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어떻게 이웃이 되는가
영화로 보는 세 가지 관계 맺기
마태복음의 구절로 널리 알려진 “네 이웃을 너 자신 같이 사랑하라”는 격언은 타인을 이해하고 돌봐야 한다는 도덕적 명령입니다. 싸이월드의 ‘서로 이웃’이 인스타그램의 ‘팔로워’가 되기까지, WWW가 만들어낸 초국가적 연결망 속에서 우리는 더 많은 이들과 관계를 맺을 수 있게 되었지만, 정작 이웃이라는 감각은 점점 더 희미해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제 우리는 물리적 제약을 뛰어넘은 관계 맺기 속에서 나에게 잘 맞는 상대를 선택할 수 있게 됐습니다. 그렇게 자본과 문화, 취향을 기반으로 세계는 점점 파편화되고, 사람들은 점점 더 각자의 ‘우리’ 속으로 모여들고 있죠. 세계가 넓어졌다는 착각과 달리 동질한 관계에 익숙해질수록, 전혀 다른 세계에 속한 타인을 이해하는 일은 더욱 낯설고 어려워집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선택할 수 없는 관계로서의 이웃에 주목해 보려고 합니다. 물리적으로 마주하게 되는 타인과의 관계는 피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 관계를 우리는 어떻게 맺어가야 할까요? 이번 아티클에서는 서로 다른 거리 속에서 관계 맺기를 시도하는 영화 세 편을 소개합니다.
보이지 않는 벽 너머에서, 영화 〈타인의 삶〉

동독 정부가 정보기관 슈타지를 통해 국민을 감시하던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 〈타인의 삶〉은 물리적으로는 가까이 있지만 ‘사상’이라는 거대한 체제에 의해 심리적으로 단절된 관계에서 시작됩니다. 조국을 위한 원칙과 신념을 가진 비밀경찰 비즐러는 극작가 드라이만을 감시하라는 명을 받고 도청 장치로 그의 일상을 기록하게 되는데요. 비즐러에게 이전까지 감시 대상은 ‘사회주의의 적’일 뿐, 나와 같은 평범한 ‘누군가’는 아니었습니다. 국가 권력에 의해 단절된 이들의 관계는 감시와 통제라는 일방적 폭력으로 맺어져 왔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폭력적 관계 속에서 변화가 시작됩니다. 비즐러는 드라이만의 일거수일투족을 엿듣고 지켜보며 어느 순간 감시자에서 관찰자로 변모하게 되는데요. 드라이만과 동화된 듯한 비즐러의 모습은 그에게 드라이만이 더는 집단화된 타인이 아닌 하나의 개인으로, 나아가 나와 관계를 맺은 누군가가 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이념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던 진짜 개인의 삶을 알게 된 비즐러처럼, 단절된 관계가 맺어지는 데에는 타인의 삶을 들여다보는 것이 시작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나와 너무 다르다고, 가까워질 수 없다고 생각했던 타인이 사실은 나와 다르지 않은 평범한 이웃임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단절된 관계 속에서 무심히 지나쳤던 폭력을 비로소 인식하게 됩니다.
불가피한 충돌 속에서, 영화 〈이반리 장만옥〉

그렇다면 준비되지 않은 공동체에 갑자기 들이닥친 이웃의 존재는 어떨까요? 영화 〈이반리 장만옥〉은 이태원에서 레즈비언 바를 운영하던 만옥이 일련의 사건을 계기로 고향 이반리로 돌아오면서 시작됩니다. 폐쇄적인 시골 마을에 어느 날 갑자기 떨어진 퀴어 전사 장만옥은 기존의 질서를 뒤흔드는 존재인데요. 마을 사람들은 이런 만옥을 외면하고 배제하려 하지만, 그가 전남편을 상대로 이장 선거에 도전하면서 더는 그의 존재를 무시할 수 없게 됩니다.
누군가는 이런 만옥의 선택을 이해할 수 없을 겁니다. 그의 친구조차 뒤떨어진 시대의 표상인 이반리가 아닌 현재의 서울로 돌아오라고 설득하기도 하는데요. 하지만 만옥에게 이반리는 고향이자 떠나고 싶지 않은 집입니다. 어쩌면 영화가 말하고 싶은 건 자신의 자리에서 있는 그대로의 ‘나’로 외롭지 않게 살고 싶다는 당연한 바람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기에 만옥은 물러서기보다 충돌을 감수하기를 선택합니다.
무엇보다 마을 안에서도 가려져 있던 독거노인을 먼저 들여다보는 만옥을 보고 있으면 진정한 관계 맺기란 타인의 삶에 다가가고자 하는 마음에서 시작되는 것 같습니다. 마을 사람들 역시 ’우리’가 되어 함께 살고 싶은 만옥의 진심을 겪으며 조금씩 거리를 좁혀가게 되는데요.
이반리 사람들과 만옥처럼 지금을 함께 살아가는 이상 이해할 수 없는 존재와의 충돌은 피할 수 없습니다. 다만 그 안에서 어떤 관계가 만들어질지는 우리가 어떤 태도로 서로를 마주하느냐에 달린 셈입니다. 그렇기에 후반부, 초현실적으로 느껴지는 이반리에서의 퀴어 퍼레이드는 단순한 화해의 장면이라기보다는, 이반(異般)이었던 만옥이 진짜 우리의 이웃으로 함께하게 되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면으로 느껴집니다.
머무르는 시간 속에서, 영화 〈유레카〉

하지만 어떤 관계는 충돌이 독이 되기도 합니다. 어느 고요한 아침, 평화로운 버스에서 벌어진 인질극 사건에서 시작하는 영화 〈유레카〉는 사건 이후 극복할 수 없는 상처를 품고 살게 된 이들에게 집중합니다. 생존자 중 하나인 운전기사 마코토는 후유증을 극복하지 못하고 사건 직후 가족들을 떠났다 다시 고향에 돌아오게 되는데요. 때마침 벌어진 살인사건에 가족들은 마코토를 의심하고, 그는 단절된 채 회복되지 않는 관계를 실감하며 집을 떠나게 됩니다.
그런 마코토가 간 곳은 바로 또 다른 생존자인 타무라 남매(나오키와 코즈에)의 집. 타무라 남매는 사건 직후 과도한 세간의 관심으로 비극적인 일을 겪은 뒤 둘이서 고립된 채 살아가고 있었는데요. 말도, 식사도 제대로 하지 않고 되는대로 살아가고 있던 남매와 함께 지내면서 세 사람은 새롭게 관계를 맺어가게 됩니다. 뒤늦게 남매를 찾아온 친척 아키히코는 가족도 아닌 마코토의 존재를 경계하지만, 네 사람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 채 한집에서의 생활을 이어갑니다.
이들의 관계는 앞선 영화들처럼 분명한 이해나 충돌을 통해 형성되지는 않습니다. 이후 전개되는 네 사람의 버스 여행 역시 잔잔하게 흘러가는 듯하지만 해결하지 못한 과거의 상흔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하는데요. 특히 나오키가 저지른 사건은 이들의 관계를 다시금 흔들어 놓습니다. 마코토는 나오키를 배제하거나 단죄하는 대신, 그의 곁에 머무르며 스스로 선택할 수 있도록 기다리는데요.
서로를 이해한다고 믿어도 우리는 결국 타인이기에, 내가 아닌 누군가의 고통을 헤아린다는 건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릅니다. 그렇기에 〈유레카〉가 보여주는 관계는 이해나 해결이 아닌, 더디지만 회복해 가는 시간을 함께 견디는 것에 가깝습니다. 흔들리는 인물의 곁에서 지켜보고 함께하는 것, 어쩌면 그것이 가장 느리고 조용한 방식으로 관계를 맺는 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세 영화는 서로 다른 방식의 관계 맺기를 포착하고 있습니다. 누군가의 삶을 들여다보는 순간, 갈등 속에서 부딪히는 순간, 그리고 같은 시간을 견디며 침묵 속에 머무르는 순간까지. 우리는 그렇게 서로 다른 방식으로 관계를 만들어가게 됩니다.
〈타인의 삶〉이 단절된 관계에서 타인을 이해하게 되는 가능성을 보여준다면, 〈이반리 장만옥〉은 충돌을 통해 관계가 형성되는 과정을, 〈유레카〉는 감당할 수밖에 없는 시간 속에서 관계가 지속되는 방식을 보여줍니다. 서로를 완전히 알지 못하더라도, 끝내 하나가 되지 못하더라도, 같은 시간을 살아가며 곁에 머무르는 것. 어쩌면 우리가 ‘이웃’이 된다는 것은 그런 과정 속에서 비로소 가능해지는 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