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나이기 위한 의존을 담은 영화

결코 홀로 존재할 수 없는 우리

내가 나이기 위한 의존을 담은 영화

‘1인분의 삶’을 강요받는 현대 사회에서 ‘의존’이란 때때로 수동적이고 나약해 보이는 단어입니다. 의존은 ‘기생’과 다른 말인데도 불구하고, 마치 무능력함이 의존의 원인이 되는 것처럼 바라보기도 하죠. 그런데 자립하지 못하는 삶이 꼭 잘못된 걸까요? 살다 보면 한 번쯤은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누군가에게 기대는 순간이 옵니다. 그 대상이 가족이나 연인, 혹은 사회 제도가 될 때도 있죠.


이번 아티클에서는 세 편의 영화를 통해 불가피하게 의존을 마주한 인물의 태도를 주목합니다. 자신의 상황을 끝까지 부정하는 사람, 나의 유일한 구원에게 기꺼이 몸을 맡기는 사람, 그리고 의존이 필요하지만 거리로 내몰리는 사람까지. 가족과 연인, 시스템 안에서 의존을 받아들이는 방식을 살펴봅니다.


무너지는 세계와 가족의 한계 ‘더 파더’

출처: 영화 <더파더>

앤서니는 기억을 점점 잃어갑니다. 딸과 간병인의 얼굴도 헷갈리고, 익숙한 공간을 갑자기 낯설어 하면서도 그는 여전히 “나는 괜찮다. 간병인 필요 없다”라고 말합니다. 치매를 앓는 아버지를 돌봐야 하는 딸은 최선을 다하지만 현실의 벽 앞에서 답답함을 느끼죠. 증세가 악화되는 앤서니는 인간관계와 일상생활이 무너지는 것뿐만 아니라 안전까지 위협받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양 시설에 들어가는 것만큼은 거부하죠.

출처: 영화 <더파더>

“날 봐, 난 아직 혼자 할 수 있어.”

영화는 기억을 잃어가는 앤서니의 시선으로 흘러갑니다. 기억의 조각을 잃어가며 자신의 세상이 점점 붕괴되는 과정 속에서 앤서니의 혼란스러움을 관객도 함께 느낍니다. 앤서니의 하루처럼 앞뒤가 맞지 않는 장면의 편집을 불편하게 지켜보며, 치매 환자의 세상이 얼마나 뒤죽박죽인지 느끼게 됩니다. 이를 통해 ‘나는 멀쩡하다’고 과시하고 요양 시설을 거부하는 그가 어떤 마음일지 조금은 공감하게 되죠. 누가 봐도 보호와 관찰이 필요한 노인이지만 나의 결핍과 불안정함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건 일종의 본능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밖에 없습니다. 혹은 가족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은 마음이 기억을 잃어가는 순간에도 발휘되는 게 아닐까 짐작해볼 뿐이죠. 완강하게 의존을 거절하던 앤서니는 결국 유일한 기댈 곳이었던 딸의 부재로 요양 시설에서 보호 받습니다.


가족의 병세는 누구나 맞닥뜨릴 수 있는 상황입니다. 짐이 된다는 죄책감, 돌봐야 한다는 의무감과 체력적인 한계의 얽힘 속에서 가족의 슬픔을 나눠 감당하는 가장 현명한 방법은 무엇일까요. 인생의 서글픔을 말하며 흐느끼는 연약한 앤서니의 마지막 눈빛 때문에 ‘가족’이라 더 어려운 의존에 대해 곱씹게 됩니다.

무너져야 이뤄지는 사랑, ‘팬텀 스레드’

출처: 영화 <팬텀스레드>

천재 의상 디자이너 레이놀즈. 까다롭고 예리한 그의 손끝에서는 항상 완벽한 드레스가 나옵니다. 강박적으로 루틴을 지키며 자신의 통제대로 살아가는 레이놀즈 앞에 새로운 뮤즈 알마가 등장하고, 두 사람의 관계는 깊어집니다. 하지만 알마도 레이놀즈가 문을 닫고 작업에 몰두할 때만큼은 그와 마음을 나눌 수 없습니다. 모든 걸 다 쏟아붓고 몸이 아플 지경이 되어서야 자신에게 의지하는 레이놀즈를 보며 알마는 이 순간이 계속되길 바라죠. 알마는 그 욕망을 뿌리치지 못하고 음식에 독버섯을 조금씩 넣습니다. 그런데 레이놀즈는 모든 걸 알면서도 기꺼이 쓰러져 주죠. 아픈 자신을 극진히 돌보는 알마에게서 평생 그리워했던 죽은 엄마의 모습이 겹쳐 보이니까요.

출처: 영화 <팬텀스레드>

“난 당신이 쓰러져 주길 원해요. 나약하게, 내 도움만 기다리며”

두 사람의 관계는 어쩌면 서로를 향한 뒤틀린 집착입니다. 하지만 평생 공허했던 나를 채워주는 사람이 이 세상 딱 하나뿐이라면, 그리고 냉혈한 같던 사람이 아이가 되어 자신에게 모든 걸 의지한다면 그 사랑을 쉽게 뿌리치기는 힘들 겁니다. 알마와 레이놀즈는 서로를 파괴함과 동시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이 관계를 그냥 수용하고, 무언의 합의를 합니다.

강해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가장 나약해지기 위해 사랑을 선택한 이들의 결단은 의존의 또 다른 얼굴을 보여줍니다. 독버섯을 먹을지언정 그녀의 품 안에서 비로소 예민함과 긴장을 내려놓는 레이놀즈와, 빈틈없는 남자의 무너짐으로 자신의 존재 가치를 증명하는 알마. 두 사람의 아슬아슬한 공존은 언제까지 계속될 수 있을까요.

필요한 만큼 기댈 수 있는가, ‘나, 다니엘 블레이크’

출처: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

“난 굽실대지 않았고, 이웃이 어려우면 그들을 도왔습니다. 자선을 구걸하거나 기대지도 않았습니다.”

담당 의사는 다니엘의 심장이 안 좋으니 목수 일을 쉬라고 합니다. 그런데 휴직한 다니엘에게 ‘기준이 미달이니 질병 수당을 끊겠다’는 통보가 날아왔죠. 심장은 아프지만 다른 곳이 멀쩡하다는 이유입니다. 이에 항고를 준비하는 다니엘은 셀 수 없는 난관에 부딪힙니다. 본인을 ‘연필 시대 사람’이라 칭하는 다니엘 앞에는 컴퓨터로 작성해야 할 각종 문서, 전화 연결 한 번이 힘든 상담원, 휴직을 권고받았지만 구직 신청이 필요하다는 모순된 결과들이 쏟아지며 눈앞을 캄캄하게 만듭니다. 조금이라도 선례를 남기지 않기 위해 융통성을 발휘하지 않는 공무원들의 일 처리 방식과 모순으로 범벅된 제도로 인해 오히려 아픈 다니엘은 하루하루 사는 게 더 힘들어졌죠.

출처: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

복지제도란 인간다운 생활이 보장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각종 제도입니다. 자립할 능력을 잃은 사람, 도움이 필요한 사회적 약자를 돌보기 위해 존재하는 시스템이죠. 하지만 국가에 의존해야 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은 적절한 돌봄이 아닌, 각종 매뉴얼과 차가운 관료주의 그 자체입니다. 불가피한 상황과 사연은 무용지물이 되고 무능함을 증명해 내야 하는 아이러니 속에서 지칠 대로 지친 다니엘은 끝내 의존을 포기합니다. 그리고 겉으로만 빙빙 돌며 나를 도와줄 생각이 없어 보이는 국가를 향해 있는 힘껏 항의하죠.

시스템에 의존하기를 포기하고, 자신의 '존엄'을 선택한 겁니다. 그는 “사람이 자존심을 잃으면 다 잃은 것”이라 말합니다. 이 사회는 개인의 존엄성을 짓밟고 있으면서도 끝까지 ‘보호해 주려는 것’이라는 위선을 뒤집어쓴 채 꿈쩍도 하지 않죠. 영화는 간절하게 기댈 곳을 찾는 사람에게 사회가 제대로 의지할 만한 곳이 되어 주는지 신랄하게 꼬집습니다.


세 편의 영화는 각기 다른 관계 속에서 의존을 다룹니다. 가족 안에서 끝까지 거부하던 돌봄, 연인의 잘못된 사랑과 집착, 보호받아야 함을 스스로 증명해야만 하는 사회. 의존을 받아들이는 방식 또한 모두 다르지만, 이들은 공통적으로 의존이 결코 개인의 실패나 낙오에서 비롯된 것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문제는 그 의존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다루는가입니다.


우리는 종종 누군가에게 기대는 삶을 부끄러워합니다. 하지만 영화들이 말하는 바는 분명하죠. 나 자신을 인정하면서 타인에게 기댈 줄도 아는 것. 그리고 누군가의 무게를 개인에게만 맡겨두지 않는 것. 서로의 불완전함을 받아들이는 태도야말로 우리가 함께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진정한 의존일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