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마뱀 비늘 조각
고은정, 문민, 신상준, 이충현


고은정, 펑(2), 장지에 전사, 동양화 물감, 아크릴 과슈, 130.3 x 193.9cm / 충돌지점, 2025, 장지에 전사, 수간채색 왁스, 65x90cm 이미지_양승규
이곳은 주변과 하등 상관없는 인간들로 가득하다. 제각기 독립성은 역시 독자적으로 기능한 끝에(역할을 완수한 끝에) 한 덩어리 정어리를 꿈이라도 된 듯 꾸었다. 코끝을 증명하는 향이 점점 날카로워진다.
우둔한 이들은 당연하다시피 집단을 이루어 무언가 만들어 내는데, 이 조악한 결과를 아무렇지 않은 척 대할 수 있는 사람이 자신의 태도에 의구심을 가질 찰나, 그 순간은 서정적으로 번짐과 동시에 절대적인 지위를 갖추었다. 이런 성취는 성치 않은 의식 몇을 거느린다. 아무개의 면전 앞에서 다분히 입체적으로 웃으며 눈앞에 펼쳐진 행태에 가소로운, 일부 안타까운 미소를 지으리라.
'빛나는 물체를 꾸어다 기껏 이렇게 어지럽혀 놓다니, 미련함의 대가는 미적지근한 성장이라 일컫는 굉장함이다. 서로 마주 보며 웃거라.'
어렵사리 자리 잡은 못과 혼과 떠밀려 온 사물의 잔상.
기록적으로 웃거나 한편으로 터무니없는 존재를 비웃거나.
평소의 보폭보다 한참이나 넓은 보폭으로 까무러친 존재의 나머지를 받들었다. 비교적 평이한 문제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천천히 주변을 지나간다. 이에 맞선 계절은 별다른 수단이 없어 그저 선명하게 제 존재를 밝힐 뿐이었다. 전부터 예정된 눈멂은 단지 현상을 기록한다. 눈앞에 펼쳐진 모든 것들이여 덧없이 떨거나, 아니면 함의한 바를 견딜 수 없다는 듯 정지되거나.
이젠 익숙한 길을 별다른 감상 없이 지나간다. 지리멸렬한 한때는 제자리를 찾듯 분해되고, 유독 손끝에만 닿았던 삶은 가만히 우화의 비롯됨이 된다.


문민, 내일 no.8 불&가능입니다만, 2025, Black ink and metalic tempera on handmade paper, 이미지_양승규
가느다란 상징 하나, 여념 없이, 무엇에도 유념 없이 상황이 악화되듯 홀쭉해지며 빼어난 충직을 양적으로 그르다고 파악한다.
애초에 사물의 뒷면은 없는 것이다, 라고 낭비에 가까운 생각을 일처럼 한다. 지독하게 소모적인 매 순간은 절로 확장되고, 이보다 절반으로 축소된다. 분명히 지금은 어느 때를 막론하고 평탄할 뿐인데, 비탈의 기대는 역시 향방이 없을까. 헛손질을 귀할까.
과장된 총체에 다분히 실제적인 송곳을 들이대면, 부푼 전체는 그제야 제 잘못을 알지도.
천연덕스럽기만 한 게 아니라 좌우지간 충돌뿐이라면 코끝에 닿은 존재의 잔해는 유명무실한 고독이 될 터다.
변화는 홀로 한계를 짓고, 주변머리 없이 자행된 함의에서 서러운 초상을 걷어낸다. 의식과 의도된 장식은 자신과 견줄 게 수렁뿐인 구덩이에 적을 두었다. 이는 한동안 어깨에 견착할 소속이다.
비로소 탈부착할 수 있는 증거를 보았다.


신상준, 이미지_양승규
등이 굽은 시기가 계단을 오른다. 무심한 사람의 퉁명스러운 뒷모습, 부적절하게 바닥에 떨어진다.
한때 생활을 비추던 경험은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는 식음료인가. 입안이 마른다.
허우적거리는 시선만 넘칠 듯 담은 견고함이 잔을 깨부순다. 순탄치 않은 계획은 넘겨짚은 대로 된 적이 없으며 누군가의 숱한 예정을 단지 예언으로만 받아들인 것이다. 더 이상 건드릴 게 없다는 건 사후적인 비극인가, 하고 당연한 소리를 한다.
마땅한 때가 되어 저무는 해가 조금이라도 날보다 먼저 떨어지려고 한다. 그것이 닿을 곳은 바닥이 아닌데, 그밖에 무엇이 있다는 듯 제법 의기양양한 모습이다.
폭죽. 위선보다 상황에 앞서 대두되는 그것을 터트리면서 사뭇 당당한 형체로 사물을 분간하는 대상은 그이면서 동시에 그가 아니다. 분위기에 따라 생략은 성스러운 것.
예정에도 없던 뜨거움을 마주하는 순간, 저도 모르게 얼어 버리는 객체를 객관적으로 취한다. 그러면서 좋은 것과 싫은 것을 지극히 둘로 나누고, 먼바다를 두 갈래로 나뉜 길로 여긴다.

거친 의도요. 지금까지 밖에서 보낸 시간을 소매로 훔친다면 제법 단단한 그것이 필요할 테요.
우중충한 날씨가 끝내 비를 놓지 않을 때 향후 어떤 빗물엔 선명한 손자국이 남아 있을지도 모르겠소만.
지나친 감상은 한없이 작동하는 하강에 부질없는 양상을 덧붙이는 장식일 뿐. 시대와 하등 상관없는 증명을 속 게워 내는 댐처럼 쏟아내고. 기꺼이 방류를 택한 이의 섣부름은 오직 사물을 향한 앞섬이었다고 하는데, 가짓수 없이 사는 것은 단독으로 몸을 떨 일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