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에 기대지 않기로 한 디자이너
박제된 과거를 구하러 돌아온 미야시타와 넘버나인
00년대 초반, 패션계는 남성복의 전위적인 테일러링이 주목받던 시기였어요. 단정한 재현보다 비율을 비틀고, 착용자의 태도와 라이프스타일을 더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특히 라프 시몬스가 보여준 날카롭고 축소된 슈트의 비례감은 정교한 재단 속에 청춘 서브컬처의 무드를 런웨이 한복판으로 끌어올렸다고 자주 회자되곤 하죠.
당시 일본 디자이너를 논할 때, 미야시타 타카히로는 빠질 수 없는 이름입니다. 그가 만든 넘버나인은 록과 펑크, 그런지의 정서와 인디 영화 같은 서브컬처를 레퍼런스 삼아 청춘의 불안과 로맨티시즘을 옷으로 드라마틱하게 표현해냈다는 평가를 받으며 스트리트 신과 런웨이 모두에서 사랑을 받았어요.
2009년, 미야시타는 넘버나인이 커진 조직 안에서 자신이 원하는 방식대로 작업하기 어려워졌다고 말하며 결국 브랜드를 떠나기로 합니다. 1년 뒤, 홀로 시작한 프로젝트는 미야시타가 통제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만들고 싶었던 옷들을 선보이며, ‘솔로’라는 선택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분명히 보여줬죠.
그러던 2025년 9월 9일, 미야시타는 ‘Number (N)ine by Takahiro Miyashita’라는 이름으로 넘버나인으로의 복귀 소식을 알렸어요. 이 소식이 큰 화두가 된 이유는 단순히 “돌아온다”는 사실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가 떠났던 이유가 여전히 동시대 패션의 과제로 남아 있기 때문이죠. 패션 산업의 규모와 구조, 그리고 창작의 결정권이 더 복잡해진 오늘, 미야시타는 어떤 행보를 보일까요? 넘버나인이 성장하던 시기와 그가 떠났던 순간을 되짚어 보며, 창작이 산업 구조와 만나는 방식을 다시 생각해 봅니다.
거리에서 패션을 배운 청춘
미야시타 타카히로

여러 인터뷰와 매체에서 묘사되는 미야시타 타카히로는 말수가 적고 내성적인 인물입니다. 하지만 비범한 디자이너들이 대개 그렇듯, 자신만의 주관만큼은 누구보다 뚜렷합니다. 평소에도 빈티지 제품을 구매해 리폼해 입으며 패션에 몰입하던 그는 16세에 학교를 중퇴합니다. 이후 하라주쿠와 시부야에서 방랑하듯 시간을 보내며 다양한 의류를 접했습니다.
당시 그가 주로 가던 매장은 오늘날 아메카지 씬을 대표하는 인물인 시미즈 케이조의 ‘네펜데스(Nepenthes)’였습니다. 단골손님으로 들락날락하던 미야시타를 눈여겨본 시미즈는 그에게 직원으로 일할 것을 권유하죠. 네펜데스에서 근무하며 미야시타는 브랜드 운영에 관한 노하우를 익힙니다. 그러던 어느 날, 네펜데스의 자체 상품을 준비하던 시미즈는 미야시타에게 직접 상품 기획을 맡깁니다. 비록 전문 패션 스쿨을 나오지는 않았으나, 누구보다 옷을 많이 접해온 젊은 미야시타의 감각을 믿은 것이죠. 이 무렵부터 미야시타는 ‘자신이 입을 옷’이 아닌 ‘상품으로서의 옷’을 기획하기 시작했습니다.

90년대 도쿄 스트릿 패션 씬은 ‘우라하라주쿠’라 불리는 소규모 숍 중심의 커뮤니티가 주도하고 있었습니다. 대중 매체보다는 마니아들 사이의 입소문을 타고 알려진 작은 브랜드들이 태동하던 시기였죠. 언더커버(Undercover)와 베이싱 에이프(A Bathing Ape)도 이때 탄생했습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힙합, 펑크, 밀리터리, 아메리카 컬처 등 디렉터의 관심사가 옷에 아주 짙게 녹아있다는 점입니다.
1996년, 네펜데스에서의 경험을 살려 론칭한 넘버나인에 미야시타 본인의 취향이 노골적으로 투영된 것 또한 이러한 시대적 흐름의 반영이었을 것입니다. 네펜데스가 아메리칸 빈티지를 베이스로 한다는 점에서 우라하라주쿠와는 결이 달랐으나, 창업주인 시미즈 본인이 서브컬처에 깊은 관심을 두었던 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당시 미야시타의 나이는 스물셋으로, 정규 교육 없이 브랜드를 론칭한 이들 중에서도 꽤 이른 편이었습니다.
불안을 로맨티시즘으로 표현한
넘버나인 (NUMBER (N)INE)
'넘버나인'의 모티브가 된 비틀즈의 <Revolution 9> 동영상 출처 : The Beatles
미야시타는 평소 밴드 음악에 지독한 관심을 두었습니다. 본인이 직접 작곡을 하고 밴드 보컬로 활동할 정도였죠. 브랜드명인 ‘넘버나인(Number (N)ine)’도 비틀즈의 아홉 번째 정규 앨범에 수록된 <Revolution 9>에서 따왔다고 합니다. 그중에서도 커트 코베인(Kurt Cobain)은 넘버나인과 미야시타 본인의 사고관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입니다. 자기 파괴적이고 불안한 정서가 녹아든 음악과 태도는 넘버나인의 그런지(Grunge)한 무드에 고스란히 스며들어 있습니다.
초창기 넘버나인은 그래픽 티셔츠 같은 비교적 가벼운 제품군에서 시작해, 빈티지 피스를 재해석하고 비틀어 만든 아이템으로 팬층을 넓혀갔습니다. 특히 해진 부분이나 수선의 흔적을 감추지 않고 드러내는 방식은, 80년대 가와쿠보 레이와 요지 야마모토로 대표되는 해체적 미감의 계보를 스트릿 감각으로 다시 번역한 결과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다만 넘버나인의 특이점은 ‘허름함’을 단순히 방치하는 대신, 그 허름함을 정교하게 설계하여 컬트적인 설득력을 만들어냈다는 데 있었습니다.

‘상처를 숨기지 않고 드러낸다’는 태도는 당시 젊은이들을 흔들었던 얼터너티브 록의 핵심 정서와도 맞닿아 있었습니다. 20세기 말, 새로운 천년을 앞둔 불안이 전 세계적으로 번지던 시기였고, 일본은 장기 불황 속에서 ‘더 나아질 것이라는 약속’이 사라진 상태였죠. 그 안에서 청춘들의 방황은 커져만 갔습니다. 너바나를 비롯한 얼터너티브 록의 등장은 그런 답답함과 무력감이 한꺼번에 터져 나온 울부짖음처럼 들리기도 했습니다.
넘버나인이 큰 주목을 받은 것은 미학적인 아름다움이나 희소성 때문이기도 했지만, 미래에 대한 세대의 불안과 허무주의를 로맨틱하게 해석해낸 공이 컸습니다. 넘버나인의 옷을 입는다는 것은 자신의 정신 상태와 삶에 대한 태도를 드러내는 것과 같았습니다. 그렇게 특정 시대의 감정과 미학을 상징하던 넘버나인은 스트릿 씬을 중심으로 점점 거대해졌고, 2004년 파리 패션 위크 진출을 통해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됩니다.
파리의 찬사와 함께 커져가는 브랜드

2000년대 초 남성복은 해체미가 핵심이었습니다. 고전적인 남성미보다는 위태롭거나 신경질적인 나약함이 강조되던 시기였죠. ‘전통’에서 벗어난 미학이 대두되던 때, 정규 패션 교육을 거치지 않은 미야시타와 해체·레이어링을 전면에 내세운 넘버나인은 그 흐름을 가장 매력적으로 체현한 사례였습니다.
2004년 파리에서 선보인 넘버나인 A/W 컬렉션 ‘Give Peace a Chance’는 이러한 흐름을 상징적으로 압축한 장면으로 자주 언급됩니다. 슬림한 실루엣이 만들어내는 유약한 남성성은 당대 에디 슬리먼의 디올 옴므가 구축한 비례감을 자연스레 환기했고, 밴드 로고를 변주한 그래픽과 록 넘버를 활용한 연출은 라프 시몬스가 끌어올린 ‘록 시크’의 기류와도 맞닿아 있었죠.
2004년 A/W 시즌 'Give Peace a Chance' 파리 패션 위크 동영상 출처 : 유튜브 채널 Félix R.
넘버나인은 꾸준히 음악과 그로부터 얻은 경험을 자양분 삼아 미학으로 승화했습니다. 이듬해에는 레드 제플린의 <Stairway to Heaven>을 배경 음악으로 틀며 컨트리 뮤직에 영감받은 웨스턴 무드의 옷들로 브랜드의 영역을 확장하기도 했죠. 고풍스러운 런웨이 위 모습은 고착화된 패션 부르주아 계층에 대한 반항처럼 보이기도 했습니다.
미야시타 본인이 빈티지 피스에 관심이 많았고 리빌드(Rebuild) 방식으로 작업해왔기에 독창성이 부족하다는 비판도 있었으나, 넘버나인의 반항적이고 전위적인 패션은 전 세계적인 인기를 구가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미야시타가 발휘할 수 있는 독창성의 범위는 점차 좁아지고 있었습니다. 회사가 커짐에 따라 투자와 수익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경영의 영역에서 ‘상품성’은 가장 먼저 거론되는 가치입니다. 투자자들이 잘 팔리는 디자인과 더 넓은 소비자를 포섭할 수 있는 옷을 요구하기 시작하자, 디자이너의 취향과 창의성이 숨 쉴 틈은 줄어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고독한 '독주자'로 돌아오다
더 솔로이스트(TheSoloist.)

2009년 AW 시즌을 마지막으로 미야시타는 넘버나인과 자회사를 매각한 뒤 브랜드를 떠나기로 합니다. “넘버나인은 너무나 거대한 밴드가 되어버렸다.”라는 그의 인터뷰에서는 거대화된 수익 구조 속에서 창작자가 느꼈던 고립감과 고민이 묻어났습니다. 이후 넘버나인은 회사 소속 디렉터들이 전개하는 별도의 브랜드가 되었고, 미야시타가 있던 시절보다 평이해졌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습니다.
넘버나인을 떠난 이듬해, 미야시타는 개인 브랜드 ‘타카히로미야시타 더 솔로이스트(TheSoloist.)’를 선보입니다. “그저 좋은 옷을 만들고 싶었다.”라는 그의 말처럼, 더 솔로이스트는 대형 조직의 시스템보다 미야시타 본인의 결정권이 최우선시되는 브랜드였습니다. 소재 선정과 제작 방식, 주제 선정에 이르기까지 말이죠. 해체하고 다시 조립하는 ‘리워크’ 작업 방식은 여전했지만, 긴장감 있는 테일러링을 통해 고독과 상실, 고립 같은 미야시타의 개인적인 감정을 전면에 내세웠습니다.
더 솔로이스트의 2020년 SS시즌 런웨이 동영상 출처 : FF Channel
동시에 미야시타가 이끌던 시절의 넘버나인은 세컨핸드 시장에서 보물처럼 취급되기 시작했습니다. 신제품보다 아카이브 컬렉션의 가치가 더 높게 매겨지는 브랜드가 된 것이죠. 2009년 미야시타 타카히로가 떠났다는 사실은 넘버나인의 서사를 ‘완결된 이야기’처럼 보이게 만들었습니다. 특정 시즌과 피스에 얽힌 내러티브는 그 자체로 소유의 이유가 되었습니다. 한때 동시대의 공기를 빠르게 흡수하며 성장했던 브랜드가, 이제는 그 시절의 미학을 상징하는 박제된 아카이브가 된 셈입니다.
넘버나인 바이 타카히로 미야시타
NUMBER(N)INE BY TAKAHIRO MIYASHITA

지난해 여름, 미야시타는 “한 챕터가 끝났다.”는 말과 함께 15년간 이끌어온 더 솔로이스트 디자이너 자리에서 물러납니다. 그리고 두 달 뒤인 9월 9일, 넘버나인으로의 복귀를 알리는 소식을 올리죠. 런웨이를 활보하던 반항아가 돌아온다는 소식에 팬들은 물론 패션계가 떠들썩해졌습니다. 그가 복귀하는 이유를 명확히 밝히지는 않았으나, 비슷한 시기에 발표된 넘버나인과 슈프림(Supreme)의 협업 컬렉션에서 그 단서를 추측해볼 수 있습니다.
해당 컬렉션은 넘버나인이 태동하던 시기 하라주쿠 스트릿 씬의 황금기를 오마주하며 약 30개의 아이템으로 구성되었습니다. 미야시타가 영향력을 발휘하던 당시의 대표 아이템들을 원형에 가깝게 재현하는 데 집중했죠. 그가 직접 디자인했던 핵심 아카이브 피스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했습니다.

하지만 이는 철저히 ‘그때의 넘버나인’에 의존하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디자인과 실루엣은 넘버나인이 추구하던 본래의 조형미와 거리가 있었고, 그래픽과 몇 가지 디테일만 살려 ‘젊은 미야시타’의 향수만을 덧입혔기 때문입니다. 2010년대의 그런지하고 날것의 무드가 유행하는 시장 논리에 따라 미야시타의 그림자를 빌린 상업적 협업이라는 날 선 비판이 존재하는 이유입니다.
미야시타는 이 협업에 대해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라며 불쾌감을 드러냈다고 합니다. 복귀 소식을 알린 이후에도 슈프림 협업에 관여한 바가 없음을 명확히 했죠. 창작의 권한이 줄고 상업적 성과가 중요시되어 떠났던 브랜드가 다시금 지나치게 상업화되는 모습은, 그의 입장에서 생명을 잃은 좀비가 활개 치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을까요? 젊음을 바쳐 만든 브랜드의 혼을 다시 세우기 위해 돌아온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두 개로 분열된 넘버나인

슈프림 협업은 성황리에 판매되었으나 역설적으로 ‘미야시타가 없는 넘버나인은 죽었다’는 것을 증명한 사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복귀는 더욱 환영받습니다. 현재 넘버나인은 쿠쿠스(Kooks) 소속의 라이선스 브랜드와 미야시타가 전개할 ‘바이 미야시타 타카히로’ 두 개가 공존하고 있습니다. 하나의 이름으로 규합되지 않은 현 상황에서는 당분간 별개의 브랜드로 전개될 확률이 높아 보입니다.
패션은 ‘무엇을 만들 것인가’의 문제이면서 동시에 ‘어떻게 팔 것인가’도 중요한 창작의 영역입니다. 브랜드가 커질수록 효율적인 생산과 유통을 요구하게 되고, 곧 반복 가능한 디자인과 안정적인 매출을 원하게 됩니다. 협업, 라이선스, 드롭 방식의 판매 형태도 안정적인 판매원을 확보하기 위한 마케팅 수단입니다. 수익의 증대는 디자이너에게 더 넓은 무대를 제공하지만, 결정권을 촘촘하게 분산시켜 창작의 범위를 개인이 아닌 조직의 과제로 이전시키기도 합니다.

미야시타가 넘버나인을 떠난 이후 벌어진 일들은 그 역설을 또렷하게 보여줍니다. 자신의 젊음과 취향을 자양분 삼아 만든 브랜드가 커질수록 시작점에서 멀어지고 있다는 감각을 떨치기 어려웠던 그는 결국 브랜드를 떠났습니다. 이후 넘버나인은 ‘이름’ 자체가 상품 가치를 떠받치는 방향으로 굳어졌고, 팬들 입장에서는 브랜드가 시스템 안에서 작동하는 기성 상품처럼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일부 팬들은 지금의 넘버나인을 미야시타의 후광에 기대 연명하는 존재로 비유하며 그가 이끌던 시절을 그리워하기도 합니다.
초창기 넘버나인의 스토리에는 미야시타 외에도 미야모토 마사루라는 이름이 반복해서 등장합니다. 그는 90년대 우라하라의 상징적인 빈티지 숍 ‘빈티지 킹’을 운영했던 인물로, 네펜데스 시절의 미야시타에게 “자신의 브랜드를 만들어보라”고 권유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브랜드 설립 후에는 의류 리메이크부터 사무, 운영까지 실무를 맡았고 투자를 유치하는 데에도 핵심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현재 미야모토가 넘버나인 운영 법인의 대표로 기재되어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오늘날의 넘버나인은 두 개의 흐름으로 읽힙니다. 하나는 미야모토로 대표되는 운영·유통 구조 속의 ‘넘버나인’이고, 다른 하나는 디자이너 개인의 취향과 결정권이 전면에 있었던 ‘미야시타의 넘버나인’입니다. 이번 복귀를 둘러싼 관심은, 상업적 의존을 거부하며 ‘더 솔로이스트’를 통해 창작의 통제권을 되찾았던 미야시타가 이제는 거대하게 구조화된 ‘넘버나인’이라는 이름을 어떤 방식으로 다시 다뤄낼지에 모이고 있습니다.
상업성과 창조성이라는 이름 아래 두 갈래로 나뉜 브랜드와 창작자의 복귀. 패션계에서 떼어낼 수 없는 산업 생태계와 창작자의 결정권이 충돌하는 지점이 가시화된 듯합니다. 과연 미야시타는 자신의 창조물이 가졌던 원형의 감각을 어디까지 회복할 수 있을까요? 17년 전, 수익성에 대한 의존으로부터 도망치듯 떠났던 그 자리에서 그는 어떤 새로운 결말을 써 내려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