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해한 세계 곁에 머무르는 사랑, <요나단의 목소리>

사랑하는 이의 고통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불가해한 세계 곁에 머무르는 사랑, <요나단의 목소리>
이미지 출처: 해나 X (@haenadraws)

‘나’는 ‘너’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서로가 살아온 세계를, 서로가 가진 고통을 온전히 이해할 수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사람이 고통에 잠겨있을 때, 우리는 그 앞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요나단의 목소리>는 바로 이 질문에서 출발합니다. 퀴어로서의 사랑과 기독교인으로서의 신앙, 그 사이에서 비롯되는 고통을 조용하고 섬세하게 담아내며, 퀴어도 아니고 신앙도 없는 한 인물이 그 고통에 반응하는 방식에 주목합니다.


세계와 불화하는 고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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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단의 목소리>는 크게 두 시점을 오가며 전개됩니다. 하나는 중학생 시절 선우의 시점으로, 또래 소년인 다윗을 사랑하게 되는 과거를 다룹니다. 다른 하나는 고등학생이 된 선우를 룸메이트 의영의 시점에서 따라갑니다. 이야기의 중심에 놓인 선우는 어렸을 때부터 자연스럽게 찬양을 부르는 아이였습니다. 선우의 일상에는 기독교가 당연하게 자리 잡고 있죠. 선우의 아버지는 목사님이며, 그의 가족은 교회 내 사택에서 생활합니다. 선우는 교회와 생활공간의 경계가 없는 환경에서 교인들의 시선을 의식하며 ‘담임 목사의 모범적인 아들’로 자라야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선우는 다윗을 만나고 다른 삶도 가능하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깨닫습니다. 다윗의 아버지도 목사님이지만, 다윗은 교회에 나가지 않습니다. 비겁하게 거짓말하며 살고 싶지 않은 다윗에게 교회는 위선으로 가득한 공간이었죠. 다윗은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들에게 사랑하며 축복한다고 말하는 교회를 거부했고, 다윗의 아버지는 그런 다윗을 내쫓았습니다. 선우는 부모의 세계관을 물려받지 않고 독립적으로 살아가는 다윗에게 자연스럽게 관심과 호기심을 느낍니다.

다윗과 함께하는 시간이 늘면서 선우는 점차 다윗을 사랑하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다윗은 선우에게 새로운 일상을 넘어 마치 새로운 종교가 됩니다. 선우는 다윗을 하루 종일 생각하며 그와 주고받은 문자 메시지를 성경 묵상하듯 반복해 읽습니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로 다윗이 세상을 떠나면서 선우는 큰 상실감에 빠지는데요. 선우는 다윗을 그저 편견 어린 시선으로 바라봤던 교인들과 다윗의 죽음을 지켜보았다는 하나님의 존재에 깊은 회의를 느끼죠. 하지만 선우는 익숙한 세계를 완전히 버리지 못합니다. 바로 다음 날 부활절 예배에 참석해 예수님의 부활을 노래해야 했죠.

다윗을 잃었다는 깊은 슬픔과 상실감 속에서 선우는 스스로 무슨 말을 하는지 의식하지 못한 채, 엄마에게 다윗을 사랑했음을 고백하게 됩니다. 그녀는 선우의 사랑을 죄악시하고 숨기기로 합니다. 교인의 시선을 의식하며 선우가 담임 목사의 모범적인 아들로 남길 바랄 뿐이죠. 결국 선우는 다윗을 향한 사랑과 애도를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 채 깊은 우울에 잠깁니다. 그동안 본인이 속했던 세계로부터 존재를 인정받지 못하고, 자신을 숨겨야만 하는 고통 속에 고립됩니다.

해석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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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단의 목소리>는 감정을 억눌러야만 하는 퀴어의 우울을 재현하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그 고통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타인이 어떻게 그 곁에 머무르며 감응하는지 보여주며, 공감과 사랑의 또 다른 가능성을 탐색하죠. 이를 이해하기 위해선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또 다른 목소리, 의영에게 주목해야 하는데요. 의영은 고등학생이 된 선우의 기숙사 룸메이트로, 깊은 우울 속에 잠겨 있는 선우의 곁에서 3년을 함께 보내는 인물입니다.

의영은 채플 시간에 선우가 부르는 성가를 들은 후, 성가대 연습을 꾸준히 따라갈 정도로 선우의 노래에 매료됩니다. 의영이 선우에게 보이는 관심은 자신이 한 번도 속해본 적 없는 세계에 대한 호기심에서 비롯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선우의 세계는 종교가 없는 의영에게 낯설고 생경한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세상 음악’이라는 이유로 가요를 들을 수 없고 오로지 성가만 듣고 부를 수 있었던 선우의 삶은, 의영에게 매우 이질적으로 느껴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의영은 기독교의 세계 바깥에 있는 외부인이기 때문에, 선우의 노래를 들리는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의영은 성가 속 가사의 의미를 모릅니다. 그 성가에 담긴 역사적이고 종교적인 맥락도 알지 못합니다. 그에 대한 해석이나 신념 없이 순수하게 그저 선우의 목소리와 멜로디를 감상했을 것입니다.

이와 비슷하게 의영은 선우의 성 지향성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입니다. 부활절을 앞두고 선우가 눈물 흘리며 다윗을 보고 싶다고 말할 때, 의영은 선우가 퀴어임을 알아차리지만 불편함이나 거부감 없이 받아들입니다. 선우의 사랑은 의영에게 죄도, 비정상적인 무언가도 아닙니다. 의영에게 선우는 그저 우울감과 그리움 속에서 울고 있는 친구일 뿐이죠. 의영은 손에 경련을 일으키며 우는 선우에게 물 한 잔을 건네줍니다. 의영은 선우에게 다윗은 어떤 애였는지 먼저 물으며, 선우가 다윗의 이야기를 꺼낼 수 있는 유일한 친구가 되어줍니다.

세계의 바깥에서, 곁에 머무는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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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의영은 선우가 살아온 세계를 직접 겪어본 적이 없습니다. 또 설사 의영이 선우처럼 기독교인 퀴어라 하더라도 의영은 선우가 아닙니다. 주체와 타자 사이에는 쉽게 좁힐 수 없는 간극이 존재하죠. 그 차이는 선우가 엄마에게 거짓말한 후 둘 사이에서 벌어진 다툼에서 뚜렷하게 드러납니다. 의영은 스스로를 부정하는 거짓말을 한 선우에게 화를 냈고, 선우는 의영이 살면서 거짓말할 필요가 없었으니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거라며 분노하죠. 갈등 이후 서로에게 거리를 두는 동안, 의영은 동성애를 죄악시하는 기독교와 그에 대한 선우의 믿음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대로 선우와 멀어지게 되는 걸까 고민합니다.

그러나 곧 의영은 자신이 거짓말할 필요 없는 안온한 조건에서 살아왔음을 인정하게 됩니다. 동시에 선우가 마치 영화나 소설 속 인물처럼 그간 살아온 세계를 통쾌하게 부정하고 스스로를 긍정하길 기대했다는 걸 깨닫기도 하고요. 그 마음은 선우가 처한 복잡한 현실을 무시한 기대였고, 미디어로 접한 이상적인 서사에 선우를 끼워 맞추고 있던 것에 불과했습니다. 의영은 천국과 지옥을 짊어진 사람들이 언제나 쉽고 단순하게 자기를 긍정할 수 없다는 걸 받아들입니다. 의영은 여전히 선우가 살고 있는 가혹한 세계가 이해되지 않지만, 그 안에 있는 선우를 존중하기로 합니다. 비록 거짓말을 안고 살아가더라도 자신에게만큼은 거짓말하지 말아 달라며 선우의 곁으로 돌아갑니다.

이때 ‘요나단의 목소리’는 단순히 다윗을 향한 선우의 헌신적 사랑을 넘어, 선우가 우울을 버틸 수 있도록 버팀목이 되어준 의영의 목소리로 확장됩니다. 선우가 교통사고를 당했을 때, 의영은 여전히 믿음이 없음에도 선우를 살려달라고 간절히 기도하는데요. 교통사고에서 회복된 선우는 혼수상태에서 의영의 목소리를 들었다고 말하며, 의영이 하나님이 자기에게 보내준 사람 같다고 느꼈음을 고백합니다. 선우에게 의영은 매일 밤 하루하루를 버티게 해달라고 드린 기도에 대한 응답처럼 느껴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존재를 믿을 수밖에 없다는 선우의 세계를 의영은 여전히 이해할 수 없지만, 의영은 그 세계에서 고개를 돌리지 않기로 합니다. 의영은 교통사고의 후유증으로 “귀를 아주 가까이 기울여야만 들을 수 있는 가장 작고 거친 목소리”를 가지게 된 선우에게 계속해서 귀를 기울이는 친구로 남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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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다윗을 자기 생명처럼 사랑했던 요나단으로서, 의영이 보여주는 사랑입니다. 의영은 선우가 느끼는 고통을 똑같이 느낄 수 없습니다. 그가 살아온 세계를 완전히 이해하지도 못합니다. 하지만 옆에서 사랑하는 이의 고통을 지켜보는 동안, 의영은 자기 몫의 “진짜 고통”을 느낍니다. 그래서 의영은 선우를 조금이라도 더 이해하려 애쓸 수밖에 없죠. 결국 그 간극을 온전히 메울 수 없음을 인정하며 무력감을 느낄지라도 의영은 선우의 곁을 떠나지 않습니다. 닿지 못하더라도 등을 돌리지 않는 것, 그 세계 안에 들어갈 수 없어도 가장 가까운 곁에 머무는 것. 그것이 의영이 사랑을 실천하는 방식입니다.

서로 맞닿아 있는 수많은 형태의 사랑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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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우와 의영, 두 요나단이 보여주는 사랑은 어딘가 닮았습니다. 두 사랑 모두 서로 다른 세계에 대한 호기심에서 시작합니다. 선우는 다윗을 통해 처음으로 교회 바깥의 생활을 마주하고, 다윗은 선우를 통해 기독교와 퀴어의 세계를 접하죠. 이 낯선 세계는 두 사람에게 종교적으로 느껴지기도 하는 강한 끌림을 만들어냅니다. 선우는 성경 묵상하듯 다윗과 주고받은 문자 메시지를 밤낮으로 경건하게 되새기고, 의영은 선우의 특별한 성가를 듣기 위해 빠짐없이 성가대 연습을 찾아갑니다. 그리고 둘 다 사랑하는 이에게 특별한 존재가 되고 싶다는 욕망을 품습니다. 선우는 자신의 노래로 다윗에게 감동을 주길 바라고, 의영은 선우의 삶에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오는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선우와 의영의 사랑에서 드러나는 공통점은, 결국 사랑이 가진 보편적인 특성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다른 세계관을 지닌 사람에 대한 호기심, 신앙처럼 일상생활을 한가득 채워버리는 강렬한 끌림, 그리고 그 사람에게 특별한 존재가 되고 싶다는 욕망까지. 의영과 선우의 사랑은 형태만 다를 뿐, 지극히 일반적인 사랑인 것입니다. 친구로서의 우정이든, 퀴어로서의 사랑이든, 본질은 다르지 않습니다.

사랑이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메시지를, 어쩌면 신의 절대적인 사랑도 인간의 사랑을 통해 이해해 볼 수 있다는 생각으로까지 조심스레 확장해 볼 수 있을까요. 선우는 다윗을 사랑하면서 처음으로 성가의 의미와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하게 됩니다. 추상적이고 멀게만 느껴졌던 신의 사랑은 다윗에 대한 감정을 통해 구체적이고 이해 가능한 것으로 다가옵니다. 나아가 선우는 신앙이 없는 의영의 헌신을 보며 하나님의 존재를 더욱 확신하게 되죠. 자신을 곁에서 돌보는 의영에게 어떻게 예수님처럼 그럴 수 있냐고 묻기도 합니다. <요나단의 목소리>는 퀴어의 사랑이나 비신자의 사랑 또한 절대자의 사랑과 맞닿아 있다고 말하며, 오랫동안 배제되어 온 다양한 형태의 사랑들까지도 조용히 끌어안습니다.


사랑은 타인의 고통을 온전히 이해하고 그로부터 구원해 주는 일이 아닙니다. 그가 살아온 세계를 함부로 단정하지 않고, 조용히 곁을 지키는 일에 더 가깝죠. 그런 사랑은 다양한 형태로 존재합니다. 퀴어의 사랑, 친구의 헌신, 신을 믿지 않는 자의 기도까지. <요나단의 목소리>는 어떤 형태가 됐든 그렇게 타인의 곁에 머무르는 다양한 마음들이 모두 사랑일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해할 수 없어도, 곁을 떠나지 않는 마음. 여러분은 지금 누구의 곁에 머물고 있나요?