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의 태도를 제안하는 책 3권
창작자의 마음을 읽는 시간
창작자에게 연말은 한 해의 작업을 돌아보고, 다음 페이지를 계획해보는 시간입니다. 여러 지원사업과 공모전의 타임라인을 미리 체크해보고, 그간의 작업을 포트폴리오로 정리해 아카이브하기도 합니다. 내년의 밑그림이 잘 그려지지 않을 때면 조급함에 어깨에 힘이 들어가곤 하지요. 괜히 깜빡이는 커서를 바라보며 멍하니 앉아 있다 보면, 나보다 앞서 창작을 해온 이들은 이 시간을 어떻게 통과해 왔을까 궁금해집니다.
그렇게 선배 창작자들의 조언에 귀를 기울여 봅니다. 안무가, 미술가, 소설가 세 사람이 쓴 3권의 책은 한계를 받아들이고, 질문들을 날카롭게 만들고, 하루하루 자신을 갱신해가는 창작자의 태도를 조언합니다.
『안무가의 핸드북』 - 나는 내가 만들 수 있는 작품만 만들 수 있다

영국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안무가이자 교육자 조나단 버로우스의 『안무가의 핸드북』은 마치 잠언처럼 창작자를 위한 다양한 조언을 짧고 굵게 전달해주는 지침서입니다. 제목과는 다르게 안무가들만을 위한 책은 아닙니다. 재료, 습관, 형식, 리서치, 협업, 관객 등 다양한 키워드를 횡단하는 이 책은 쌓여가는 질문과 선택의 연속에서 본인만의 길을 찾아내야 하는 모든 분야의 창작자에게 중요한 힌트를 쥐어줍니다.
버로우스는 단호하게 말합니다. “당신이 원하는 것을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은 환상이다. 당신은 당신이 만들 수 있는 것만 만들 수 있다.” 저는 이 문장에 크게 위로 받았습니다. 창작을 하다 보면 다른 동료의 뛰어난 작품을 보면서 질투가 생기기도 하고, 더 나은 작업을 하고 싶은 마음으로 스스로를 다그치기도 합니다. 회초리와 채찍질은 분명 창작자에게 좋은 에너지원이 되지만, 그럼에도 ‘모든 것을 해내는 사람’이 되기란 불가능합니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내가 무엇을 만들 수 있는지 찾아내는 것입니다. 내가 어떤 창작자인지 명확하게 알고 있다는 것,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 무엇을 할 수 있는 사람인지 알고 있다는 것. 그건 동시에 어떤 것은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또 그것이 능력이나 작업 여건의 부족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그리고 내가 만들 수 있는 작품을, 내가 가장 잘 하는 방식으로 해내는 것입니다. 버로우스의 말처럼 “이건 단지 작업일 뿐”이니까요.
『안무가의 핸드북』은 질문의 방향을 바꿔보라고 말합니다. 어떤 원칙도 갖지 않겠다고 결정하는 것 역시 원칙이며, 준비하지 않기로 결심하는 것 또한 집중과 몰입을 도울 수 있다고. 시야를 열어 두는 것뿐만 아니라 언제 닫아야 할지 알아야 하며, 작업을 멈출 때를 아는 것은 작업만큼이나 중요한 일이라고. 그리고 마지막에는 이렇게 덧붙이기도 합니다. “이 모든 것을 잊어라.” 결국 중요한 것은 책에 쓰인 원칙들이 아니라 우리가 작업을 통해 발견할 우리만의 방식입니다. 어떤 과정을 설계하고 밟아나갈 것인지 결정하는 일입니다.
“당신이 어떤 방식으로 시도하고 만들든, 당신이 만들려는 작품을 만들 것이다.
안무가 로즈메리 부처가 내게 한 말이다.
비결은 당신이 무엇을 만들 수 있는지 찾아내는 것이다.”_조나단 버로우스, 『안무가의 핸드북』
『안규철의 질문들』 - 작가는 질문하는 사람

한국개념미술의 대표적인 미술가 안규철은 조각이나 드로잉 뿐만 아니라 자신만의 단상과 사유를 글로 표현하며 『사물의 뒷모습』, 『그 남자의 가방』 등 여러 권의 산문집을 낸 작가입니다. 또 히토 슈타이얼, 빌렘 플루서 등 미술, 철학계 거장들의 책을 한국어로 소개하는 번역가이기도 합니다.
그는 자신이 글과 미술을 ‘양손잡이’처럼 쓴다고 밝힙니다. “예술가는 남이 가르쳐 주지 않는 일들의 방법을 찾는 데 자신의 삶을 탕진하는 사람”이라고 단언하며, 이야기를 하지 않는 미술은 삶을 다룰 수 없다는 고민 속에서 작업을 이어갑니다.
이를테면 그의 화두는 이런 것들입니다. 보편적인 이야기를 끌어내는 과정에서 현실의 구체성을 희석하거나 휘발시키는 결과가 도출되는 아이러니함. 실패와 부조리에 대한 비판이 투정과 농담에 그치지 않게 하려는 치열함. 단순한 자기표현이 아닌 관객에게 던지고자 하는 질문에서 작업의 근거를 찾으려는 태도. 그는 자신의 생각을 끈질기게 이어가다가도 이렇게 반문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여전히 유효한 믿음인가?” 4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미술가로 활동한 그의 내면에 차곡차곡 쌓인 질문들은, 시대와 개인 사이에서 고민하는 모든 창작자가 한번쯤 부딪히게 될 질문들이기도 합니다.
『안규철의 질문들』은 그의 생각과 작업을 깊이 알고 싶은 입문자에게 더없이 좋은 책입니다. 사람과 삶에 대한 아포리즘부터, 구체적인 전시와 작업의 방향성을 스케치한 메모, 마치 ‘비명’처럼 느껴지는 후회 섞인 반문들.
“나는 내 글과 그림이 한가한 잡담이 아니기를, 차라리 어색한 침묵이기를 바란다. 어쩔 줄 모르는 순간을 대면하는 불편한 경험이기를 바란다. 그런데 지금 나의 작업은 그럴 만큼 강력한가. 말문을 막을 만한 침묵인가.”
그의 질문들은 만만하지 않습니다. 그가 창작자로, 시대에 놓인 개인으로 세월을 통과해오면서 축적된 에토스가 응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안규철의 질문들』은 하나의 작업을 마치고 다음 작업의 사이를 보내고 있는 창작자들, 세상과 나 사이의 관계 속에서 유의미한 질문들을 길어올리려는 이들에게 잔잔하게 힘이 되어줄 책입니다.
“작가는 무엇을 하는 사람이냐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나는 늘 작가는 ‘질문하는 사람’이라고 대답해 왔다. 세상에 대해, 삶에 대해, 미술의 관습과 한계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함으로써 세상과 삶과 미술의 다른 가능성을 모색하는 것이 바로 예술가의 일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난 40년간 미술가로 살아오는 동안 나의 질문들은 과연 무엇이었는가? 그 질문들은 누구를 향한 것이었고, 어떻게 던져졌으며, 어떤 대답을 얻었는가? 그것들은 그 시기에 가장 절실히 필요했던 질문들이었을까?”_안규철, 『안규철의 질문들』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 틀림없이 우리 자신의 것

마지막 책은 여전히 한국 독자들의 큰 사랑을 받고 있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직업으로서의 소설가』입니다. 등단 이후 최초로 자신의 작업 방식과 문학에 대한 생각을 총정리한 이 책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부분은 창작자의 ‘오리지널리티’에 대해 언급한 4장입니다.
하루키는 창작자가 ‘오리지널’로 자리잡기 위해서는 세 가지의 조건을 채워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첫번째, 다른 이들과는 명백히 다른 독자적인 스타일을 갖고 있어야 한다. 두번째, 그 스타일을 스스로의 힘으로 버전 업하는 자기혁신력을 갖고 있어야 한다. 세번째, 독자적인 스타일이 시간 경과와 함께 일반화되고 사람들의 정신에 흡수되며, 다음 세대의 레퍼런스로 자리매김해야 한다. 요컨대 얼마나 독창적인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계속해서 갱신하고 가다듬는 과정이 필수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신만의 스타일을 어떻게 발견할 수 있을까요? 그는 자신만의 오리지널 문체나 화법을 발견하는 출발점은 무언가를 더하는 것이 아니라 빼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창작의 과정에서 즐거움을 방해하는 요소들을 없애고, 어깨에 힘을 빼고, 자유로워지는 것. 사십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소설을 써오면서도 ‘라이터스 블록’, 작가로서의 슬럼프 기간이 한번도 없었다는 그는 그 이유를 “쓰고 싶은 마음이 퐁퐁 샘솟지 않을 때는 전혀 글을 쓰지 않기 때문”이라 설명합니다.
동시에 하루키는 새로운 소설을 쓸 때마다 도전적인 구체적 목표를 한두가지씩 설정하고 써내려간다고 언급합니다. 예컨대 일인칭으로 시작해 삼인칭으로 나아갔던 자신의 집필 경험을 소개하며, 인칭의 변화는 대상을 바라보는 시선과 시점의 근본적인 변화였음을 깨달았다고 말입니다. 창작자의 좋은 점은 나이에 관계없이 발전과 혁신이 가능하다는 점이기에, 창작자인 스스로를 갱신하려는 노력이 중요하다고 강조합니다.
"이것이 오리지널리티의 정의로서는 가장 이해하기 쉬운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신선하고 에너지가 넘치고, 그리고 틀림없이 그 사람 자신의 것인 어떤 것.'
오리지널리티란 무엇인가, 그것을 말로 정의하기는 몹시 어렵지만 그것이 몰고 오는 심적인 상태를 묘사하고 재현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그리고 나는 가능하다면 소설을 쓰는 일로 그러한 '심적인 상태'를 내 안에서 다시 일으켜보고 싶다고 항상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실로 멋진 기분이기 때문입니다. (...) 이론 따위는 빼고, 그냥 단순하게."_무라카미 하루키,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세 권의 책을 읽으며 저는 제가 창작하는 과정을 다시 생각해봅니다. 작업을 하다보면 가끔 저는 야구 시합의 중요한 찬스에서 타석에 선 타자의 마음이 됩니다. 투수의 공을 멋지게 잡아당겨 담장 밖으로 날려 보내고 싶은 마음으로 작업을 하다 보면 떨어지는 공에 헛스윙 삼진을 당하고 말겠지요. 저는 요즘 방망이를 짧게 쥐고, 볼은 버리고, 내가 잘 칠 수 있는 공만 깔끔하게 밀어치자, 라고 생각합니다. 간결하고 심플하게, 1-2루간을 꿰뚫는 깨끗한 적시타를 노리자. 홈런은 머리에서 지우고, 만루 찬스의 부담감을 즐기려 노력하면서, 그라운드를 머릿속에서 재설정하는 것입니다. 나는 내가 만들 수 있는 것만 만들 수 있으니, 품고 있는 질문들을 날카롭게 만들면서, 하루하루 나를 갱신해나갈 것. 그렇게 때려낸 타구는 ‘틀림없이 우리 자신의 것’일 테니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