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우리로 거듭나려면
다양한 삶을 응시하며
오늘날 우리 사회는 ‘우리’와 ‘우리가 아닌 사람들’을 가르기 위해 벽을 세우는 일에 쉽게 가담합니다. 그것이 ‘우리’를 보호하고 더 강하게 만들 수 있는 방법이라 믿으면서요. 어린이, 노인, 외국인, 그리고 장애인. 사람들은 점점 벽 밖에 있는 세상에 대해서는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나와는 무관한 일이라 생각하기 때문이죠. 벽 밖의 세상은 쉽게 고립되고 배제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언제까지나 ‘우리’일 수 있을까요? 아마 그토록 굳건히 함께라고 믿었던 ‘우리’는 또다시 쉽게 분열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속 사람들 모두 벽 안과 밖이 다르듯 제각기 다른 인생을 살고 있으니까요.
그렇다면 이렇게 차갑고 두꺼운 벽들로 둘러싸인 세계에서 우리에게는 어떤 태도가 필요할까요? 어떻게 하면 서로를 더욱 안전하게 보호하며 살 수 있을까요? 더 나은 사회로 거듭나기 위해서 수많은 단계를 거쳐야겠지만, 이번 아티클에서는 그중에서도 가장 기초적인 단계를 실천해보려고 합니다. 바로 ‘나와 다른 삶 응시하기’입니다.
판사 김동현

수원지방법원을 거쳐 현재는 서울중앙지법에서 근무 중인 김동현 판사는 2012년 로스쿨 재학 중에 의료사고로 시력을 잃었습니다. 시각장애 1급인 김동현 씨는 전담 속기사의 도움을 받으며 업무를 진행하는데요. 먼저 속기사가 김동현 씨에게 배당된 소송 기록과 자료를 컴퓨터 문서 파일로 옮깁니다. 그리고 음성 변환 작업을 통해 파일 내용을 귀로 들으며 김동현 씨의 업무가 이루어집니다. 기록 외의 증거물은 속기사의 설명을 통해 파악하고, 지도 등의 증거물 같은 경우 종이에 인쇄하여 손으로 짚어가며 파악해야 합니다.
시각장애인이 자립을 하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보행이라고 하죠. 김동현 씨는 지금과 같은 판사가 되기 전, 로스쿨을 다니던 시절 금요일마다 수업 없는 날 재활 훈련을 받았습니다. 벽을 따라서 이동하는 법, 문 찾는 법, 계단 오르내리는 법 등 가장 기본적인 보행법부터 다시 배워야 했습니다. 또, 컴퓨터로 문서화 된 교재를 구하기 어려워 비용을 들여 교재를 급하게 만들기도 했는데요. 그렇기에 책 한 권에 몇십만 원, 몇백만 원의 가치가 있었고, 이를 복지재단에서 지원해주었기에 김동현 씨는 그 시절을 회상하며 대충 공부할 수가 없었다고 말했습니다.
시력을 잃기 전, 30년 동안 비장애인으로 살았던 김동현 씨는 한 인터뷰에서 “그 이전과 이후의 제가 다른 사람이 아닌 것처럼 장애인도 우리 시대를 살아가는 한 사람일 뿐”이라며 “제가 좋아하는 것을 위해 살아가는, 따지고 보면 별로 특별할 게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달라”는 소망을 전했습니다. (권희원 기자, <시각장애 김동현 판사 “장애인도 시대 같이 살아가는 한 사람>, 연합뉴스)
김동현 판사는 비장애인들이 가지지 못한, 또 다른 눈을 가진 사람이 되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쉽게 볼 수 없는 것을 바라볼 수 있는 눈이 있기에 그가 판결하는 세계가 앞으로 다양성을 인정할 수 있는 아름다운 세계로 한 발짝씩 가까워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전 수영선수, 현 직장인 김세진

2009년 한 방송에 출연해 화제를 모았던 전 수영선수 김세진 씨는 오른쪽 무릎 아래, 왼쪽 발목 아래, 오른손 두 손가락이 없는 선천적 무형성 장애인입니다. 어릴 적 재활치료 목적으로 수영을 선택해 그 이후 꾸준히 수영을 하며, 아시아 기록, 세계기록 등을 세웠습니다. 특히 김세진 씨는 2009년 한국스카우트 연맹이 선정한 '대한민국을 이끌 4명의 청소년 영웅'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죠.
화려한 이력을 가지고 있는 선수였지만, 과거에 수영을 배울만한 장소를 찾는 데에서부터 김세진 씨는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했습니다. 사람들에게 험한 말을 듣는 것은 기본이었고, 장애인 생활 시설이 있는 수영장은 채 10곳이 되지 않았다고 해요. 정착하게 된 수영장도 계단으로 가득해서 접근성이 아주 좋은 편은 아니었죠.
그렇게 거친 파도를 헤쳐나가던 김세진 씨는 이제 수영선수가 아닌, 법무법인(유) 율촌 인사팀에서 직장인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는 2016년 브라질 리우 올림픽 출전을 끝으로 수영 인생의 매듭을 짓고, '청년 김세진'으로 살고 싶었다고 합니다. 율촌 인사팀에서 다양한 공적인 일들에 이바지하고 있는 김세진 씨는 후에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이 되고 싶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김민주 기자, <‘로봇다리 수영선수’의 새로운 도전… 이젠 ‘직장인 김세진’>, 여성신문)
누군가에게는 그저 발목깨에서 찰랑거릴 뿐인 작은 파도가 누군가에게는 인생을 뒤흔들 만큼 거대한 파도일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항상 더 쉽고 빠른 방향이 아니라, 더 어렵고 오래 걸리는 방향으로 사회를 만들어나가야 하죠. 남들과 다른 몸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들에게도 남들과 똑같이 헤엄칠 수 있는 바다를 끊임없이 제공해줄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수많은 어린이들에게 희망을 심어준 김세진 씨처럼요.
연극배우 백지윤

다운증후군 발레리나로 세상에 이름을 알렸던 백지윤 씨가 최근 연극배우로 변신해 15년 만에 인간극장으로 돌아왔습니다.
다르다는 이유로 계속된 친구들의 괴롭힘에 힘들어하던 백지윤 씨는 초등학교 6학년 때, 어머니와 함께 공연 <호두까기 인형>을 보며 발레리나의 꿈을 꾸기 시작했습니다. 비장애인들과 겨룬 대회에서 상을 받으며 화려한 발레리나로서의 인생을 살던 백지윤 씨는 낮은 근육 긴장도로 잦은 부상을 당하며 발레리나의 꿈을 내려놓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다운증후군 여성이 자신의 아이를 키워가는 이야기를 다루는 연극 <젤리피쉬> 오디션을 보게 되며 백지윤 씨의 또 다른 인생이 시작되었죠. 백지윤 씨는 두 시간이 넘는 장편 연극에서 극의 절반 이상을 이끌어 가야 했는데요, 외워야 할 대사만 수백 줄이 넘었습니다. 하지만 다행히 무대에는 든든한 조력자 프롬프터 배우가 있었습니다. 대사가 떠오르지 않거나 다음 행동이 생각나지 않을 때, 프롬프터 배우가 곁에서 백지윤 씨에게 도움을 주며 연극은 진행되었습니다.
제작진이 <젤리피쉬>에 백 배우를 캐스팅한 것은 섣부른 오해나 대상화에서 벗어나 발달장애인의 삶을 깊이 있게 다루기 위해서였다고 하는데요. 백지윤 씨는 "예전에는 다운증후군이라는 말 자체가 싫었고 나를 놀리는 거라고 느꼈는데 이제는 내가 다운증후군인 것을 받아들인다"며 "다운증후군 배우도 무대에서 연기를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줄 수 있어 당당하다"고 밝혔습니다.
(이주인 기자, <다운증후군 발레리나 백지윤, 연극배우로… '인간 극장' 15년 만 컴백>, 일간스포츠
김형주 기자, <"연극 무대 서며 더 당당해져"… 韓 최초 다운증후군 연극 배우 백지윤>, 매일경제)
배우 백지윤 씨와 <젤리피쉬>의 제작진 덕분에 우리는 오해와 편견에서 기계처럼 재현되는 다운증후군이 아닌, 우리가 사는 현실 속에 실제로 존재하고 살아 있는 다운증후군을 잠시나마 들여다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인위적 묘사 없이 있는 그대로의 장애인들, 또 그들의 삶과 똑바로 마주하는 순간, 그동안 세상이 얼마나 편협적인 상태로 굴러가고 있었는지 알아차리게 될 것입니다.
인생에서 '우리'는 꼭 필요합니다. 인간은 절대로 혼자서는 살 수 없는 의존적인 존재이기 때문이죠. 과거에는 도덕성을 판단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독립성' 혹은 '자립성'이었기에 의존은 무능한 것, 부족한 것이라 여겨지곤 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삶을 아주 깊이 들여다본다면, 아무 곳에도 의존하지 않고 '혼자서만' 살아가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는 것을 금세 깨달을 수 있을 겁니다.
우리에게는 '우리'라는 영역을 점차 넓혀 가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우리'와 '우리가 아닌 것' 사이에 만들어진 수많은 벽을 허물고 부수며, 그 너머에 있던 세상을 지그시 응시해야 합니다. 우리는 저마다의 삶을 지닌 서로의 존재를 끊임없이 인식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서로 신뢰할 수 있고 앞으로 온전히 나아갈 수 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