으로 우리에게 목가적인 가공의 세계를 제공하는 것과 달리 정유미의 회화는 관람자와 외부 환경 사이의 대화를 단절하지 않는다. 미메시스 뮤지엄의 벽과 창문 너머 외부 환경 사이로 걸린 그의 회화는 관람자들이 지금 발붙이고 있는 현실과 회화가 만들어내는 환상적인 이미지 사이를 자유롭게 오가는 것을 허용한다. 이 때문에 디지털 앰비언트 영상이나 음악에서 우리가 빠져나왔을 때 느끼는 탈력감이 정유미의 회화에는 느껴지지 않는다. 마치 작가가 직접 노르웨이의 드넓은 자연을 바라보았기 때문에 무한의 이미지를 느낀 것처럼, 우리 역시 우리의 몸으로 회화를 직접 바라보고 있을 때만 완전한 몰입의 자유를 느낄 수 있다. 시선을 돌리는 순간, 우리는 회화가 놓인 실제 환경을 자각하고 숨을 돌린 후 또 다른 자유로운 풍경을 찾기 위해 그의 다른 작업을 따라 전시장 안을 자유롭게 오간다.
이번 아티클에서는 미메시스 아트 프로젝트에 참가하는 디지털 이주 세대 세 작가의 작업 세계를 살펴봄으로 디지털 이미지와 각자만의 방식으로 파라고네를 벌이는 동시대 회화를 조망해 보았다. 이들의 회화는 디지털 이미지가 우리의 시각적 환경을 가득 채우는 지금 시대를 외면하지도, 그렇다 해서 디지털 이미지의 인력에 굴복하지도 않는다. 그러한 태도가 결국 ‘동시대 회화란 무엇인가’에 대한 각자의 답변으로 이어진다. 이것이 회화의 매력이 아닐까. 이 오래된 미술의 장르는 고정되지 않고 시대와 함께 호흡하면서 지속적으로 나는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회화의 동시대성에 대해 고찰한다는 것은 그래서 언제나 우리가 지금 무엇을 보고 있는지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로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