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돌하는 감각 드러나는 진실
영상과 사운드 사이 불협화의 미학과 화합

시각과 청각을 지배하는 영화 예술. 우리는 이미지와 사운드가 전하는 감정이 일치하는 방식으로 연출되는 전형성에 익숙합니다. 대개 기쁜 장면에는 경쾌한 선율, 긴장되는 장면에는 신경을 긁는 선율이 따라온다고 기대하죠. 하지만 감정의 공식을 무너뜨리는 작업도 있습니다. 이런 경우 이미지와 사운드 간의 의도된 불일치가 관객의 감각 자체를 재구성하고 새로운 메시지를 창출합니다. 언뜻 부조화처럼 보이는 이 형식들은, 오히려 서로 다른 의미를 공존시켜 진정한 화합의 구조를 역설하기도 하는데요. 이번 글에서는 영화 <시계태엽 오렌지>, <블루 벨벳>, <트레인스포팅>을 통해 충돌이 어떻게 감정과 주제를 강화하는지 살펴봅니다.
<시계태엽 오렌지>, 1971
부조화가 깨우는 윤리 의식

10대 청소년 알렉스가 저지르는 극악한 비행과 그를 교화한다는 명목으로 자행되는 ‘상위의 폭력’을 담고 있는 영화 <시계태엽 오렌지>. 당시 수많은 논란과 논쟁을 낳았는데요. 이 작품이 관객에게 윤리적·심리적 충격을 안김에 있어, 영상과 사운드의 의도적 엇박자는 큰 역할을 합니다. 대표적으로 알렉스가 흥얼거리는 “싱잉 인 더 레인(Singin’ in the Rain)”은 1952년 개봉한 뮤지컬 영화 <사랑은 비를 타고> 속 특유의 명랑함이 살아있는 곡인데, 화면 속에서는 아주 잔혹한 행위와 결합합니다. 폭력성이 일종의 퍼포먼스로 미화되는 것이죠. 이로 인해 관객은 ‘나는 지금 무엇을 보고 있는가, 무엇을 즐기고 있는가’와 같은 질문에 직면하며 불쾌해집니다.
폭력의 미학화는 베토벤 교향곡 9번으로 절정에 치닫기도 합니다. 베토벤 교향곡 9번을 열렬히 사랑하는 알렉스는 상상 속에서 폭력, 전쟁, 왜곡된 성적 판타지를 연상시킵니다. ‘고전음악 = 고상함’이라는 등식에 대한 완벽한 비틀기입니다. 이 음악은 루도비코 갱생 프로그램에서 고문 영상과 병치되며 숭고함과는 전혀 다른 의미를 띠게 됩니다. 고문 기계에 머리를 고정당한 채 폭력적인 이미지들을 강제로 시청하며 구토감을 느끼는 동안 베토벤 교향곡 9번 4악장이 흐르는 것. 눈으로 보는 폭력과 귀로 느끼는 숭고함 사이의 간극은 기이함을 낳습니다. 결국 이 장치는 알렉스가 가장 사랑하던 음악이 고문 도구로 전락하면서, 그의 정체성과 자유의지를 완전히 박탈당하는 효과를 만들어냅니다.
알렉스가 자유를 되찾고도 무표정하게 걸어 다니는 장면에서는 사운드를 최소화함으로써 앞선 방식을 변주해 그의 감정적 공백을 더 깊이 드러냅니다. 영상과 사운드의 불화로 인해 비로소 드러나는 인물의 내면, 폭력의 윤리성, 그리고 사회적 통제 구조에 대한 비판은 단순히 서사를 넘어 관객의 감각과 도덕적 판단마저 뒤흔드는 힘을 지닙니다.
<블루 벨벳>, 1986
표면 아래 가려진 이상 징후

시각과 청각이 서로 연결되는 감각의 공식을 해체하는 또다른 작품은 <블루 벨벳>입니다. 파란 하늘, 하얀 울타리, 잘 깎인 잔디, 소방관이 손을 흔드는 등 평화롭고 밝은 교외 마을의 이미지에 대비해 순식간에 분위기를 반전하는 요소로 불안한 소리가 불청객처럼 끼어들며 시작합니다. 웅웅거리는 저주파 음향, 개 짖는 소리, 심장 박동 같은 사운드와 함께 납작한 잔디 위로 벌레들이 기어 다니는 클로즈업 장면에서부터 서늘해집니다. 전형적인 1950~60년대 미국 교외의 이상적인 풍경을 재현하면서 정상성 아래 감춰진 욕망과 섹슈얼리티, 통제, 공포가 뒤섞인 병리적 세계를 암시하는데요. 영화 전반적으로 이어지는 시각과 청각의 팽팽한 긴장은 진실을 마주하도록 유도합니다.
특히 인물의 내면은 청각적으로 대변되곤 하는데요. 주인공 제프리는 알 수 없는 이끌림에 살인사건의 용의자로 의심받는 여가수를 염탐하러 찾아가고, 위기에 몰려 비좁고 어두운 실내에 몸을 숨기게 됩니다. 이후로도 도로시의 아파트를 찾아가는 행위는 좁은 공간에 갇히는 느낌을 동반합니다. 이에 시선은 정적인 공간을 답답하게 따라가지만, 사운드는 간헐적인 도로시의 노래 혹은 비명이나 오열, 외부의 일상 소음이 교차되며 불안을 증폭합니다. 정체불명의 남자 프랭크의 등장 역시 같은 맥락으로 연출됩니다. 깔끔하게 차려입은 정제된 모습으로 등장하지만 곧 거친 숨소리·헐떡임·금속성 노이즈·욕설이 화면을 장악합니다. 비상식적인 기준이 있는 듯한 몸짓은 귀를 괴롭히는 폭력적 소리와 만나 ‘이 인물은 통제 불능의 광기 그 자체’임을 알립니다.
그리고 후반부 제프리와 도로시를 통제하려는 프랭크 시퀀스에서 로이 오비슨의 “인 드림스(In Dreams)”가 고문 도구처럼 변형되어 재생되죠. 곡이 한 남자에 의해 립싱크되는데, 몽환적이고 낭만적인 멜로디는 불편하기만 합니다. 정서적 의미가 완전히 반전되며 정상 뒤에 숨겨진 병리 현상이 시청각적으로 폭로되는 셈입니다. 왜곡된 내면을 은유한 결정적 장치가 아닐까 합니다.
<트레인스포팅>, 1996
절망 위에서 터져 나오는 해방의 리듬

한편 끝모를 나락 속에서 마냥 웃지만은 못할 촌극을 벌이는 인물들에 반해 거친 에너지와 강렬한 사운드트랙이 인상적인 <트레인스포팅>도 있습니다. 경쾌한 비트와 역동적인 기타 리프가 돋보이는 이기 팝의 “러스트 포 라이프(Lust for Life)”를 배경으로 에딘버러 거리를 누군가에게 쫓기며 질주하는 주인공 렌튼. 그와 스퍼드, 벡비, 식보이, 토미는 정당한 일을 할 생각은 하지 않고 저마다의 이유로 구제불능의 상태에 빠져 있는 청년들입니다. 음악은 해방감을 주지만, 어쩐지 회색빛 폐허같은 환경 속에 극단적인 일탈의 수렁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이들은 시종 발목 잡힌 느낌을 줍니다.
유일한 즐거움은 마약뿐이라고 믿던 렌튼은 모처럼 마약에서 손을 떼겠다는 선언을 하지만 번번히 실패하고 맙니다. 돌파구는 오히려 불행을 쌓는 것이라며 강도 행각까지 벌이다 붙잡혀 재활 치료 프로그램에 강제 참여하게 되는데, 여전히 중독이 부르는 충동은 그를 가만히 놓아주지 않습니다. 이때 등장하는 헤로인 주사 시퀀스에서는 대량의 마약 투여로 응급실에 실려가는 와중에 루 리드의 “퍼펙트 데이(Perfect Day)”가 흐르며 아이러니함을 더합니다. 이어 기괴한 환각 증상에 빠진 상태에서는 규칙적인 박동음이 흥분감을 전하면서도 심리적 고통에 빠진 상황을 전합니다. 쾌락과 파멸이 공존하는 양면성을 시청각적으로 통합합니다.
이번에야말로 새 삶을 살겠다고 결심한 렌튼이지만 다시 뭉치게 된 친구들은 토미의 죽음 이후 마약을 팔아 큰 돈을 챙기고, 이 과정에서 또 한 번 환멸을 느낀 렌튼은 친구들이 잠든 사이 돈가방을 들고 혼자 달아나는데요. 언더월드의 “본 슬리피 눅스(Born Slippy .Nuxx)” 사운드는 ‘이번이 마지막, 제대로 된 삶을 선택하리라’는 다짐을 기약하는 것인지, 반복되는 탐닉과 몰락을 예고하는 것인지 모호함을 남겨두네요.
이처럼 영화는 종종 영상과 사운드의 충돌 자체가 메시지라는 형식철학을 구현하며 더 명확한 감정을 만듭니다. 불협화음이 흐를 때, 우리는 보이지 않던 감정의 층까지 도달하게 됩니다. 이런 감각의 긴장은 단순한 ‘불쾌함’이나 ‘어색함’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서로 다른 감각이 어떻게 공존할 수 있는지, 이질적인 정서가 어떻게 한 화면 안에서 버텨내는지를 경험하고 질문하게 됩니다. 이는 화합의 본질과 닿아 있는 게 아닐까요? 진정한 화합은 늘 조용하고 부드럽게만 다가오지는 않습니다. 때로는 말과 시선이 어긋나는 가운데 감정의 재조정이 이루어집니다. 부조화를 함께 품는 상황이야말로 우리가 사는 현실과 가장 가까운 조화의 모습이기도 하겠습니다. 결국 화합이란 모든 요소가 똑같이 흐르는 상태가 아니라, 서로 다름을 인정한 채 충돌을 견디고 함께 존재하는 형식의 결과라고 영화는 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