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 클럽이 만드는 화합

도시의 이름으로 연결되는 마음

축구 클럽이 만드는 화합
이미지 출처 : 리버풀 FC 공식 인스타그램

독일에서 열린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을 마지막으로, 24-25시즌 유럽 축구가 막을 내렸습니다. 파리 생제르맹의 우승으로 파리 시내는 한동안 아수라장이었다고 하는데요. 특정 축구팀을 좋아한다는 건, 어떤 도시를 사랑한다는 의미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특히 유럽에서는 ‘국가 또는 도시 간의 대리전’이라 불릴 만큼, 축구 클럽은 특정 커뮤니티의 가치를 품고 있는 상징적인 존재이기도 하죠.

흥미로운 지점은, 대한민국에 사는 사람이 영국 런던의 토트넘을 응원하는 것처럼, 축구 클럽을 향한 지지와 애정이 물리적 제약을 쉽게 넘는다는 점입니다. 나아가 그 클럽이 속한 도시를 마음속의 고향처럼 여기며, 강한 유대감을 느끼는 경우도 많아졌습니다. 축구 클럽과 팬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형성되는 도시의 정체성과, 지역을 넘어 만들어지는 화합의 방식을 함께 살펴봅니다.


감정을 공유하는 클럽

AS 로마

이미지 출처 : 2022년 UEFA 컨퍼런스 리그 우승 당시 풍경. / AS로마 공식 홈페이지

로마 (Rome)는 기원전 8세기부터 이어진 유서 깊은 도시입니다. 유럽 문명의 시작을 함께한 장소이자,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는 공간이죠. AS 로마는 1927년, 로마 내 여러 축구팀을 통합해 창설된 클럽으로, 도시의 정체성을 대표하는 상징이기도 합니다. 로마 건국 신화 속 쌍둥이 형제, 로물루스와 레무스가 젖을 먹는 장면을 담은 로고는, 로마의 기원을 클럽 안에 새기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지요.

AS 로마는 파시스트 정권 시기 로마 남부 클럽들이 통합돼 탄생했습니다. 북부의 SS 라치오만이 독립을 유지하며, 정통성과 보수를 상징하는 클럽으로 남았지요. AS 로마는 ‘로마 시민을 위한 단일 구단’이라는 슬로건 아래 다양한 계층과 세대를 포용하는 클럽으로 자리 잡게 됩니다. 시간이 흐르며 이 팀은 도시의 감정과 정체성을 품은 공동체로 발전해갔습니다.

*SS라치오 1900년 창단된 로마 북부 기반의 클럽으로, 1927년 AS 로마 창설 당시 통합을 거부하고 독자 노선을 택했습니다. 이로 인해 양 팀 간 지역적·문화적 라이벌 구도가 형성되었고, 로마 더비(Derby della Capitale)로 이어졌습니다.

이미지 출처 : 2017년 프란체스코 토티 은퇴식 당시 관중들. / The New York Times


프란체스코 토티(Francesco Totti)의 은퇴식은 그 유대감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순간이었습니다. 2017년, “Grazie Capitano(고마워요, 주장님)”라는 메시지로 가득 찬 경기장에서, 팬들은 오직 한 팀만을 위해 뛴 토티에게 감사를 전했죠. 다니엘레 데 로시 (Daniele De Rossi) 또한 이적 제안을 거절하고 AS 로마에서 18년을 보냈습니다. 이런 선수들의 선택은 클럽의 철학을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이러한 유대의 감정은 인터넷 상에서도 이어지고 있는데요, 온라인 커뮤니티 ‘Romanisti of Reddit’에서는 경기가 없는 날에도 로마에 대한 그리움과 애정을 나누는 팬들이 모여 있습니다. AS 로마는 이제 단순한 팀이 아니라, ‘로마’라는 이름 아래 세계 곳곳의 팬들이 감정의 고향처럼 여기는 공동체가 됐습니다.


슬픔도 기쁨도 함께 짊어지고
리버풀 FC

이미지 출처 : 2025년 프리미어 리그 우승 퍼레이드. / 리버풀 FC 공식 인스타그램

리버풀은 영국 산업화 시대의 중심지였지만, 20세기 후반 탈산업화 흐름 속에 경제적 쇠퇴를 겪으며 실업률 1위 도시로 전락했습니다. 특히 마가렛 대처 (Margaret Thatcher) 정권 하에서 중앙정부는 리버풀의 몰락을 방관하거나 ‘계획된 쇠퇴(managed decline)’라는 표현까지 사용하며 회복 의지를 보이지 않았죠. 정치적으로도 노동당 지지 성향이 강하고 공동체적 가치를 중시해 ‘이질적’인 도시로 여겨졌고, 힐스버러 참사 이후 『The Sun』의 거짓 보도로 시민 전체가 낙인찍히며 사회적 고립감은 더욱 깊어졌습니다.

*힐스버러 참사
1989년 FA컵 경기 중 관중 과밀로 리버풀 팬 96명이 압사당한 사건. 경찰 과실에도 불구하고 당시 언론은 팬들의 책임으로 왜곡 보도했고, 지역 사회는 오랜 기간 진상 규명을 위해 싸웠습니다.

이미지 출처 : 2025년 프리미어 리그 우승 확정 당시 풍경. / 리버풀 FC 공식 인스타그램


이런 역사적 배경은 리버풀 FC라는 클럽의 정체성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리버풀은 단순한 축구팀을 넘어, 도시의 고난과 저항, 연대의 상징으로 자리잡았습니다. “You’ll Never Walk Alone”이라는 구호는 응원을 넘어 슬픔과 기억을 공유하는 공동체적 정서로 발전했고, 팬들은 팀을 통해 도시의 자긍심과 연대감을 견고히 하고 있죠.

지구 반대편에 있는 팬들도 이 ‘연대의 정신’에 공감하며 리버풀을 응원하게 됩니다. 리버풀을 좋아하게 되면, 이 도시의 역사와 정신을 함께 이해하게 되는 것이죠. 클럽과 도시, 그리고 팬이 함께 만들어낸 이 끈끈한 유대야말로, 리버풀이 단순한 축구팀을 넘어선 문화적 상징이 된 이유입니다.


작지만 단단한 공동체

브렌트퍼드 FC

이미지 출처 : 브렌트퍼드는 팬이 지분을 소유한 최초의 프리미어 런던 클럽이다. / 브렌트퍼드 공식 홈페이지

브렌트퍼드 FC는 1889년 런던 서부의 소도시 브렌트퍼드에서 지역 주민들에 의해 창단된 클럽입니다. 오랜 시간 하위 리그를 전전했지만, 2021년 프리미어리그 승격을 이루며 주목받기 시작했죠. 그러나 이들의 진정한 강점은 경기력뿐만 아니라, 팬과 지역사회와의 깊은 유대에 있습니다.

브렌트퍼드는 팬 참여를 클럽 운영의 핵심으로 삼고 있습니다. 프리미어리그에서 유일하게 팬 대표가 이사회에 참여하며, 팬 자문 위원회와 다양한 팬 워킹 그룹을 통해 클럽의 방향성을 함께 결정하죠. 또한, 시즌권 보유자에게 생일 축하 전화를 직접 걸거나, 청각 민감 팬을 위한 좌석 구역을 운영하는 등 세심한 배려로 팬들과의 관계를 강화하고 있습니다.

이미지 출처 : 브렌트퍼드는 시각장애인 팬을 위해 ‘오디오 묘사 중계(Audio Descriptive Commentary)’ 서비스를 제공한다. / 브렌드퍼드 공식 인스타그램

브렌트퍼드의 이러한 노력은 클럽의 철학에서 비롯합니다. "팬 참여는 거창한 제스처가 아니라, 진정성과 작은 것들의 중요성에 관한 것이다,"라는 클럽의 신념은, 브렌트퍼드를 단순한 축구 클럽이 아닌, 지역사회와 함께 성장하는 공동체로 만들어주고 있습니다.


다시 손잡은 도시와 팬의 이야기

대전 하나 시티즌

이미지 출처 : 대전 하나 시티즌 공식 홈페이지


대전 하나 시티즌은 과거 ‘시민구단’으로 운영되다 오랜 침체기를 겪은 팀입니다. K리그 1에서의 존재감은 점차 희미해졌고, 2013년에는 2부 리그로 강등되며 팀의 미래를 걱정하는 목소리도 많았죠. 하지만 대전은 팬들의 포기하지 않는 응원과 참여 속에서 다시 살아났습니다.

2020년, 하나금융그룹이 구단을 인수하며 팀은 ‘대전 하나 시티즌’으로 새 출발했지만, 시민들은 팀의 정체성이 사라질 것을 우려하기도 했습니다. 이에 하나금융은 대전 팬들과 함께 클럽의 아이덴티티를 이어가기 위한 ‘공동 설계’를 적극 도입합니다. 팀의 엠블럼은 팬 투표를 거쳐 기존 대전 시티즌의 상징성과 색감을 계승한 디자인으로 결정되었고, 응원가 역시 팬 커뮤니티 주도로 제작되었죠.

이미지 출처 : 대전 하나 시티즌 공식 홈페이지


2023년, 대전은 다시 K리그 (K League) 1으로 승격하며 그 정체성과 위상을 되찾았습니다. 이는 단지 승리의 결과가 아니라, 도시와 팬, 클럽이 서로를 믿고 지켜낸 화합의 상징과도 같은 사건이었습니다. 팬과 도시가 팀의 유산을 함께 이어가는 대전 하나 시티즌의 이야기는, 지역성과 공동체의 진정한 의미를 되새기게 합니다.


낯선 도시의 클럽을 응원하는 나와 전혀 무관했던 세계와 화합을 이루는 가장 감정적인 방식이란 생각이 듭니다. 로마, 리버풀, 런던 , 그리고 대전까지. 각기 다른 도시에서 태어난 축구팀들은 자신이 속한 지역을 품으며, 동시에 그 바깥의 세계와 감정을 공유하는 통로가 되어왔습니다.

하나의 클럽을 응원하게 되면, 그 도시의 역사와 정서를 이해하게 됩니다. 선수의 서사에 공감하고, 팬의 응원 방식에 감탄하고, 때로는 그 도시의 기후나 풍경을 상상하게 되지요. 그렇게 우리는 아주 먼 도시와도, 감정의 언어로 이어지게 됩니다.

축구를 통해 우리는 나의 울타리를 넘어, 누군가의 마음에 다가갈 수 있습니다. 필자는 리버풀의 팬인데요, 이번 아티클을 쓰며 도쿄 에비스의 리버풀 펍에서 국적도 나이도 다른 이들과 어깨를 맞대고 응원가를 불렀던 밤이 떠올랐습니다. 서울도 아닌 도쿄에서, 마음은 그 어느 때보다 리버풀에 가까이 닿아 있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