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움에 기댄 비평 서적 3선
설명할 수 없는 아름다움에 갈증을 느낀다면
무언가 설명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마주했을 때, 그것을 알고 싶다고 느낀 적이 있나요?
얼마 전 광화문에서 영화를 보았습니다. 영화가 끝나고 깜깜한 극장 안에서 올라가는 엔딩 크레딧을 보며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는 몇 장면을 곱씹었습니다. 좋은 것 같기도, 나쁜 것 같기도, 아름다운 것 같기도, 지독한 것 같기도 한 감각. 그 감각의 정체와 출처가 밝혀지기 전에 어김없이 불은 켜지고, 저는 약속된 대로 극장을 나섰습니다.
이럴 때면 작품과 나 사이에 어떤 섬 하나가 생긴 것 같습니다. 멀리서 형체도 없는 느낌의 세계가 신기루처럼 아른거립니다. 그 속으로 돌아올 길 없이 아주 깊게 들어가거나, 그 작품을 아는 누군가와 아주 오래 이야기하고 싶은 충동을 느낍니다. 종종 능력의 한계로 길이 막히거나 현실의 한계로 만족스러울 만큼 이야기할 수 없을 때, 비평을 읽습니다. 비평은 사유로 다리를 지어 그 섬으로 향합니다. 아른거리던 세계가 가까이 다가옵니다. 그것이 내가 엿본 것과 전혀 다른 모습이라도 괜찮습니다. 우리는 자신만의 섬으로 향하는 사유의 방법을 알게 될 테니까요. 작품과 나 사이에 다리를 놓아 줄 세 권의 비평서를 소개합니다.
『몰락의 에티카』
문학은 종종 답보다는 질문을, 이름 붙일 수 없는 감정보다 알기 힘든 감각을 남깁니다. 시는 일상적 발화를 뚫고 나와 격발하고, 소설은 현실적 행위를 뚫고 나와 작렬합니다. 그 발화는 난해하고 그 행위는 예측 불가합니다. 이상하게 바로 그 지점이 우리를 오래 붙잡습니다. 설명되지 않은 채 남아 있는 감각이 끝내 해석을 요구할 때 비평이 응답합니다.

읽는 이에게 이해하고 싶다는 욕망이 있다면, 작품에도 이해받고 싶은 욕망이 있다고 가정할 수 있을까요. 읽는 이와 작품 사이에 놓인 이 두 욕망을 동시에 충족시키는 것이 비평가의 역할이라면, 이 책은 보기 좋게 성공합니다. 시와 소설, 근대와 현대, 작품과 장르를 넘나들며 한국 문학에 기대어 쓴 그의 글은 하나같이 정확하다는 인상을 남깁니다.

전부인 하나를 위해 나머지를 모두 포기한 사람들. 그래서 몰락했지만 끝내 지지는 않은 인물들의 첫 표정을, 저자는 베어낸 칼날처럼 예리하게 동시에 지극한 애정으로 포착합니다. 논리의 정연함과 표현의 유려함 속에 스며 있는 문학에 대한 사랑은 비평이란 무엇인가를 다시 묻게 합니다.
문학이 아니었다면 정처 없었을 것이다. 내가 나 자신을 혐오하지 않으면서 말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진실이 있다면 이것이다. 나는 문학을 사랑한다. 문학이 나를 사랑하지 않아도 어쩔 수가 없다._신형철, 『몰락의 에티카』
『모국어는 차라리 침묵』
다루는 예술의 형태에 따라 비평은 달라집니다. 공연예술은 적극적으로 현실에 나타납니다. 현실의 무대 위에 가상 세계를 짓고, 실제 사람이 그 안으로 들어가 인물을 살아냅니다. 노래합니다. 춤을 춥니다. 우리는 그것을 실시간으로 지켜봅니다. 그리고 공연이 끝나는 순간, 작품은 세계와 함께 사라집니다. ‘발생하는 동시에 소멸하는 예술.’ 이 지점에서 공연예술 비평의 특수성이 발생합니다.

작품의 유일무이함은 비평가와 독자 사이에 깊은 심연을 만듭니다. 독자는 그가 본 그것을 결코 볼 수 없습니다. 이 사실은 그의 문장을 더욱 낯설게 만듭니다. 그래서 이 책은 공연 직후의 가쁜 호흡이 아니라, 충분한 시간이 유예된 뒤에 쓰입니다. 에세이 형식을 띤 이 책에서는 파리에서의 삶과, 그 삶 속에 자연스럽게 스며든 공연에 대한 사유가 함께 담겨 있습니다. 공연 직후의 감동과 흥분이 가라앉아 기억 속에 남았을 때. 삶과 감각이 마음 아래로 내려가 멀리서 바라볼 수 있을 때 글은 쓰입니다.

이 유예의 시간은 슬픔이 글이 되는 과정과 닮았습니다. 그의 글을 읽고 난 뒤 다시 꺼내 볼 수 있는 공연은 이제 여기에 없지만, 괜찮습니다. 시간이 흘러 말갛게 떠오른 이야기들은 충분히 아름답고, 가라앉아 아득해진 것들은 여전히 슬프기 때문입니다. 말해지지 못한 것들은 우리들의 모국어, 그러니까 침묵으로 호명될 것입니다.
처음 대학에 들어갔을 때 막연히 미학을 공부하고 싶었지만 무엇이 아름다운 것인지 알지 못했다. 이론가가 되더라도 적은 두는 예술 장르가 종래에는 생길 터인데, 그 마음의 집을 어디로 두어야 할지 몰랐다. 우여곡절 끝에 듣게 된 한 수업에서 어느 날 <목신의 오후>라는 무용 공연의 영상을 보았다. … 지금에 와서는 왜 하필 그 작품이었는지를 좀처럼 설명하지 못하겠다. 어쨌거나 나는 그때, 확고하게 저것이 가장 아름답다, 라고 생각했다. 춤추는 사람의 몸, 그 아름다움을 만나 가슴이 쿵쾅거렸다._목정원, 『모국어는 차라리 침묵』
『박찬욱의 오마주』
영화는 어떤 예술보다 우리에게 가깝게 다가옵니다. 두세 시간 남짓한 시간을 빛나는 화면에 온전히 내어주고 나면 인물이 말하는 방식과 세계가 구성되는 방식, 카메라가 무엇을 바라보고 어디에 머무는지까지 수많은 정보가 인상으로 남습니다. 극장을 나선 뒤 누군가는 함께 본 사람과 감상을 나누고 또 누군가는 유튜브에 영화 제목을 검색합니다. 영화적 경험은 그것을 알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하면서 동시에 쉽게 말로 환원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영화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영화적인 경험을 언어로 옮긴다는 것은 가능한 일일까요.

최근 <어쩔 수가 없다>를 발표한 박찬욱 감독은 감독으로 자리를 잡기 전까지 영화 평론가로 활동하였습니다. 이 책은 인간의 원초적인 욕망과 죄의식, 구원에 대한 성찰을 자신만의 독특한 미장센으로 구현해 온 그가 영화를 어떻게 바라보고 사랑해 왔는지를 보여주는 평론집입니다.

그의 영화에 대한 태도는 언제나 우호적이지만은 않습니다. 때로는 시니컬하고, 신랄합니다. 책 뒤편에 실린 ‘과대평가된 영화 Best 10’에서는 그의 날카로운 시선이 여실히 드러납니다. 그러나 그의 글을 읽다 보면, 그 냉정함마저도 영화에 대한 깊은 애정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느끼게 됩니다. 이 책에서 우리는 감독 박찬욱의 상상력과 영감의 원천을 발견하는 동시에, 영화라는 예술로 끝내 뛰어들고 싶어 하는 한 관객의 집요한 사랑을 함께 마주하게 됩니다.
영화관이 선남선녀의 연회장이라면 비디오 숍은 공동묘지, 이 책은 그들에 대한 검시 보고서이다. 연인의 시신을 해부하는 의사의 심정! 칼을 대랬더니 주검들은 좀비로 되살아났다. 나는 도리어 팔뚝을 깨물렸다._박찬욱, 『박찬욱의 오마주』
비평가들은 작품을 해석합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할 수 없지만, 잠재적 유에서 현실적 유를, 감각적 유에서 논리적 유를 창조’해 냅니다. 작품이 감각을 탄생시킨다면, 비평은 그 감각을 토대로 담론을 생산합니다. 이 과정은 단순한 전달이 아니라 변형입니다. 그래서 비평은 물리적이기보다 화학적입니다.
작품 앞에 멈춰 선 시선은 감응과 해석의 시간을 통과하며 작품과는 또 다른 층위의 아름다움을 생산합니다. ‘작품 없이는 말할 수 없다’라는 제약 속에서 비평은 성립합니다. 이 제약은 창작의 한계라기보다 대상을 오래 바라보고 함부로 말하지 않기 위해 부여된 일종의 윤리에 가깝습니다. 절제된 거리와 열렬한 시선이 공존할 때 비평은 고유한 아름다움을 만들어냅니다. 신형철 평론가의 말로 글을 마칩니다.
비평은 함부로 말하지 않는 연습이라고 생각합니다. 타인들에 대한 폭력적인 단언을 즐기는 사람들도 당사자의 면전에서는 잘 그러지 못합니다. 어쩌면 비평은 함부로 말하지 않기 위해 늘 작품을 앞에 세워두는 글쓰기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작품 없이는 말할 수 없다는 이런 제약이 저는 가끔 축복 같습니다._신형철, 『정확한 사랑의 실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