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향의 공간
극장의 공간성이 가지는 동시대적 의미에 대한 단상
잠시 뒤돌아보면서 시작해보자. 지난 몇 년 간, 특히 코로나 팬데믹 이후 한국 극장가에서 유난히 큰 환대를 받은 영화들이 떠오른다. 2022년 10월 개봉작인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는 30만명 이상의 관객을 모았다. 2023년 11월에 개봉한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괴물>은 56만명의 이상의 관객수를 기록했다. 2024년 6월에 개봉한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20만명이 넘는 관객이 찾았다. 같은 해 12월에 개봉한 <서브스턴스>는 장르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50만 관객수를 돌파했다. 그리고 올해, 네오 소라의 <해피엔드>가 10만 관객을 넘겼고, 지금 현재 극장에서 상영 중인 윤가은의 <세계의 주인>이 15만을 넘어 그 이상을 바라보고 있다. 이런 사례는 이외에도 여러 가지가 있다. 단순히 관객 수만의 문제가 아니다. 수입과 배급 측면에서도 과거에는 시네마테크에서 간헐적인 기회를 통해서만 접할 수 있던 영화들이 극장에서 정식 개봉하는 사례가 많아지고 있다. 거기다가 한 기업이 아닌 개인이나 특정 공동체가 직접 수입하고 배급하는 영화들이 생기고 그 영화들에 반응하는 시네필들이 늘어나고 있다. 극장의 주변부에 있던 시네필들이 점차 중심부로 모여들고 있다.
또 다른 변화도 있다. 2021년 1월에 개봉한 <극장판 귀멸의 칼날: 무한열차편>이 200만명의 관객을 기록했다. 2023년 1월에는 <더 퍼스트 슬램덩크>를 보기 위해 490만명의 관객이 극장을 찾았다. 올해 9월에 개봉한 <극장판 체인소 맨: 레제편>은 300만명이 넘는 관객을 모았다. 그리고 8월에 개봉한 <극장판 귀멸의 칼날: 무한성편>은 560만의 관객수를 기록하며 (현재까지) 올해 한국 박스오피스 1위를 기록했다. 시네필과 마찬가지로 극장의 주변부에 있던 오타쿠들이 이제 무너져가는 극장 산업을 지탱하는 한 축이 되었다.

그 사이 한국 상업 영화와 이를 기반으로 했던 극장 산업은 후퇴를 거듭했다. 팬데믹 이전과 비교했을 때 극장을 찾는 사람의 수는 1억 명 가까이 줄었다. 상업 영화의 제작은 거의 중단되었고 극장 산업은 점차 사양 산업이 되어가는 상황이다. 영화계에서 일하던 인재들은 점차 OTT 산업으로 옮겨가기 시작했고 자연스럽게 대중들도 OTT로 관심을 옮겨갔다. 어떤 측면에서는 이미 예견되었던 일이다. 일부 천만 영화의 흥행과 몇몇 거장들의 신작에 의존하여 버티던 한국영화계는 관습적인 제작 환경 속에서 이미 내부적으로 큰 위기를 겪고 있었고 팬데믹의 발생과 함께 그 위기가 수면으로 드러난 것뿐이다. 여기에 OTT 산업의 발전은 극장 산업의 붕괴를 더 가속화시켰다. 더 이상 영화는 극장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극장은 이미 (그것의 문화적 가치와는 무관하게) 영화 산업의 중심부에서 서서히 밀려나고 있다.
대중이 떠나간 극장에는 낯선 자들이 찾아오고 있다. 좀 더 정확하게, 언제나 극장에 있었지만 주변부에만 머물던 자들이 극장의 중심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한 쪽에서는 상업 영화가 아닌 예술 영화를 주로 소비하는 시네필 집단이, 다른 한 쪽에서는 마이너 문화로 인식되었던 일본 애니메이션 팬들, 즉 오타쿠들이 극장판을 보기 위해 극장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물론 여전히 극장에는 상업 영화가 중심을 차지하고 있고 아직까지도 시네필과 오타쿠는 마이너한 문화로 남아있다. 하지만 철저하게 극장의 주변부에만 머물러있던 이들의 등장을 통해 우리는 극장이 가지는 위상의 변화를 알아보고 이를 통해 극장의 미래를 조금이나마 예측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비공간적 극장의 도래

극장을 간다는 것은 어떤 경험인가? 여기서는 극장에서 영화를 본다는 것을 삶의 일부로서 받아들이는 시네필들이 아닌 일반 대중을 대상으로 질문할 것이다. 대중에게 있어 극장을 간다는 것은 일상 바깥으로의 일탈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일탈은 일상에 균열을 가하는 사건이 아닌 일상을 잠시 중단시키고 유희를 즐기기 위한 경험에 가깝다. 극장은 바로 이러한 일탈을 위한 공간, 유희를 위한 공간이다. 이때의 유희는 상상력을 바탕으로 세계 바깥을 자유롭게 상상할 수 있는 칸트적인 의미와는 다르다. 말 그대로 유희를 위한, 혹은 오락을 위한 공간. 대중들은 일상에 벗어나 오락을 즐길 수 있는 공간이라면 그곳이 어디든지 옮겨다닐 수 있는 집단이다. 문화 산업에 있어 그런 대중을 사로잡기 위해 가장 중요한 요소는 문화의 ‘가벼움’이다. 문화를 가볍게 만들기 위해서는 그것이 지니는 깊이를 평면화해야 한다. 문화에 대한 역사, 지식, 담론 등은 대중이 문화 산업 안으로 들어오는데 방해가 되는 요소일 뿐이다. 깊이가 얕을수록 허들은 낮아진다. 대중은 그렇게 가볍게 소비할 수 있는 문화 산업을 찾아 돌아다니는 존재이다. 극장은 그러한 문화 산업의 중심지였다. 당신이 영화에 대해 아는 것이 없어도 영화는 당신에게 즐거움을 줄 수 있다. 그것은 스포츠도, 음악도 마찬가지이다. 당신이 축구에 대해 아는 것이 없더라도 축구장은 언제나 당신에게 열려있(어야 하)고, 당신이 음악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언제든지 콘서트장을 찾아갈 수 있(어야 한)다. 영화는 다른 어떤 문화와 견주어도 가장 가볍게 소비할 수 있다는 점에서 대중 문화의 중심이 될 수 있었다. 문화 산업은 그러한 대중의 가벼운 소비를 통해 유지되고 확장된다.
문제는 무엇인가? 소비가 가볍다는 것은 곧 그것의 유동성을 함께 내포한다. 대중은 그 문화가 주는 즐거움이 소진될 경우 언제든지 다른 곳으로 옮길 의지가 있는 집단이다. 처음 넷플릭스를 포함한 OTT 산업이 등장했을 때 모두들 그것이 진정한 영화적 경험을 줄 수 없다는 이유로 무시하였다. 그러나 대중은 진정한 영화적 경험 같은 것을 위해 지갑을 여는 사람들이 아니다. OTT 산업은 영화를 보기 위해 고려해야만 했던 극장과의 물리적 거리를 단숨에 없애면서 영화와 관객 사이의 간극을 순식간에 좁혔다. 더 이상 극장은 영화를 독점적으로 배급하고 상영하는 공간이 아니다. 이 흐름은 코로나 팬데믹을 거치며 훨씬 더 빠르게 가속화 되었다. 자본은 자연스럽게 OTT 산업으로 흘러갔다. 물론 여기에는 대중성에만 심취해 내실을 다지지 못하고 관습적인 영화 제작만을 반복해온 한국영화계의 책임도 무시할 수 없다. 다만 그것이 산업 전반의 변화를 늦출 수는 있어도 지금의 흐름을 바꿀 수는 없다. 대중은 이제 집 바깥으로 나가 표를 구해 극장으로 들어가지 않아도 얼마든지 집 안에서 각자의 디스플레이를 통해 영화를 감상할 수 있다. 과거에 디스플레이 위에서 상영되는 이미지는 (히토 슈타이얼의 표현을 따르자면) ‘빈곤한 이미지’ 취급을 받았지만 디스플레이 기술은 우리의 상상 이상으로 빠르게 발전하였다. 이제 누구든지 마음만 먹으면 극장 못지 않은 환경에서 영화를 즐길 수 있는 시대가 도래했다. 극장의 스크린은 이제 진정한 이미지를 관람할 수 있는 유일한 물질적 조건이 아니다.
문화적 거점으로서의 극장을 상상하기

여기서 극장의 변화가 시작된다. OTT 산업이 대중성을 기반으로 하여 확장되어갈 때 극장을 찾아오는 이들은 취향을 무기로 하는 집단인 시네필과 오타쿠 집단이다. 취향을 가진다는 것은 곧 대중과의 결별을 의미한다. 취향은 단순한 선호도를 넘어 그 문화에 대한 깊이를 전제로 하여 만들어진다. 깊이가 깊어질 수록 대중과의 거리는 점점 더 멀어진다. 시네필과 오타쿠는 그러한 취향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삼고 문화의 깊이를 동경하는 이들이다. 이들의 세계에 들어오기 위해서는 수많은 관문이 요구된다. 당신이 시네필이 되고 싶다면 그저 상업 영화를 따라오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영화사에서 걸작으로 취급받는 영화를 찾아보아야 하고, 한 감독의 모든 필모그래피를 따라와야 하며, 극장 개봉작인 아닌 특정 극장과 영화제에서만 관람할 수 있는 독립예술영화를 보기 위해 고군분투해야 할 것이다. 더 나아가 여러 비평가들의 비평을 접하면서 동시대의 영화적 담론을 섭렵하고, 영화에 관한 온갖 이론을 공부하고, 그 이론들을 뒷받침하는 인문학적 사상들을 공부하는 과정까지 통과해야 한다. 물론 모두가 이 과정을 거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을 거친 자와 그렇지 않은 자 사이에는 어떤 위계가 생성된다. 상대적으로 경험이 부족한 입문자들은 자신들이 갖지 못한 경험과 지식을 가진 이들을 동경한다. 문화적 집단 안에서 깊이는 곧 위계이다. 하물며 오타쿠는 어떠한가? 당신이 오타쿠가 되기로 했다면 우선 자신이 좋아하는 작품의 전편을 차례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것이 책으로 연재된다면 책과 TV 애니메이션을 모두 보는 것이 필수이다. 만일 그것이 오랫동안 연재된 작품이라면 꽤나 긴 시간이 요구될 것이다.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간다면 작품에 대한 각종 해석과 정보를 알기 위해 여러 커뮤니티를 돌아다니고, 작품의 굿즈를 사기 위해 돈을 쓰는 단계도 찾아올 것이다. 이런 과정은 모든 문화적 집단에 적용할 수 있다. 그들은 깊이를 동경한다. 그럴수록 대중과의 거리는 멀어지고 집단 안에서의 정체성은 강해진다.
극장은 어느 순간부터 그러한 문화적 집단들, 취향을 무기로 삼으며 자신의 정체성을 파는 이들을 위한 공간이 되어가고 있다. 점점 극장에는 특정한 문화적 소양을 요구하는 영화들이 많이 걸리고 있다. 물론 극장은 모두에게 열린 공간이다. 하지만 상업 영화가 문화적 위계를 지우며 대중들에게 다가서는 것과 달리 어떤 영화들은 상영되는 순간부터 관객들에게 꽤나 많은 것을 요구한다. 특정한 지식, 영화를 보는 방법 등에서 차이가 발생하고 그 깊이에 따라 위계가 발생한다. 누군가는 그러한 위계성을 거부하며 극장 바깥으로 도망칠 것이다. 반면 그것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영화를 쉽게 따라올 것이다. 어렵고 난해한 예술영화를 볼 때 그 문법에 익숙한 시네필과 그렇지 않은 일반 대중 사이의 간극은 좁힐 수가 없다. 애니메이션 극장판을 볼 때도 그 세계관을 알고 있는 오타쿠와 이를 모르는 대중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벽이 있다. 극장은 점차 취향의 공간이 되어가고 있다. 취향을 가진 이들이 모이는 장소. 이러한 집단 외에도 변화는 다양하다. 자신들이 좋아하는 가수의 공연 영화를 보기 위해 극장을 찾는 음악 팬들. 자신들이 응원하는 팀의 경기를 실시간으로 보기 위해 직관 대신 극장으로 모이는 스포츠 팬들. 상영 기술의 발전으로 스타디움 직관과 극장 관람 사이의 간극이 줄어든다면 이러한 흐름은 더 빠르게 찾아올 수 있다. 극장은 더 이상 영화만을 위한 공간이 아닌 다양한 취향을 가진 이들이 모이기 위한 거점으로 변모했다.
물론 이들은 극장을 사랑해서 극장을 찾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단지 자신들이 보고 싶어하는 것이 극장에 있기에 극장으로 향하는 것이다. 만일 극장이 아닌 다른 곳에서 자신들의 취향을 소비할 수 있다면 당연히 그들도 극장을 떠날 것이다. 당장 극장을 사랑하는 것처럼 보이는 시네필들이 거장의 신작을 보기 위해 넷플릭스를 포함한 OTT를 거리낌없이 구독하는 것을 보라. 그럼에도 극장이 가지는 공간성과 물질성은 극장이 현시대에 내세울 수 있는 가장 큰 무기일지도 모른다. 디스플레이가 비공간성과 비물질성을 내세우며 확장되는 시대에도 자신만의 취향을 가진 이들은 아무리 멀고 번거럽더라도 그 깊이를 지키고자 한다. 극장은 바로 그러한 깊이의 담지자가 될 수 있다. 영화만이 아닌 모든 문화적 집단의 거점. 대중의 선택을 받지 못한 영화를 관람하고, 자신들이 좋아하는 가수와 팀을 함께 응원하기 위한 공간. 그렇게해서 극장은 현재 안에서 과거가 잔존하고 미래를 상상할 수 있는 공간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이건 아직까지 상업영화의 비중이 절대적인 극장 산업 안에서 너무 섣부른 예측일 수도 있다. 누군가는 그러한 변화가 극장을 특정 집단들만을 위한 문화적 게토(ghetto)로 만들지도 모른다고 우려할 것이다. 당연히 나는 극장이 대중을 향한 문을 닫은 채 폐쇄적인 공간이 되는 것을 반대한다. 다만 나는 이러한 변화를 통해 극장이 서로 다른 세계를 연결하는, 그러면서 자신의 새로운 취향을 발견하고 이를 타인과 교류하기 위한 문화적 광장이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