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의 시대에 유한성으로 답하는 법

스트리밍의 시대에도 LP와 CD가 공존할 수 있는 이유

무한의 시대에 유한성으로 답하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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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은 우리에게 무한한 편리함을 약속하며 일상 깊숙이 자리 잡았다. 터치 한 번으로 수천만 개의 음악과 영화와 책을 재생할 수 있는 가상의 라이브러리에는 한계가 없는 듯하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바이닐을 디깅하고, 종이책을 들고 다니는 것이 더 가치 있는 일로 여겨지기도 한다. 사람들은 왜 무한한 발전의 시대에도 굳이 '한물 간' 물리 매체를 곁에 두려 애쓰는가? 이는 그저 일정한 주기로 반복되는 복고 유행일까? 아니면, 급격한 변화 속에서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을 알리는 신호일까?


아무것도 저장하지 않아도 되는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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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는 음악과 영화를 감상하려면 물리 매체를 구매해 소장하거나 파일을 다운로드해야 했다. 무언가를 보고 듣기 위해서는 공간과 시간을 할애하는, 느리고 무거운 과정이 필수적이었다. 반면 스트리밍은 빠르고 가볍다. 콘텐츠를 완전히 다운로드하지 않아도, 재생 버튼을 누르는 순간 작은 데이터 단위로 쪼개 실시간으로 전송하기 때문이다.

용량과 시간을 잡아먹지 않는 스트리밍의 등장은 문화예술의 소비 방식 자체를 바꿨다. 소비자는 이제 앨범 한 장, 영화 한 편씩 구매하는 것이 아닌 스트리밍 플랫폼의 이용권을 구독한다. 매달 1만 원대의 이용권 금액만 내면 무한에 가까운 수많은 작품을 곧바로 감상할 수 있다. 이러한 장점 덕에 사용자가 모이자 플랫폼은 다수의 데이터를 기반으로 보다 정교한 큐레이션을 제공할 수 있게 되었다. 알고리즘을 통해 소비자가 미처 몰랐던 취향을 제안하고, 이전에는 소수에게만 알려졌던 인디신의 작품도 대중에게 조명될 기회가 많아졌다. 또한 2000년대 초반 만연했던 불법 다운로드 문제가 해결된 것 역시 이러한 스트리밍 기반 구독 서비스의 등장 덕분이었다.

스트리밍은 콘텐츠 시장이 지금처럼 양적, 질적으로 성장하는 데에 크게 기여했다. 창작자에게는 자신의 작업물을 전 세계에 내보일 수 있는 넓은 창구로, 소비자에게는 풍요로운 선택지를 제공하는 무한한 라이브러리로 안착한 것이다.

스트리밍에 비해 물리 매체는 편리성과 확장성 면에서 분명한 한계가 있다. 예를 들어, 터치 한 번으로 언제 어디서나 재생할 수 있는 음악을 바이닐 레코드로 들으려면 몇 단계를 거쳐야 한다. 앨범 슬리브에서 꺼내 먼지를 닦고 레코드를 올리고 톤암을 내리고 한 면의 재생이 끝나면 손수 레코드를 뒤집어 같은 과정을 반복한다. 전용 장치인 턴테이블을 구비해야 하며, 무엇보다 소장하고 있지 않은 음반은 애초에 들을 수 없다. 바이닐을 포함해 카세트테이프, CD, DVD, 블루레이 등 물리 매체는 모두 스트리밍의 무한성과 반대되는 유한성을 지니고 있다.

흐르는 물을 잡으려는 이상한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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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물리 매체는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끊임없이 다시 소환되어 역주행하며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는다. 실제로 음원 스트리밍 서비스의 등장 이후 사장되는 듯했던 실물 음반은 판매량이 다시 증가하고 있다. 미국의 음악 및 엔터테인먼트 데이터 제공 업체 '루미네이트Luminate'에 따르면 2025년 미국 내 바이닐 레코드 판매량은 19년 연속 증가세를 기록했으며, 같은 해 미국에서 판매된 모든 앨범 중 절반이 바이닐인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디지털 앨범 판매량은 전년 대비 15.9% 감소했지만 실물 앨범(바이닐, 카세트테이프, CD 등) 판매량은 6.5% 증가했다.

이러한 배경에는 역설적이게도 앞서 언급한 물리 매체의 '유한한 물질성'이 있다. 스트리밍은 무형의 데이터 조각에 불과하지만 물리 매체는 현실에 존재한다. CD나 DVD를 만질 때의 촉각, 드라이브에 넣은 뒤 들리는 윙윙거리는 소리, 가사가 인쇄된 종이를 직접 펼쳐 읽는 경험 같은 것은 탭, 스크롤, 스와이프만으로 이루어진 스트리밍 서비스에서는 누릴 수 없는 특별한 감각이다. 물리 매체가 유일한 콘텐츠 감상 방식이었을 때는 번거로웠던 일련의 재생 과정이 이제는 오히려 고유한 장점으로 인식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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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물리 매체를 적극적으로 사용하는 주체가 최초의 디지털 네이티브로 불리는 Z세대라는 것도 주목할 점이다. 이들에게는 스트리밍에는 없고 물리 매체에만 있는 '소장'의 개념이 매력적으로 작용한다. 스트리밍은 물리 매체의 한계를 소장하지 않음으로써 해결했지만, 이는 역설적으로 물리 매체를 유일한 소장 방식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어릴 때부터 평생을 디지털 스트리밍 환경에서 자라온 Z세대에게 '만질 수 있는' 매체는 오히려 신선한 자극이자 결여되었던 감각을 채울 수 있는 대안으로 떠올랐다.

실제로 전문가들은 Z세대가 물리 매체에 매력을 느끼는 현상을 그저 개인의 취향이나 향수의 차원이 아닌, 스트리밍으로 인해 생긴 빈틈을 갈구하는 인간의 본능으로 해석한다. 글로벌 웰니스 연구소(GWI)의 연구 책임자 베스 맥그로티는 '사람은 유아기부터 촉각 같은 감각에 대한 욕구를 타고나며, 이는 무형의 디지털 스크린 세계에 대한 저항이자 실제로 만질 수 있는 물리적 사물에 대한 갈망의 표현'이라고 말한다. 스트리밍은 'stream(개울, 흐르다)'이라는 어원처럼 무엇도 머물게 두지 않고 흘려보내지만, 그럴수록 사람들은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물을 잡으려 노력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전히, 어쩌면 이전보다 더욱.

당신의 재생목록은 정말 당신의 것인가?

스트리밍 플랫폼의 콘텐츠 서비스 중지 공지. 이미지 출처: 티빙 홈페이지 캡처

스트리밍과 물리 매체를 가르는 또 하나의 선명한 차이는 '플랫폼 종속성'이다. 소비자는 스트리밍 플랫폼에 구독료를 지급함으로써 무한대의 콘텐츠를 열람할 수 있지만, 이것이 소유권까지 보장하지는 않는다. 서비스하는 콘텐츠는 언제든 종료될 수 있으며 심지어는 플랫폼 자체가 사라지기도 한다. 그렇게 서비스가 종료되고 나면 열람권을 구매했을 뿐인 소비자에게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반면 물리 매체는 현실 세계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며, 한 번 소장한 것에 대해서는 소유권과 결정권을 소비자가 계속 가지고 있을 수 있다는 점에서 플랫폼 종속성에 대한 대안이 될 수 있다.

"<오펜하이머>의 경우 블루레이 버전에 많은 정성을 쏟았습니다. 영상과 음향을 디지털 영역으로 옮겨서 소비자들이 집에서 소장하고 책장에 보관할 수 있도록, 악랄한 스트리밍 서비스(evil streaming service)가 훔쳐 가지 못하도록 말이죠." _크리스토퍼 놀란

영화감독 크리스토퍼 놀란 역시 스트리밍 서비스에서는 콘텐츠가 언제든 삭제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며, 이에 맞서 블루레이와 DVD 같은 물리 매체를 영구적으로 소장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어떤 콘텐츠를 감상하고 남길지에 대한 결정권을 플랫폼에 맡기는 것이 아닌, '소장'이라는 적극적인 행위를 통해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나만의 영토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영상 출처: 유튜브 'CRITERION'

영화적 중요성이 높은 작품의 판권을 확보하고 복원해 DVD 및 블루레이로 출시하는 '크라이테리온The Criterion'은 유튜브 채널에 'Closet Picks'라는 제목의 영상을 올린다. 이는 감독, 배우 등 영화계 인물들이 자신에게 의미 있는 영화를 직접 골라 소개하는 시리즈로, 영상의 배경이 되는 공간은 그동안 크라이테리온이 제작한 DVD와 블루레이가 가득 꽂혀있는 벽장이다.

이 영상은 물리 매체의 유한한 물질성이 어떤 힘을 가지고 있는지 한눈에 체감하게 한다. 만일 동일한 인물이 동일한 영화를 추천하더라도 그 배경이 DVD로 가득 찬 벽장이 아닌 스트리밍 서비스 화면이라면 영상의 분위기와 메시지는 지금과 크게 달랐을 것이다. 삼 면이 '손에 잡히는 영화'로 채워진 공간에서 설레는 표정으로 작품을 찾고 직접 꺼내 소개하는 모습은 그 영화에 대한 애정을 시청자에게 더욱 선명히 전달한다. 물리 매체는 그 존재 자체로 이 경험을 향유했다는 선명한 흔적이자 증거가 된다. 스크롤 몇 번으로 끝나는 스트리밍 목록보다 훨씬 실존적이고 강력한, '내 것'임을 표현하는 방식인 것이다.


물론 물리 매체의 판매량이 이전 수준으로 회복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여전히 스트리밍이 주를 이루되, 물리 매체는 스트리밍의 한계를 일부 보완하며 공존하는 형태가 될 것이다. 다만 여기서 중요한 점은 무한한 비물질성이 주는 편리함 뒤에 조용히 숨어 있는 '종속성'의 존재를 알아채는 것이다. 스트리밍 시대에 굳이 물질성을 곁에 두는 행위는 지금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예민하게 감지하고 갈구하는 주체적인 삶의 방식으로 읽힌다.

자신에게 질문을 던져보자. 기술이 일상을 무한히 편리하게 만들고 있는 지금,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고집스럽게 붙잡고 있는 유한한 것은 무엇인가? 플랫폼에 주도권을 내어주고 싶지 않은 나만의 물질성은 무엇인가? '딸깍' 한 번이면 AI가 글을 써주는 시대에 굳이 펜을 들어 일기를 쓰고, 휴대폰 카메라 대신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하는 필름 카메라를 선택하는 것처럼, 이러한 질문을 던지는 것은 흐르는 물 사이사이 나만의 바위를 가져다 놓는 행위이다. 바위로 물결 자체를 막을 수는 없지만 물의 방향이나 속도는 살짝 바꿀 수 있듯이, 무엇을 '굳이' 유한함의 영역에 둘 것인지 생각해 본다면 경험에 대한 주도권을 내가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무한한 스트리밍의 시대에도.


[참고 기사]

  • billboardPRO, Taylor Swift’s ‘The Life of a Showgirl’ Is Luminate’s Top Album of 2025 in U.S.(2026.01.14)
  • CNBC, From Polaroid to vinyl, Gen Z is making retro tech one of 2025’s biggest trends: ‘These things just have more value'(2025.03.15)
  • Variety, Christopher Nolan Says Buy ‘Oppenheimer’ on Blu-ray ‘So No Evil Streaming Service Can Come Steal It From You’: ‘We Put a Lot of Care’ Into Home Release(2023.1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